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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베이비트리

도대체 이 메론은 어디에서 왔을까

등록 2012-09-10 15:20수정 2012-09-10 15:29

상큼한 메론 한 접시 드세요!

옥상에 있는 상자 텃밭에서 메론을 땄다.

강동풀빌라의 옥상, 상자 텃밭.

8월 9일, 애들 주먹만한 메론이 하나 달려있다. (오백원짜리와 크기비교)

9월 5일

한 달 사이에 크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표면에 그물 무늬가 생겨, 오오오!!! 진짜 메론의 풍모가 느껴진다.

옥상에 메론도 심었어?

누군가 이렇게 묻겠지만, 사실 이 메론은 내가 '심은' 것이 아니다.

상추를 심은 화분에서 어느날 저절로 싹이 트더니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고 이렇게 열매까지 맺은 것이다.

도대체 이 메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메론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3~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루의 세 돌 무렵, 그 즈음 아루가 유아 변기를 '떼고' 화장실의 일반 좌변기에 앉아 똥 오줌을 누게 된 것 같다.

엄마, 똥은 어디로 사라져?

의기양양하게 혼자 변기에 올라가 똥을 누고 밸브를 내리면서 아루가 물었다.

제가 눈 똥이 물과 함께 휘리릭 사라지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글쎄... 어디로 갔을까?

나는 아루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서너살 아이에게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 일인지도 고민스러웠지만 내가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다.

하수관을 통해 여러 집에서 나온 더러운 물을 한 곳에 모으고 몇 단계에 걸쳐 정화를 하겠지. 물론 누가 물어도 금방 대답할 수 있는 이 정도의 상식은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 어느 언저리에 이런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나와 나의 이웃, 그리고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의 배설물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 지 상상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니까, 결국 정화된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 우리가 다시 먹게되는 거잖아!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사실이지만 내 삶의 문제로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하수를 어떻게 정화해내는지, 호기심을 넘어 제대로 정화해서 흘려보내고 있기나 한건지, 의심이 들었고 미래에 우리 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마음껏 먹으며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거리낌없이 소비하고 마구 버리는 쓰레기에도 생각이 미쳤다. 내가 버린 쓰레기가 어디에 쌓이거나 묻혀 오랫동안 썩지 않을 것을 상상하니 참으로 불편했다.

대자연의 순환으로 보면 내 몸에서 먹고 싸는 일이 결국 한 가지 일인데 우리의 편리하고 깨끗한 도시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다. 냄새나는 배설물은 버튼만 누르면 눈 앞에서 사라지고 쓰레기를 봉지에 담아 내 놓으면 밤사이 누군가 가져간다. 각자의 바쁜 일상에서 어딘가로 흘러가고 어딘가에 쌓여 있을 쓰레기 더미와 내 삶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세제를 쓰면서 그것이 내 삶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처럼.

'알게뭐야'라는 이현주 목사님의 동화속 이야기가 바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멘트를 실은 트럭 기사와 밀가루를 실은 트럭 기사가 휴게소에 들렀다가 트럭을 바꿔 타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알게 뭐야' 하면서 과자 공장에 시멘트를, 집 짓는 곳에 밀가루를 배달한다. 과자 만들고 집 만드는 사람들도 밀가루와 시멘트가 이상하다고 여기지만 '알게 뭐야' 하면서 밀가루로 집을 짓고 시멘트로 과자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지각없이 행동한 결과, 시멘트 과자를 먹던 아이의 이는 부러지고 밀가루로 지은 집에 사는 아이는 집이 무너져 뼈가 부러진다.

어떤 학자는 인간을 '미래를 먹는 존재'라고 했단다. '인류가 환경의 일부로 살아가기보다 환경을 지배하면서 중요한 자원의 기반을 잠식해가는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 도은,여연,하연 지음. 28쪽)

우리 세상이 자연과 화합하지 못하고 환경 파괴가 심각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알게 뭐야', 하는 안일한 내 삶이 아루와 해람이 살아갈 미래를 갉아 먹는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괴로웠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남겨 주지는 못하더라도 아이들의 미래를 갉아 먹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복잡하고 견고한 이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은 미미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솔직히 나는 소로우나 니어링처럼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이들, 아루와 해람이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 큰 변화를 이루어 내지는 못할지라도 작은 돌이라도 하나 던져 보자,라고.

3년 전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면서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내가 직접 기른 유기농 채소를 먹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농사를 통해 자연과 세상을 배우고 싶었다. 제 스스로 아무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저 소비만 하는 현대 문명인의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첫 해에는 시험 삼아 옥상 화분에 상추, 토마토와 고추를 심었고 작년부터는 구청에서 운영하는 도시 텃밭을 분양 받아 서너 평 정도의 밭을 일구고 있다.

텃밭을 분양 받으면서 음식물 찌꺼기로 퇴비를 만드는 데 관심이 생겼다. 먹고 남긴 음식물 찌꺼기가 봉투에 담기는 순간 '쓰레기'가 되지만, 잘 썩혀 흙으로 되돌리면 좋은 거름이 된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다.

음식물 쓰레기를 3리터 비닐 봉지에 담아 버리게 되어 있는데 봉투가 다 차도록 채우다보면 여름에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부패가 시작된 음식 쓰레기 봉투를 묶어서 밖에 내 놓는 것도 고역인데 누군가 이 것들을 치운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텃밭 한쪽에 구청에서 마련한 퇴비통을 이용했다. 음식 찌꺼기를 밀폐용기에 모아 자전거에 싣고 다녔다. 밭에 매일 갈 수 없으니 음식 찌꺼기를 바로 바로 해치울 수가 없어 불편했다. 그리고 내 의욕처럼 빠르게 어떤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음식 찌꺼기가 밭에 줄 퇴비로 변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다음 해에나 퇴비로 쓸 수 있다는데 구청 텃밭은 1년 단위로 계약을 하기 때문에 다음 해를 기약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다른 방법을 알아 보았고 EM으로 알려진 유효 미생물로 음식 찌꺼기를 발효시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쌀뜨물에 설탕과 미생물액을 넣어 배양액을 만들고 음식 찌꺼기를 이 배양액과 섞어 발효시키는 것이다. 혐기 발효를 시키기 때문에 뚜껑을 꼭 덮어야 하니까 집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밀폐 용기에 음식 찌꺼기를 담고 쌀뜨물 배양액을 부어 거의 잠기도록 한다. 용기가 다 차면 뚜껑을 꼭 닫은 상태로 그대로 놔 두었다가 1주일 후에 화분 흙에 골고루 섞어 준다. 완전히 발효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파리가 꼬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위를 흙으로 두껍게 덮거나 비닐을 덮어 둔다. 음식 찌꺼기의 종류와 상태, 그리고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한 달 정도 지나면 음식 찌꺼기 원래의 모습을 알아 보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렇게 음식 찌꺼기로 퇴비를 만들었다. 밀폐용기에서 잘 발효시키면 악취가 아니라 술 빚을 때 나는 향기가 난다는데 나는 그렇게 기분좋은 상태를 만들지는 못했다. 밀폐용기를 화분에 비우는 것이 솔직히 고역이었지만 한 달 후를 생각하면 뿌듯했다. 우리가 먹고 남는 것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니까 음식 찌꺼기가 많이 나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노력하게 되었다.

작년 가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퇴비 숙성중인 화분의 비닐 덮개를 걷는 순간, 정체불명의 새싹들이 나타난 것이다!

무슨 싹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흔히 보는 잡초는 아닌 것 같고, 이파리가 큰 것으로 보아 우리가 봄에 심었던 상추, 토마토, 고추의 씨가 떨어져 발아한 것도 아니었다. 음식물 찌꺼기에 있었던 과일의 씨가 싹을 틔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콩콩 뛰었다.

아하, 메론!

막 껍질을 벗고 나온 어린 싹에 아직 붙어있던 씨 껍질이 단서가 되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새싹의 출현이 반가웠고 화분 속 꽤 깊은 곳에서 이렇게 싹을 틔우다니, 메론 씨의 생명력이 놀라웠다.

여름에 우리가 메론을 유난히 많이 먹었지... 아이들과 메론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새싹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욱 흐뭇했다.

엄마, 그럼 이 싹이 자라면 또 메론이 열리는 거야?

아이들은 벌써 싹이 자라서 꽃이 피고 메론이 열리는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보나마나 F1종자에서 나온 거라고,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할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계절도 맞지 않았다. 9월에 난 싹들은 날이 추워지면서 스스로 사그러졌다.

한 번의 깜짝쇼로 끝난 줄 알았다. 추위에 얼어 죽은 메론 싹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새싹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작년에 만든 음식물 퇴비로 밑거름을 해서 몇가지 쌈채소와 토마토를 심었다.

어느날 물을 주다가 깜짝 놀랐다. 상추들 사이에서, 토마토 옆에서 메론 싹이 또 비집고 나오는 게 아닌가!

너희들 정말 살고 싶구나!

메론 씨의 생명력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상추와 토마토를 위해서 메론 싹을 뽑아 버릴 수 없었다.

뽑아내지 않았지만 메론을 키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메론이 열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F1 종자에서 나온 다음 세대는 부모 세대와 같은 열매를 얻을 수 없다고 하니까, 그리고 음식찌꺼기 퇴비와 해람이 오줌으로 키우는 상자 텃밭에서 메론 같은 과일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상추 잎들 사이에서 요리조리 가지를 뻗어나가고 노란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가끔 미소를 짓곤 했지만 메론이 옥상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한 여름이 되어 상추에서 꽃대가 올라오고 토마토도 시들해질 무렵 메론 꽃은 열매를 맺었다. 솔직히 관심을 두지 않아 정확히 언제 열매가 맺혔는지도 잘 모른다.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것이 조금씩 자라 애들 주먹만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에 그물 무늬가 나타났다. 그제서야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메론을 들여다 보았다.

여름에 놀러 다니느라고 며칠씩 집을 비우고 돌아오면 먼저 옥상에 올라가 메론이 제대로 있는지 살폈다. 태풍과 폭우를 잘 견뎌내는 것이 신기했다.

엊그제, 크기는 작지만 촘촘한 그물 무늬로 덮여있는 메론을 보면서 딸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파리는 모두 누렇게 시들어 있었다. 열매를 맺고 키워내느라 사그러진 잎들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이 조심조심 따서

야구공과 비교해서 크기를 재었다.

그리고, 맛있고 신나는 메론파티!

조그만 메론 하나, 잘 익었나 통통통
단숨에 쪼개니 속이 보이네
몇번 더 쪼갠 후에 너도 나도 들고서
우리모두 하모니카 신나게 불어요
쭉쭉쭈주쭉 쓱쓱쓱쓱쓱 싹싹싹싹싹 쭉쭉쓱쓱싹

'수박파티'라는 동요의 노랫말을 바꾸어 부르며 메론을 자르고 노래처럼 신나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오오, 제법인데!

그리 달지는 않았지만 즙이 많고 상큼했다.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할거라는 내 생각이 편견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믿지 말라고, 자연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오묘하다고. 깊은 흙을 뚫고 나와 스스로 자라 열매까지 맺은 이 씨앗의 힘이 생각할수록 참 신통했다.

이번에는 씨앗을 받았다.

이 씨앗들은 어떤 우주를 담고 있고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내년 봄에 심어볼 생각이다.

다 먹고 난 껍질은 이렇게 물기를 조금 빼고 아직 신선한 상태에서 음식물 찌꺼기 통으로 들어가 다시 흙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똥이 어디로 사라지냐는 아루의 질문에서 비롯된 고민은 아이들의 미래를 갉아 먹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갖게 했다.

텃밭을 일구면서 자연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의식적으로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내 일상을 들여다보면 턱없이 부족하고 부끄럽다.

세상이 온통 우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력해지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주먹만한 메론에 감동하고 같이 신나게 메론 파티를 즐길 수 있는, 달지도 않은 메론을 우물거리며 밖에서 산 메론보다 훨씬 맛있다고 말해주는 아루와 해람이,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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