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유정? '
'네, 왔다갔다 하는데 갑자기 뭔가 나오는 느낌이었거든요. 이상해서 살펴봤더니 팬티에 뭐가 묻어 있었어요'
아들은 어느새 새로 속옷을 갈아입고는 내게 벗어 놓은 팬티를 내 밀었다. 과연 무슨 액채같은 것이 한 방울 쯤 묻어 있긴 했다.
'너... 혹시 소변 방울 흘린 거 아니니?'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아들은 펄쩍 뛰었다.
'엄마, 오줌이 아니라구요. 점성이 있는 액체라니까요?'
'그래.. 좀더 많이 나오게 되면 그때 얘기해'
''엄마... 아빠한테도 얘기 할 거예요? 제가 유정한거?'
'그게 사실이면 당연히 얘기를 해야지. 우리 아들이 드디어 '남자'가 되었다는 증거인데... 엄마는 윤정이나 이룸이가 초경을 하게 되면 '초경파티'를 해 줄생각이거든. 몸이 정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고 드디어 생명을 가질 수 있는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가족 모두가 축하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야. 니가 '몽정'을 하게 되어도 마찬가지지. 정말 축하할 일이지'
'그럼, 저도 몽정파티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 가족들끼리만 하는 거지요? 무슨 음식 차릴건데요? 선물도 주는 거예요?'
'아이구.. 잿밥에만 관심이 넘치는 구나'
아들은 정말 신이 나 있었다. 정말 '유정'을 하게 된 건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들은 그 첫 사건 이후 확 변했다. 그렇게 씻기 싫어하던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속옷을 새로 갈아입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팬티에 뭐가 묻은 것 같아서 찜찜하다는 것이었다. 집에서도 속옷을 자주 갈아 입었다. 내겐 정말 깜짝 놀랄 일이다. 학교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놀다 들어와도 씻으라고 하면 펄쩍 뛰며 도망가던 녀석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씻으니 잔소리 할 일이절반은 줄었다. 아들은 그 후에도 팬티를 갈아입을때마다 내게 가져와 보여주는데 팬티에 묻는 양이 조금씩 늘어났다. 제 말로는 밤꽃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정액이 틀림없단다. 아들아.. 밤꽃냄새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니..내가 해 주었던가? 밤꽃이 지천으로 피던 어느 여름에? 그러고보니 해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에 아들의 몸에 큰 변화가 온 것은 틀림없다고 나와 남편은 결론지었다. 그러고보니 새삼 녀석이 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구나.. 녀석... 많이 컸구나. 아들의 이런 변화가 빠른건지 어떤건지 잘 모르겠다. 성장이란 개인차가 워낙 크니까 말이다. 또래 여자친구들은 대부분 생리를 하고 있으니 아들에게도 이런 변화가 올 수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다. 이제 아들이 기대하는 몽정파티를 어떻게 해줄까 궁리하고 있는 중이다.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성장을 축하받는 의식을 한다는 것은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랄때는 초경이든 몽정이든 쉬쉬하며 혼자 마주하고 겪어내는 일이었지만 부모의 적절한 안내를 통해 자신이 겪을 일들을 미리 알고 준비하게 되면 아이는 두려움이나 수치심,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성장을 고대하며 기다리게 된다. 몸의 변화에 기뻐하고 당당해하며 으쓱해하는 아들이 모습은 내게도 퍽이나 대견하고 이쁘다. 이 사건 이후 나와 아들과의 관계에도 연일 봄바람이 불고 있는 중이다. 유정에 대한 이야기를 어린 두 여동생과 나눌 수 는 없으니 이야기가 통하는 엄마를 부쩍 더 신뢰하고 의지하게 된 것이다. 비밀스러웠던 어른의 세계에 한발 더 가까와진 듯 느끼는 건지, 동생들과는 확연히 달라진 스스로에 대해 새로운 감각이 생겼달까, 그런 감정들이 자신의 행동을 한결 의젓하게이끄는 것도 같다. 남편도 나도 아들이 많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갑자기 훌쩍 큰 것처럼 여동생들과 유치한 말싸움도 줄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시간도 빨라졌다. 몸의 변화가 정신까지 성숙하게 이끄는 모양이다. 이거 완전 대환영이다. 이제 빨랑 씻어라 하고 닥달하는 잔소리가 사라진 밤은 더 많은 대화화 스킨쉽이 오가는 달달한 시간으로 변했다. 아직도 부모와 동생들과 같이 자는 아들은 여전히 안아주세요, 뽀뽀요 하며 내게 매달리지만 저 혼자 방에 있는 시간도 늘어나고 있다. '저기...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니 방으로 독립해? 그건 나쁜 일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즐기면 되는 일이지만 적어도 혼자 있을때 해야 하는 건 알지?'
'뭘요?'
아들은 능청맞게 빙글거리며 내게 묻는다.
'흥... 알면서...' 나도 같이 빙글거리며 웃어 주었다. 아들방에 질 좋은 티슈 상자를 챙겨 줄 날이 가까와지나보다. 내 작고 귀여운 첫 아기가 언제 이렇게 훌쩍 자랐는지 어느새 나를 가리는 아들의 넓은 등이 기특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다. 아들과 이런 이야기도 자연스럽고 편하게 주고 받을 수 있는것도 기쁘고 그만큼 부모를 믿어주는 것고 고맙다. 녀석과 정말 징글징글하게 싸워가며 지내왔는데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안고, 또 다시 지지고 볶으며 지냈던 시간들이 다 헛되지는 않았구나... 생각하는 것도 왠지 짠하다. 그나저나 이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제 방으로 들어가버리면 내가 더 허전해하지 않을까. 한 놈이라도 엄마 좀 안 찾았으면 좋겠다고 푸념하며 살았는데 아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12년의 세월동안 어쩌면 내가 더 아들에게 의지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조금씩 아이의 몸을 벗기 시작하는 아들의 변화를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며 이제 내 마음의 독립도 준비를 해야겠다. 아이가 있어 이 나이에도 이렇듯 쉼없이 성장할 수 있으니 고맙구나... 아들.. 너의 설레는 몽정기를 기꺼이 응원한다.
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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