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뒤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성평등을 촉구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10~20대 여성들은 15%나 소수정당이나 무소속 같은 ‘기타 후보’를 지지했고 젠더 문제를 중시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안 봐도 결과를 대충 알 것 같지만, 그래도….”
반쯤은 이미 접힌 기대감을 안고 지인들과 함께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았다. 지난 7일 저녁 8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나고 방송 3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공개된 순간, 탄식이 터져나왔다. 최종 결과에서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는 57.5%,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39.2%의 득표율을 보였다. 강남구, 서초구뿐 아니라 25개 모든 선거구에서 오세훈 후보는 50% 이상을 득표했다. 내 주변 한 줌 친구들이 던진 표의 양상과는 딴판이었다.
방송 3사의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전에 없던 회색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20대 이하 여성 중 15.1%가 해당되는 구간이다. 18살에서 29살 여성 유권자 중 40.9%가 오세훈 후보를, 44%가 박영선 후보를 지지했고, 나머지 15.1%가 소수정당이나 무소속 같은 ‘기타 후보’에게 표를 줬다. 다른 세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높은 비율이다. 20대 이하 여성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소신 투표’ 비율을 보인 집단은 30대 여성(5.7%)이었다. 자신이 표를 준 후보가 높은 확률로 선거에서 질 것을 알면서도 과감히 투표한 20~30대 주변 지인들에게 물었다. “왜 소신껏 투표했냐”고.
“문재인 후보를 뽑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당선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더라도 더 낫다고 생각하는 후보를 지지해왔지.”
20대 후반 여성 ㄱ은 애초에 1번 또는 2번을 뽑아야 하는 선거의 암묵적 논리에 굴해본 적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선거에선 1번을 뽑아야 하나 고민했던 순간이 없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 젊은 여성 정치인을 만났는데 “박영선 후보 같은 사람이 세를 확장할수록 앞으로 우리 같은 젊은 여성들에게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해서 고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후보를 평가할 때 가장 중점을 두고 본 부분이 ‘젠더 폭력’이라고 했다. “보궐선거를 하게 된 원인이 처음부터 전 시장의 성폭력에 있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한 대안이 있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졌다”고도 했다. 두번째로 집중한 부분은 ‘부동산 공약’이었다. 그는 부동산을 ‘소유’의 관점보다 ‘거주’의 관점으로 보는 후보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파트너와 결혼을 하지 않고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신혼부부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그는 생활동반자법이 통과되어 거주의 안정이 보장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30대 여성 ㄴ은 “예전엔 더불어민주당을 주로 찍었지만 이번만은 소신 투표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 기대한 만큼 실망감이 컸다고 한다. 촛불 정국에서 당선되었으므로 분열을 최소화하리라 기대했지만 정부의 행보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특히 임대차 3법을 밀어붙인 걸 문제로 짚었다. 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설득을 제대로 하는 과정이 조금 더 필요했다고 그는 보았다. “대통령을 촛불시위로 탄핵시키고 그 국면에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라면 민심을 잘 읽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고도 덧붙였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그는 텔레비전에서 후보 토론을 지켜보다가 ‘기타 후보’에게 눈길이 갔다고 했다. “신지예 후보가 여성의당 김진아 후보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여성은 뭐냐’고 묻는 걸 보고, 저 사람이 정치인으로 잘 성장하려면 이번에 표를 좀 더 얻는 것이 좋을 것 같더라고. 정의롭고 평등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지.”
지인 중에는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를 포기했다거나 투표장에 가서도 무효표를 만들고 나와버렸다는 이들도 있었다. 투표 행위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신나고 두근거리는 느낌이 더 이상 없다는 얘기를 여럿한테서 들었다. 30대 여성 ㄷ은 어차피 뽑아봤자 사표가 될 거라는 생각에 무기력해졌고 그만큼 분노도 컸다고 말했다. “살면서 투표 안 한 거 처음이야. 그런데, 이번엔 정말 사표를 만들 힘도 없었어. 투표장에 가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졌다니까. 애초에 이 선거를 왜 하게 됐는지 생각해보면 그것부터가 너무 답답하고.”
‘기타 후보’에 소신 투표를 하거나 아예 투표를 포기했다는 이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공통적으로 지금 정부에 대한 실망이 깔려 있었다. 2번은 찍기 싫지만 1번도 찍을 수 없는 마음이 짙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누구를 뽑을지 확신이 안 드는 선거였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를 지지했다가, 그의 죽음과 죽음 이후 사건에 대처하는 여당의 태도를 보며 실망한 여성 유권자들의 분노는 강도가 높았다. “표를 마치 맡겨놓은 것처럼 구는데 화가 나더라고. 왜 뽑아줘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20대 여성 유권자 ㄹ)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색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20대 이하 남성 유권자의 72.5%가 오세훈 후보를 지지했고, 20대 이하 여성의 44%가 박영선 후보를 지지했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죄다 보수적이고 여성들은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단언하기 쉽지 않다. 20대 남성 ㅁ은 “이번엔 1번을 지지할 수 없어서 2번을 차선으로 지지했다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른바 ‘조국 사태’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복무 중 휴가 혜택 논란 등을 보며 ‘정권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면서 2번을 찍었다는 30대 여성 ㅂ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 정부가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표를 주지 않았다는 그는 ‘보수’라는 하나의 단어만으로는 정체성을 표현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는 부동산에 관심이 많고 주택으로 자산을 형성하려 하지만 평등이라는 가치를 지향하고, ‘여성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밀레니얼 세대는 자기 안의 이런 불일치와 그다지 불화하지 않는다. 경제와 사회, 정치와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소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색깔을 그때그때 다르게 드러내는 카멜레온 같기도 하다. 하나의 구호로 묶이기 어렵다는 한계 때문에, 밀레니얼은 정치세력화하지 못하고 ‘개인’의 자리에 머무른다. ‘셀레브리티’나 ‘인플루언서’ 되기를 꺼려 하지 않는 요즘 세대들에게 개인의 ‘영향력’만큼 중요한 열쇳말도 없지만,
이 세대가 집단적으로 뭉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드물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표현할 수 있는 자리를 공동체 안에서 획득하는 일과 정치적 공동체를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의 구호를 강렬하게 내면화하는 세대이면서도, 정당을 키우거나 연합하여 목소리를 형성하는 일에는 아이디어와 경험이 부족하다. 그런 측면에서 자꾸만 흩어지는 밀레니얼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너무 미약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아직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이번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는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발단이 되었던 만큼 젊은 페미니스트 후보들이 출마해 눈길을 끌었다. 거대 양당의 목소리와 다른 주파수를 가졌을 뿐,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젊치인(젊은 정치인)을 운동장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나선 ‘뉴웨이즈’라는 그룹도 등장했다. 이들은 청년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만 40살 이하 젊은 정치인들을 발굴하고 키워서 정당이라는 운동장으로 내보내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박혜민 뉴웨이즈 대표는 “우리 세대는 정치에 무관심한 게 아니다. 정치적 권력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우리 식대로 바꾸면 정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뉴웨이즈는 현재 6%대인 40살 이하 기초의원 비율을 20%까지 높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들이 만난 농촌 등 지역의 ‘젊치인’들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를 낸다. “70년 이상 농촌에서 살아야 하는 2030세대의 입장에서 지역 정책을 만들겠다”거나 “지역의 아이들을 위한 일자리가 필요하다” 등이다.
냉소는 쉽지만 그만큼 무책임하다. 목소리 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변화는 있을 것이다. 개표방송을 보던 밤,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이명박근혜 시대도 살았잖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농담을 주고받으며 생각했다. 우리의 미래는 낙관, 그게 어렵다면 유머에 가까울 때 그나마 조금 더 밝을 거라고.
천다민 뉴닉 에디터
▶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밀레니얼 세대라고 한다. 정보기술(IT)에 능하고 개성이 강하며 부당한 일에 적극 목소리를 내고 앞날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 ‘나 때는 말이야’라고 툭하면 가르치려는 ‘라테 세대’는 모르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