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티브이엔 밤 11시) 1997년 부산을 배경으로 당시 고등학생들의 추억을 더듬는 드라마. 그룹 에이핑크의 정은지가 에이치오티(HOT) 열혈팬인 주인공 성시원 역으로 연기에처음 도전한다. 가수 서인국이 시원의 단짝 윤윤제, 은지원은 에로물을 좋아하는 도학찬, 그룹 인피니트의 호야는 ‘상담 창구’ 강준희 역을맡았다. 당시 학생들의 대중문화 몰입과 학생문화가 줄거리다. 3·4화 연속 방송
내 안의 악마, 매가 매를 부른다
베이비트리에 글을 올리고나면 다양한 방법으로 피드백을 받습니다. 잘 읽었다며 이메일로 따뜻한 격려의 글을 보내주시기도 하고, 링크한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댓글도 있습니다. 온라인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지인들과 차 한 잔 혹은 술 한 잔을 나누며 벌이는 토론까지 생각한다면 그 방법은 제법 여러 가지 입니다. 지난번 ‘아이의 거짓말에 대처하는 부모의 자세(2012년 8월 16일자)’가 올라간 후에는 유독 지인들의 피드백이 많았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체벌에 관한 논란에 초점이 맞춰졌지요. ‘매를 아끼면 후레자식이 된다’는 강경한 의견부터 ‘체벌이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혼란스럽다’ ‘세상에 사랑의 매라는 것은 없다’ 등 다양했습니다.
제가 회원으로 참여하는 여성정신건강운동 단체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주말학교에서는 ‘◯◯는 왜 할까요?’라는 수업을 진행합니다. 아이들이 해야 하는 사소한 일, 공부 등에 ‘왜 할까?’라는 질문을 던져 왜 그래야하는지, 왜 그런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생각을 서로 나누면서 좀 더 건강한 삶을 살게 하자는 취지지요. 이 수업을 준비하시는 선생님은 이러한 수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적 이유를 설명하시며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을 언급하십니다.
독일 나치스 친위대 장교출신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은 나치시대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다지요.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에 숨어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발각되어 재판장에 섰을 때 세계 언론은 이 ‘악마’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몇 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도 눈물도 없이 끔찍할 거라 예상했던 그 ‘악마’는 어이없게도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히틀러를 수뇌로 한 나치 지도부의 ‘유대인 절멸’을 명령 받은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치당의 강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어본 일이 없었답니다. 피고석에서 ‘그때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그는 지도부의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저 자신에게 떨어진 상부의 명령을 아주 충실히 이행할 뿐이었지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생각의 부재, 성찰의 부재는 이같이 가공할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부모들도 주말학교 아이들처럼 ‘◯◯는 왜 할까요?’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합니다. 도대체 우리 부모들은 왜 매를 드는 걸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부모’로서의 책임감 때문일 겁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 단정치 못한 몸가짐 같은 것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회심리적인 압력을 받게 마련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 아이가 무언가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보였을 때는 잊히지 않을만한 강한 충격을 줌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강한 충격’이 매가 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이 어렸을 때 그리 당했던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무언가 잘못을 했을 때, 매가 아닌 평화적인 문제해결의 충분한 경험이 있었다면 어쩌면 체벌은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선택사항이 아니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어른들이 매를 드는 일은 나쁜 것, 미래의 범죄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지극히 ‘아이를 위한’ 바램에서 비롯된 ‘아이를 위한’ 교육적 조치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아이를 위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우리의 행동이 혹시 오해나 착각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많은 교육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체벌의 부작용은 ‘왜 매를 드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체벌이 가져오는 ‘즉각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매를 드는 목적이 과연 지금 문제가 되는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려는데 있는가, 아니면 아이가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서 삶에서 자신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는가에 따라 그 ‘즉각적인 효과’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는 겁니다. 체벌의 위협과 고통은 아이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당장 멈출 수는 있어도 아이의 행동패턴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체벌은 더 자주, 더 강하게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100명의 아이를 데려오면 100명 모두 원하는 대로 만들어 줄 수 있다’던 초기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오만도 이런 ‘자극(체벌)’과 ‘반응(행동교정)’의 연계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초기 행동주의가 간과했던 것은 자극이 떨어지면 반응 역시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지속적인 자극을 통해 습관을 만들어 놓더라도 자극이 무뎌지면 습관 역시 무뎌지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체벌은 충격요법은 될 수 있을지언정 장기적인 처방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는 아이의 좋은 점이 아닌 나쁜 점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리고 내적동기가 아닌 외적동기에 의해 아이가 움직이게 만들지요. 이러한 현상은 아이의 순종성을 강화해서 건설적인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욕구를 키우기 보다는 ‘생각 없이’ 복종하는 아이로 길들입니다. 어른의 통제력과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아이의 ‘시키는 대로 하려는’ 의존성은 함께 강해집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의존성은 아이로 하여금 어른의 눈을 피하려는 욕망과 적대감을 동시에 증대시키지요. 이렇게 되면 부모와 자녀사이의 좋은 관계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어른에 대한 두려움과 적의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하고 함께 소통하려는 욕망과 능력을 동시에 꺾어버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체벌이 자신의 잘못이 불러일으킨 어른들의 ‘화’의 표현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복되는 체벌을 통해 아이들은 폭력은 자신의 화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부모가 되면 또다시 ‘아이를 위한’ 매를 들겠지요. 지금 ‘아이를 위한’ 사랑의 매를 들고 있는 우리 부모들처럼 말이죠. 미국의 심리치료 전문가 앨리스 밀러 박사가 쓴 <사랑의 매는 없다>라는 책에 보면 체벌은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교육전문가들의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매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갈등, 대립, 문제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과 느낌, 그리고 다른 사람의 그것들을 함께 나누면서 보다 바람직한 해결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지요. 그럴 수 있는 욕망과 능력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일이 ‘아이들을 위한’ 부모노릇일 것입니다. 체벌이라는 ‘손쉬운’ 교정법이 대화와 설득의 ‘수고스러운’ 교육방법을 배제하게 만듭니다. 교사들이 체벌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든 것은 수많은 학생들, 엄청난 잡무에 시달려 아이 하나하나와 소통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도 때리면 바로 말을 듣게 되는 ‘효과성’ 앞에서 아이의 욕망이나 심리상태를 이해하고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길고 힘든 과정’을 생략하기 쉽습니다. 우리 사회가 소통이 부족하다고 진단되는 밑바탕에는 민주적인 대화보다는 ‘사랑의 매’로 문제를 해결해 온 소통방식이 깔려있을 겁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취재하여 일련의 것들을 정치철학적으로 풀어낸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야 말로 우리가 경계해야할 아이히만의 특성이라고 말합니다. 사회가 만들어 낸 이상과 허상의 경계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밀어붙이는 ‘생각 없는’ 행동이 얼마나 기막힌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지 경고합니다.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나 좋은 부모가 되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합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성공, 돈 같은 사회적 이상과 허상들이 부모들을 불안으로 몰아넣고 그 불안이 부모들의 생각을 마비시킵니다. 그러한 사고의 마비가 우리 아이들을 어떤 지경에 몰아넣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더욱 섬뜩한 이유는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데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는 아렌트의 경고 때문이겠지요.
차상진(sangjin.cha@gmail.com)
벌 받는 아이들. 한겨레 자료사진
응답하라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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