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을 비롯한 71개 단체가 2018년 7월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낙태죄 위헌 결정과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결로 ‘낙태죄 처벌 조항’의 효력이 없어진 지 8달이 지났다. 그 사이
임신중지를 선택하고자 하는 여성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정부는 인공임신중절약을 신속하게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으나, 연내 도입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인공임신중절약 도입은 ‘가교임상 시험’ 등을 구실로 늦춰지고 있다. 여성계는 “세계적으로 검증 절차를 거친 약물인 만큼 가교임상 시험을 생략해 여성들이 불법적인 임신중절약물을 쓰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일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효과적인 임신초기 중절약으로 알려진 미프지미소의 품목허가와 관련해 안전성·유효성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해 중앙약사심의위원회를 열었다. 중앙약사심의위는 보건복지부 장관과 식약처장에게 의약품의 기준·안정성·부작용 등에 대해 조언하는 법정 자문기구다. 이날 위원회에는 의료계·여성계·학계 인사 등 10여명이 참고위원으로 참석해 3분씩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핵심 쟁점은 ‘가교임상’을 진행할지 여부다. 가교임상은 글로벌 임상 시험을 거친 의약품이더라도 한국인을 대상으로 다시 임상 시험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는 절차다. 이날 중앙약사심의위에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가교임상을 거쳐야 한다는 견해를 냈고,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은 가교임상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모낙폐는
국내 제약사인 현대약품이 지난 7월 정식 허가 신청한 ‘미프지미소’의 주요 구성 약품(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의 안전성과 유효성이 국제 기구의 공인과 여러 국가의 검증으로 확인됐다는 입장이다. 미페프리스톤은 세계보건기구(WHO)가 2005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바 있다. 중국·대만 등 인종 구성이 한국과 차이가 없는 아시아 국가를 포함해 전 세계 75개국(2019년 기준)에서 사용되고 있다. 미소프로스톨은 국내에서 현재 위궤양 치료제의 용도로 허가되어 쓰이고 있는 약품이다. 또 이 약품은 위궤양 치료 목적 외에도 의료현장에서 분만 후 출혈, 자연유산 치료, 유도분만 등 오프라벨(허가범위 외 사용)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게 모낙폐 쪽의 설명이다. 반면,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함께 사용하는 병용요법 데이터가 부족한 만큼 가교임상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프지미소 가교임상을 진행할 경우 품목허가 결론을 내기까지 최소한 1년의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임신 초기 가장 효과적인 임신중절 방법으로 알려진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의 합법적인 접근 경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터넷을 통한 임신중지약물 불법 판매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중앙약사심의위에 참석한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사무국장은 “2019년 한 해 동안 적발된 유산유도제 판매 불법광고만 2465건에 달하는 등 의약품 안전관리 사각지대가 방치되고 있다. 인공임신중절의약품 품목허가가 시급하다”는 취지의 의견을 제출했다.
여성계에서는 현장의 요구는 시급한데 식약처의 움직임은 굼뜨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불필요한 절차때문에 유산유도제 도입을 지연하는 것은 현재진행형으로 발생하고 있는 여성들의 피해와 권리침해를 방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국회 토론회에서 채규한 당시 식약처 의약품정책과 과장은 “인공임신중절의약품은 안전사용을 전제로 해 허가되도록 할 것”이라며 “토론회에서 중요성이 이야기된 만큼 (허가) 신청이 되면 다른 의약품에 우선하여 신속히 허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식약처는 약품 품목허가 신청일로부터 업무일 기준 120일 이내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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