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리더인 웨 노에 흐닌 쏘씨와 헤이 만 흐닌씨가 2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해외주민운동연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에 앞서 미얀마 민주화 시위의 상징인 세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지난달 1일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발생 이후 저항하는 시민들의 피해가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미얀마 ‘국군의 날’인 27일 하루에만 최소 11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어린 소녀와 소년들까지 목숨을 잃어 국제사회의 공분을 낳았다. 하지만 유엔을 비롯해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대한 비난과 규탄만 이어갈 뿐 군부의 학살을 제어할 만한 실질적인 행동에는 나서지 않아 미얀마인들을 고립무원으로 밀어넣고 있다.
쿠데타 발발 직후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를 조직해 이끌고 있는 웨 노에 흐닌 쏘(35)씨와 헤이 만 흐닌(31)씨는 각각 2009년과 2018년 한국 정부 초청 유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온 미얀마 청년들이다. 고향 땅의 비극과 군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미얀마 동료들뿐 아니라 한국의 시민·종교단체들과 손잡고 기자회견, 추모집회, 모금운동 등을 벌이고 있다. 최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 하루 전인 2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해외주민운동연대 사무실에서 이들을 만났다. 절박한 목소리로 미얀마 국민들의 고통과 분노를 전하는 이들의 눈시울이 자주 붉어졌다.
―미얀마 ‘국군의 날’ 군부의 무차별 총격으로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현재 전해 듣고 있는 현지 상황과 나라 밖에서 지켜보는 심경은 어떤가?(29일 추가로 한 질문)
웨 노에 “두달간의 저항운동 중 최악의 날이었다. 실제 사망자는 언론 보도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망자 중에는 어린아이까지 포함돼 있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하는 슬픔에 몸서리쳐진다. 지금 미얀마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다. 투쟁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동물의 권리를 얘기하는 21세기에 군경의 학살에 죽어가야만 하는 우리 국민은 대체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는 절망감뿐이다.”
―군부에서 인터넷 연결을 끊어 현지의 통신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이나 지인들과 어떻게 연락하고 지내나?
웨 노에 “쿠데타 초기부터 군부가 모바일 인터넷 연결을 중단시키더니 최근에는 대도시의 와이파이 접속까지 끊기 시작했다. 농촌인 내 고향은 인터넷 연결이 전혀 안 되고 국영방송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공무원을 하는 오빠와 언니, 형부가 불복종운동을 하다가 신고를 당해 집을 떠나 피신 중이다. 이 지역에 교사가 60명가량 있는데 50명 넘게 불복종운동에 나서고 있다.”
헤이 만 “지인들과는 간헐적으로 인터넷 접속이 될 때 페이스북이나 페이스톡으로 안부를 확인한다. 내 고향도 시골인데 아직은 불복종운동이 확산되지 않은 탓에 군대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지만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쿠데타 발생 직후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를 만들었다. 어떤 활동을 하고 있으며 다른 미얀마 운동 단체들과는 어떻게 협력하고 있나?
웨 노에 “유학생 중심으로 10명이 모여 2월3일 결성해 7일부터 광화문과 미얀마대사관 앞 등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우리는 시민 입장에서 미얀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한다. 27일 열리는 추모집회처럼 규모가 큰 행사는 미얀마민주주의네트워크 등 다른 인권단체들과 연대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소규모 활동이 추진력도 빠르고 효과적이라 생각해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헤이 만 “한국 시민들의 응원 메시지를 번역해서 미얀마 커뮤니티에 올리거나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나 소식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단체·종교단체, 최근에는 대학 사회, 역사교사모임 등 미얀마 상황을 알리고 해결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도록 많은 이들과 함께하려고 한다.”
―지난 12일 조계종과 청년연대 회원들이 함께한 오체투지가 미얀마 현지에서 큰 반향을 얻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하게 됐고 직접 참여했던 헤이 만씨는 소감이 어땠는지?
헤이 만 “미얀마는 불교국가이지만 이번에 불교지도자들이 시민들의 시위를 외면하면서 실망감이 컸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조계종이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고 오체투지도 제안을 했다. 직접 참여하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미얀마 시민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체투지가 일종의 고행 행위 아닌가. 외국인들이 미얀마인의 고통을 함께한다는 게 큰 위로가 된 거 같다.”
―이번 민주화 시위는 의사, 교사 등 전문가 집단이 시작한 시민불복종운동을 20대인 이른바 제트(Z)세대가 주도하면서 가장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웨 노에 “1962년 네 윈 총사령관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뒤 미얀마는 폐쇄국가, 빈곤국가로 전락했다. 이후 군부가 폭압적으로 지배하면서도 국제사회에 나서기 위해 2008년 헌법을 개정하고 2010년 군복을 벗은 테인 세인 대통령을 내세웠다. 테인 세인 대통령은 군부 출신이지만 시민들의 반대 뜻을 받아들여 중국 기업과 손잡고 추진하던 대규모 댐 건설을 중지시켰다. 그 일을 계기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이 싹텄고, 2015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으로 정권 교체가 되면서 불완전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쌓이기 시작했다. 제트세대는 이처럼 10년 가까이 민주주의의 경험을 몸으로 익혔다. 이전 세대보다는 경제적 풍요도 누렸다. 그러다 보니 정부의 폭력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거다. 이번에 젊은 세대의 저항에 군부뿐 아니라 엔엘디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케이(K)팝에 환호하고, 연예인 쫓아다니고, 게임이나 하는 줄 알았던 젊은 세대가 목숨 걸고 싸울 줄 기성세대는 몰랐던 거다.”
웨 노에 흐닌 쏘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리더가 2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해외주민운동연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반면 1988년 ‘8888’운동을 주도했던 이른바 ‘88세대’는 해외로 망명을 가거나 당시의 패배에 대한 상처로 젊은 세대에 대한 지원이나 연대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웨 노에 “지금 제일 아쉽고 답답한 게 재야 정치인, 시민사회 지도자, 88세대, 불교 지도층이 시위 현장에 없다는 것이다. 어른 세대의 지원이 없다는 게 시위 과정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고. 지난 5년간 집권한 엔엘디도 다음 세대를 키우지 않았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달이 넘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뒤에야 불교계나 노동단체 등이 성명을 냈다는 게 말이 되나.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2007년 사프란 항쟁을 주도했던 불교 지도자들의 목소리가 미미한 이유는 무엇인가?
웨 노에 “나는 당시에도 양곤 지역의 시위에 참여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도 젊은 스님들이 주축이었지 이른바 ‘노스님’이라고 하는 불교 핵심 지도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군부는 집권을 강화하는 데 불교를 이용하고 불교계 역시 로힝야 사태 등에서 다른 소수민족을 침략자로 몰아세우는 대중 선동으로 군부를 도우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왔을 뿐이다.”
헤이 만 “이번 사태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의 가면이 벗겨지게 됐다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이 불교를 세운다는 미명으로 버마족을 세뇌했던 소수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다.”
―이번 민주화 시위를 이끌어가는 지도부나 구심점이 있나?
웨 노에 “사실상 없다. 에스엔에스상에서 누군가 어디서 언제 모이자고 하면 게릴라식으로 각자 알아서 참여하는 식이다. 젊은층 중심인 미얀마 커뮤니티에서는 ‘우리가 지도자다’라는 말들이 자주 나온다. 기성세대의 외면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챙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헤이 만 흐닌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리더가 2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해외주민운동연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쿠데타 직후 엔엘디 주도로 임시정부 역할을 하는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가 구성됐다. 현지 시위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헤이 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친구나 지인들은 긍정적으로 본다. 연방의회대표위의 발표 내용에도 귀기울인다. 연방군을 세우기 위해 소수민족과 논의 중이라는 소식에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웨 노에 “냉정하게 따질 필요도 있다. 현재 전체 17명인 연방의회대표위에 참여하는 소수민족은 3개에 불과하다. 임시정부로서 국내외적 정당성을 가지고 군부라는 하나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수민족, 특히 규모가 큰 7개 민족 대표가 임시정부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비상사태의 임시정부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과감한 움직임이 필요한데 여전히 아쉬운 측면이 많다. 기존의 엔엘디 지도부 눈치를 보느라 지지부진한 게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도 있다.”
―군부와의 싸움 그 이후 미얀마 사회의 나아갈 바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웨 노에 “너무나 참혹한 도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그 이후를 상상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면 우선은 군부의 의석수를 25% 보장하는 2008 헌법을 폐지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이 법이 존재하는 한 군부세력의 야욕과 도발은 결코 끝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사문화된 ‘팡롱협정’(버마족 지도자 아웅산이 연방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1947년 미얀마 소수민족들과 맺은 협정)을 실질적으로 작동시켜 연방제에 기반한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갈수록 희생자가 급증하고, 특히 청년층과 미성년자들의 피해가 속출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늘고 있다. 게다가 무장투쟁에 대한 내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피해를 줄일 방법도 고민해야 하는 시점 아닐까?
웨 노에 “앞으로 벌어질 시나리오에 대한 예측이 여러 갈래로 나오고 있는데 내전 같은 장기전으로 가면 정말 큰일이다. 그런데 유엔의 보호책임(R2P)에 대한 요구도 응답받고 있지 못하다. 청년층에서는 연방의회대표위가 추진하는 연합군에 합류해 무장투쟁을 하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며 지하운동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위대의 지도부도 없고 연방의회대표위는 아직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어 애매하고 힘든 상황이다.”
―국제사회는 아직 규탄 성명을 내는 등의 선언적인 것 말고는 구체적인 지원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국과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 부분적 경제 제재가 나오고 있지만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어떤 식의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고 보나?
웨 노에 “지금으로서는 유엔군 투입 등 국제사회의 물리적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경제 제재는 안 하는 것보다야 하는 게 낫겠지만, 군부는 이미 각종 국가 사업의 이익을 독점하면서 미얀마 내부에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해놨기 때문에 해외 자금 동결 수준의 제재에 신경이나 쓸까 싶은 생각도 든다.”
헤이 만 “군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국제사회의 공적 개발 원조나 사업투자를 끊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한국인이 미얀마인들의 저항에 연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한국 사회나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나?
웨 노에 “아시아 국가 중 한국인들이 5·18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며 가장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고 미얀마인들도 그 마음을 느끼고 있다. 한국 정부도 성명 발표와 경제 제재 등을 단행했지만 군부와 손잡고 있는 대기업의 미얀마 사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더 적극적인 제재에 나섰으면 한다. 지금 미얀마 군부는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는 범죄집단이다. 가스전 사업을 하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이나 양곤에 대형 복합몰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이노그룹 등이 미얀마 정부가 정상화될 때까지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 미얀마에는 소규모 봉제 공장 등 한국 중소기업도 많이 진출해 있다. 이런 기업들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면서 군부 재벌과 직접 거래하는 대기업들은 제재했으면 한다.”
―힘든 싸움이지만 새로운 세대에게 이번 저항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
웨 노에 “만약 우리가 싸움에 지더라도 이번 시위는 미얀마의 역사에 정신적인 변곡점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젊은 세대는 이번 쿠데타를 겪으며 자유를 빼앗기는 게 어떤 건지 몸으로 느꼈다. 군부가 총칼로 몸을 지배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신까지 억압하지는 못할 거다. 또한 젊은 세대는 군부뿐 아니라 수치 여사와 엔엘디 정권에 대해서도 윗세대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개인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맹목성이 없다. 다시 엔엘디가 돌아온다고 해도 맹목적인 지지 대신 옳고 그름을 개인이 판단하는 정치문화가 형성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결코 이전의 미얀마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김은형 논설위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