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주인공 탄지로. 등에 혈귀가 된 여동생을 짊어지고 다닌다. 귀멸의 칼날 일본어판 누리집
“(질의한 사람이) 에다씨여서 저도 전집중의 호흡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지난해 11월2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말에 일본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한 관료와 의원들은 ‘설마?’ 하며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총리가 국회 답변에서 만화 <귀멸의 칼날>의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초인적 능력을 발휘할 때 읊조리는 ‘전집중 호흡’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우리로 비유하자면, 정세균 총리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의 주인공 강림처사처럼 “봉인의 칼날!”을 외친 셈이다. 역대급 흥행 기록을 쓰고 있는 <귀멸의 칼날>이 일본에서 단순한 인기 만화 수준을 넘어 사회적 현상으로 확대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이야기의 얼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다이쇼시대(大正·1912~1926년) 비밀조직 귀살대(귀신 죽이는 부대)에 들어간 주인공 탄지로가 사람을 잡아먹는 ‘혈귀’들과 그들의 우두머리 키부츠지 무잔을 무찌른다는 얘기다. 탄지로는 혈귀의 습격으로 가족들이 몰살당한 상황에서, 절반쯤 혈귀로 변한 여동생 네즈코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역사적 실제 공간과 판타지를 절묘하게 조합한데다 불굴의 투지를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 빠른 전개, 화려한 액션과 그림체, 가족애와 역경을 딛는 성장스토리 등 흥행요소가 가득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한국에선 욱일기 모양인 탄지로의 귀걸이와 일제강점기 시절인 다이쇼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것 등이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귀멸의 칼날>의 인기는 상상을 넘는다. 2016년 단행본 1권을 시작으로 지난해 12월 최종본 23권까지 누적 발행 부수(종이·전자책 합산)가 1억5천만부를 넘었다. 일본출판과학연구소는 지난해 일본 만화책 시장이 2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6126억엔·6조3430억원)한 주요 원인의 하나로 <귀멸의 칼날> 흥행을 꼽고 있다. 지난해 일본 서점에서 책 판매량이 급증했는데, 언론들이 “<귀멸의 칼날>을 사려는 독자들이 서점을 찾은 게 영향을 준 것”이라고 풀이할 정도다.
이른바 한 콘텐츠를 여러 플랫폼에서 파는 ‘미디어믹스’에서도 놀라운 성적을 내고 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도 지난해 10월 개봉한 뒤, 10일 현재 관객 2980만명, 수입 399억엔(4131억원)을 기록했다. 종전 최고 기록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년·316억엔)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115엔짜리 <귀멸의 칼날> 커피 28종 세트가 5600엔에 중고거래되는 등 오타쿠들을 상대로 한 ‘오타쿠노믹스’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달까진 주인공들을 그린 그림으로 전국순회 전시회까지 열렸다. 최근에야 이름과 나이, 성별 같은 정체 일부가 겨우 알려진 작가 고토게 고요하루가 코로나19 극복을 응원하기 위해 탄지로와 여동생 네즈코를 등장시킨 그림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3월 일본 문화청은 작가인 고토게에게 예술선장문부과학대신(장관) 신인상을 주면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사회현상화한 작품으로 미디어예술분야의 역사에 어울리는 묵직함과 현재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일본의 서브컬처 전문 필자 가와무라 메이코도 “(<귀멸의 칼날> 사례처럼) 70살 어르신부터 초등학생까지 같은 작품 이름을 말하는 건 보기 어렵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현상화가 어떤 힘을 갖는지 <귀멸의 칼날>이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귀멸 신드롬’이 일본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은 지난달 23일 북미 영화관 1600여곳에서 개봉해 개봉 첫 주말 3일간(23~25일) 2114만달러(238억원)를 벌어들였다. 역대 북미 개봉 외화 최고 오프닝 기록이다. 개봉 2주차에는 아예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다. 반일 불매운동 분위기가 남아있는 국내에서도 <귀멸의 칼날>만큼은 예외로 취급되고 있다. <교보문고> 주간 베스트셀러를 보면, 만화책 <귀멸의 칼날> 최종화(23권)은 지난달 출간된 뒤 최근 4주 연속 종합부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만화책이 교보문고 종합판매 1위를 차지한 것은 지난 2014년 <미생>(윤태호) 이후 7년만이다.
지난 1월 국내 극장 개봉한 애니메이션도 12일 현재 국내 관객 196만명을 동원하며 윤여정 주연의 <미나리>(109만명)를 제치고 올해 흥행 2위에 올라있다. 20~30대 엠제트(MZ) 세대와 여성이 더 열광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교보문고가 분석한 <귀멸의 칼날> 구매층은 20~30대가 55.6%, 여성이 68.1%에 이른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선이 악을 무찌르는 단순명료한 내용이 무기력한 코로나19 상황에서 패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공감을 끌어냈을 것”이라며 “국내 2030세대의 호응이 높은 것은 ‘반일 감정은 그것대로 따지되, 내가 끌리는 것은 한다’는 세대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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