‘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잔디(가명)씨가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천년의상상)라는 책을 20일 펴냈다. 자신이 입은 피해 내용과 고소에 이르게 된 과정, 박 시장의 죽음 이후 2차 가해의 실상과 이를 극복한 과정 등을 담았다.
이 책을 보면, 김씨는 2015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지원하지 않은 서울시장 비서직 면접을 보고 4년 넘게 박원순 시장의 비서로 일했다. 김씨는 2020년 4월 비서실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배 직원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이와 관련해 병원에서 상담을 받던 과정에서 “오랜 시간 지속된 박원순 시장의 성적 괴롭힘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성폭행 사건으로 곪아 터진 것”을 알게 됐다고 썼다. “그와 나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했을 때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 아래 나의 안전이 보호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사법 절차뿐이라고 생각했고 고소를 결심했다”고 적었다.
고소하기 전부터 김씨는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이 무모한 싸움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아빠는 소송을 시작하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씀까지 하시며 완강하게 반대했고, 엄마도 세상 여자 누구나 겪는 일이라며 묻고 넘어가자고 했다.” 정작 딸의 진술서를 본 엄마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울며 화를 냈고, 나중엔 “이 엄마는 최초의 2차 가해자였다”고 통곡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씨가 박 시장을 고소하고 경찰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은 다음날인 2020년 7월9일, 박 시장은 유서를 남기고 숨진 채 발견됐다. 박 시장의 죽음은 김씨에게 “어두운 터널의 시작”이었다. 박 시장의 죽음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김씨가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일부 인사들이 의도적으로 ‘피해호소인’이란 말을 쓰는 등 ‘2차 가해’의 고통도 극심했다고 한다. 김씨는 심리적으로 극히 위태로운 심신미약 및 공황 상태가 되어 두 차례나 정신건강의학과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비서실에서 일할 때 찍은 사진들이 유포된 뒤엔 성형수술까지 했다고 한다. 이름도 바꿨다.
김씨는 “내가 죽으면 나의 피해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그러면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고 여성운동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도 했지만, “여성운동이 10년 후퇴한다고 해도 잔디가 제일 중요하다”(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는 등의 위로와 응원을 받았다고 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는 김씨는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직 연대라는 것을 깊이 체감했다”며 “세상의 수많은 피해자분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동일한 위로를 느꼈으면 한다. 나의 작은 연대가 누군가에게 숨통 트이는 희망이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김씨는 이 책 3부에서 서울시장 비서실에서 자신이 겪은 부당한 노동환경과 처우에 대해서도 적었다. 박 시장의 통풍약을 대신 받으러 두세 달에 한 번씩 병원에 다녀와야 했고, 21일 연속으로 시장실에서 도시락을 차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가끔은 시장의 ‘심기보좌’를 위해 말동무가 되어 밥을 같이 먹어야 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으면 도시락 개수가 부족해서 밥을 못 먹거나 컵라면으로 때우기도 했다.” 또, 시장 가족의 명절음식을 챙기거나 선거 관련 일정에 동원되는 등 공무와 무관한 일도 해야 했다고 밝혔다.
이 책의 필명은 성폭력특례법상 ‘성범죄 피해자는 절차에 따라 가명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선택한 이름을 썼다. 김씨는 “30년 나의 삶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분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써 얻은 이 새로운 이름으로 인해 나는 잔디의 삶을 객관화하여 볼 수도 있고, 잔디의 삶에 몰입하여 사건을 해결할 수도 있고, 언젠가는 잔디의 삶을 정리하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김씨는 현재 서울시청에 복직했다.
김씨는 출판사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권력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훌륭하고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저를 괴롭힌다고 해서 그로 인해 제가 더욱 크게 고통받고 위축되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의연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저는 이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며 “존엄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별개로 그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는 사람이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내려놓기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