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동주여고 학생들과 교사가 이 골목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에 참여해 시집과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지난 4일, 책방골목의 ‘우리글방’에서 이 학교 2학년 김현지(왼쪽부터)·양혜진·양지혜양, 김성일 교사, 1학년 임지나·김연경양이 시집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을 들어 보이고 있다.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부산 중구 보수동에 자리잡은 책방골목은 한국에 딱 하나 남은 헌책방 골목이다. 중고생 참고서나 사전, 어린이 도서를 포함해 소설, 시집에 사회과학, 예술, 건축 등 전문 분야까지 수백만권의 책이 이 오랜 공간에 살아 숨쉰다. 하지만 골목은 지난해에만 서점 9곳이 폐업하는 등 위기에 빠져 있다.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생색내기에 그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다며 동주여고 학생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시집과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길게는 일곱달 동안 책방골목과 도시재생에 몰두했다.
“수북이 쌓인 먼지 틈으로/ 외로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책/ 여기저기 여행하며/ 누군가의 라면받침이,/ 누군가의 아끼는 책이 되었다가,/ 돌고 돌아 이제는 외로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책// 어쩌면 헌책이 아니라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한정판이 아닐까”
가치를 알아보기 힘든 헌책을, 갖고 싶은 ‘한정판’으로 해석한 이 글은 부산 동주여고 1학년 임지나양이 쓴 ‘그 책’이라는 시다. 작품이 담긴 시집은 지난해 말 나온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이하 <와보시집>). 임양을 비롯한 동주여고 학생들과 부산 시민들이 한국에 딱 하나 남은 헌책방 골목인 보수동 책방골목을 주제로 쓴 시 200여편을 묶었다. 책 편집 작업은 이 학교 도시재생 동아리 ‘예그리나’ 학생들과 <읽어보시집>, <평범히 살고 싶어 열심히 살고 있다> 등을 낸 최대호 시인이 맡았다. 동주여고 학생들의 책방골목 관련 작업은 시집뿐만이 아니다. <영원히 간직하고픈… 너의 이름은>이라는 6분46초짜리 단편영화도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이 뭐길래, 학생들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스타 작가까지 나서서 시집을 엮고 영화를 만든 걸까?
‘보수동 책방골목’은 이곳이 생겨난 한국전쟁 이후 70년 동안 부산시민들과 함께했다. 평소엔 구하기 힘들거나 저렴하게 사고 싶은 책을 찾는 이들로 붐볐고, 새학기엔 참고서와 전공서적을 사려는 학생들까지 몰려 더 북적댔다. 손때 묻은 책 속에서 희귀본이나 고문서를 발굴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 시대, 헌책은 더더욱 외면당하고 한때 100곳이 넘었다던 이 골목 책방도 이제는 31곳만 남았다. 줄어드는 매출과 오르는 임대료, 책방 주인들의 고령화 등이 원인이다. 이런 가운데 책방골목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동주여고 학생들과 김성일 교사가 책방골목을 주제로 한 시 200여편을 엮은 시집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과 6분46초짜리 단편영화 <영원히 간직하고픈… 너의 이름은>을 만들었다. 도시재생은 그 지역만의 특별한 문화유산을 살리는 것이며, 책방골목이야말로 보수동만의 고유한 문화유산이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40년 동안 이 골목을 지켜온 제일서점 강병곤씨가 지난 4일 오후 신문을 읽으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부산/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사진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시집에 단편영화까지…동주여고 학생들의 ‘책방골목 사랑’
시작은 지난해 5월, 부산 중구청의 ‘보수동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이었다. 책방골목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동주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김성일(34) 교사가 우연히 이 사업을 알게 됐다. 평소 도시재생에 관심이 많았고, 나고 자란 곳이 보수동 바로 옆 동네인 동대신동이라 중·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찾던 곳이 책방골목이었다. 책방골목이 위기라는 얘기를 들어오던 터라, 대부분 보수동 인근에 사는 동주여고 학생들과 함께 사업을 해보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인 임지나양과 이런 얘기를 나눴고, 교내 방송으로 도시재생에 관심 있는 학생 8명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게 예그리나다. 공모사업에도 무리 없이 선정됐다.
“처음엔 시집도 내고, 유튜브에 서점별로 소개하는 동영상도 여러 편 만들려고 했어요. 시는 학교 학생들한테 받고, 부산시교육청에서 유튜브와 에스엔에스로 홍보해줘 시민들도 많이 보내주신 덕분에 책을 만드는 데 크게 무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동영상은 코로나19 때문에 진행이 잘 안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영상 동호회 회원한테 ‘단편영화를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받았어요.” 지난 4일 오후,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보수동 ‘우리글방’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난 김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김 교사가 영상 동호회 등에 ‘보수동 책방골목을 살리는 단편영화를 함께 만들 분을 구한다’고 알리면서 10여 팀이 관심을 보였다. 이 가운데 단편영화, 웹드라마를 제작해 유튜브에 올리는 ‘필무비’의 차경훈 감독과 뜻이 맞았다. 책방골목을 드나들던 여고생이 한 헌책방 아르바이트생을 좋아하게 되는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김 교사의 손에서 시나리오로 탄생했다. 촬영과 편집은 차 감독이 도맡아 감성적이고 간질간질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아르바이트생은 단편영화의 취지를 들은 아마추어 배우 이동하씨가 연기했고, 주인공과 그 친구들로는 이 학교 2학년 김현지·양지혜·양혜진·박주현양이 출연했다.
감독 섭외부터 시나리오 작성, 촬영, 후반작업까지 꼬박 한달 보름. 지난달 7일, 마침내 부산시 공식 유튜브 채널 ‘붓싼뉴스’에 공개된 영화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저도 학생 때 보고 싶은 책은 많고 돈은 없어서 책방을 많이 찾아다녔던 기억이 나요. 이런 추억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릴 적 헌책 사러 버스 타고 1시간 넘게 찾아 헤맸던 보수동 책방골목이 조금씩 없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서운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부산시교육청 페이스북, 필무비 유튜브 채널 등에도 잇따라 올라가면서 영화는 잔잔한 화제가 됐다.
영화도, 시집도, 학생들의 참여는 자발적이었다. 수행평가 때문에 한 거냐는 질문에 학생들이 일제히 “예? 쌤! 이거 수행평가에 들어가는 거예요?”라고 되묻는 통에, 그런 질문을 한 게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 동네 토박이라 어릴 때부터 여기서 많이 놀았어요. 스무살, 서른살 돼도 책방골목은 계속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질 수도 있다고 하니까 슬펐어요. 선생님이 단편영화를 기획 중이라고 하시길래 무조건 불러달라고 했죠. 꿈이 연예인인데, 어렸을 때부터 놀던 책방골목에서 예쁜 나이에 예쁘게 영화를 찍어서 추억을 남기고 싶었어요.”(양혜진) “선생님들도 여기 책 많다고 추천해주시고, 만화책 사러도 자주 왔어요. ‘이렇게 큰 데가 어떻게 없어져?’ 안 믿기지만, 문 닫은 가게들 보면 추억도 같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 영화가 책방골목 도시재생을 잘해서 후손한테 물려줄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나중에 가수가 돼 여기 와서 뮤직비디오든 드라마든 촬영도 하고 싶어요.”(양지혜) 지혜양의 일란성 쌍둥이 언니인 혜진양이 던진 “(만화책을 하도 많이 사서) 책방 창문 하나는 네가 해줬을 것”이라는 농담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애초 김 교사와 학생들은 <와보시집> 출간을 기념해 지난 연말에 전시회를 열 계획이었다. 책방골목의 한 갤러리에서 흔쾌히 전시장을 무료로 대여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진자 폭증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전시회는 연기됐다. 시집에 실린 시는 모두 손글씨고, 군데군데 삽화도 담겨 있다. 이는 물론 표지까지 모두 동주여고 학생들 솜씨다. 특히 사람들이 보내준 시를 손글씨로 옮기는 일은, 예그리나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정성을 기울였다. 이 가운데 시 100편가량을 필사한 1학년 김연경양은 “보수동 책방골목을 위해 시를 쓰는 일이라고 하면,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참가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책방골목 상황이 이렇다는 걸 알려주니 2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인 거예요”라며 “큰 성과를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랑 얘기하면서 이곳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나눠본 게 좋은 경험이었어요”라고 했다. 김양 역시 보수동에 살고 있어, “초등학교 때부터 현장체험학습은 무조건 책방골목이었는데, 점점 상황이 어려워진다니 아쉽다”고 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이 어렵다? 사라질지도 모른다? 드라마나 에스엔에스에서 책방골목을 접하고 ‘핫 플레이스’라고만 여겼다면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방골목의 위기는 현실이다. 지난해에만 점포 9곳이 문을 닫아, 현재 남은 가게는 ‘보수동 책방골목 번영회’ 집계로 31곳뿐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전쟁으로 이북에서 피난 온 손정린씨 부부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책과 잡지 등을 노점에서 팔면서 시작됐다. 이런 역사가 적힌 안내판과 조형물.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서울 청계천, 인천 배다리 등에도 헌책방 골목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거나 규모가 매우 작아 국내에서 ‘책방골목’이라 부를 만한 곳은 보수동이 유일하다. 이곳의 출발은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 온 손정린씨 부부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 만화 등을 이 골목에서 팔면서다. 길 건너 어깨를 붙이고 있는 깡통시장, 국제시장과 마찬가지로 책방골목도 전쟁과 미군부대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생성된 것이다. 보수동 인근에 피난민이 많이 정착했고 학교도 생긴 덕에, 남의 건물 앞에서 시작한 노점은 활기를 띠었다. 모두가 가난하고 물자가 귀했기에, 헌책 수요는 많았다. 헌책을 파는 노점, 가건물도 점차 늘어 1960~70년대에는 골목에 점포가 70곳을 넘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고서, 소설, 만화, 교재와 참고서, 전공서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하려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책을 읽는 사람은 줄었다. 대형서점은 온라인으로 헌책을 함께 팔기 시작한 데 이어 부산 곳곳에 오프라인 매장도 냈다. 책방골목이 여러 방송에 나와 유명세를 타면서 관광객은 늘었지만, 책 판매로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골목의 책방들은 대체로 건물에 세를 들어 있다. 매출이 줄어드니 설령 임대료가 오르지 않아도 감당하긴 쉽지 않았다. 온라인 판매를 해보자는 시도도 있었으나, 책방 주인 대부분이 60~70대를 훌쩍 넘는지라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김광수 보수동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사무국장은 “책방골목에 계신 분들은 최소 20~30년씩 계셔서 대부분 노령화됐다. 그런데 헌책방이 일종의 사양산업이 돼 돈이 안 되니까 자식들한테 물려줄 수도 없고, 임대료가 힘에 부치면 그냥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헌책방이 미용실로, 닭강정집으로, 사진관으로 변해갔다. <와보시집>에 실린 ‘두 글자’(최서진)엔 책방골목의 이런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책 냄새가 물씬/ 사람들이 부글/ 사진은 찰칵/ 책방 주인들은 한숨/ 책방골목은 임대”
지난여름, 책방골목 들머리를 지키던 한 건물의 책방 8곳이 일제히 문을 닫은 것은 이곳의 ‘불안한 미래’를 가늠하게 해준다. 서점들이 세든 건물을 상속받은 자녀들이 건설업체에 이 땅을 팔았고, 업체가 여기에 지하 2층, 지상 18층 규모의 주상복합 건물을 짓기로 하면서 책방 주인들에게 퇴거 통보를 한 것이다. 건설업체와 보수동 책방골목 번영회, 중구청 등이 협의 끝에 똑같은 임대 조건으로 새 건물에 입주하는 방법도 제시했지만 책방 주인들은 폐업을 선택했다.
주변 상인들은 되레 “그쪽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했다. 허양군 보수동 책방골목 번영회장은 “그쪽에서 책방 하시던 분들도 연세가 많으신데다, 지금은 장사가 잘 안돼 가게 임대를 내놔도 잘 안 나간다. 그런데 그 건물은 협의를 통해 권리금이라도 받을 수 있게 해드렸다”고 말했다. 고령의 책방 주인들이 ‘오늘 닫느냐 내일 닫느냐’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권리금이라도 받고 나간 게 다행이라는 일종의 체념인 셈이다. 그는 “자기 건물에서 장사하는 집이 별로 없어서, 이런 일은 또 반복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손님이 끊이지 않았던 보수동 책방골목은 2000년대 초중반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상복합 재건축으로 지난해 서점 8곳이 일제히 폐업한 책방골목 들머리 건물이 철거된 모습.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우리글방의 노기룬(29) 사장은 “한 10년 전부터 미래가 없을 거란 말이 돌았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장사하신 분들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시는 것 같다. 사람은 많이 오지만 사진 찍으러 오는 거고, 책은 무겁고 인터넷으로도 주문할 수 있으니 구입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는 1983년 아버지가 연 이 책방을 3년 전부터 어머니와 함께 하고 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문을 연 책방이라 노 사장은 이곳에 추억이 많다. 주변 책방 주인도 대부분 어릴 때부터 알던 분이다. 그는 “이젠 책방골목이 전국에서 여기만 남았다. 이런 골목은 한번 없어지면 다시는 생겨나기 어려운데… 우리도 책만 팔면 운영이 어려워서 10년 전부터 카페를 함께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책방골목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대우서점이 보수동을 떠난 것도 위기의 또 다른 징후다. 김종훈(69) 사장은 1978년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해 예술서적과 대학 전공서적, 원서 등을 중심으로 헌책을 팔며 대우서점 간판으로 점포 4개를 운영했다. 절판본,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책 등을 많이 갖추고 있는데다 그가 워낙 책을 좋아하다 보니 학생도 대학교수도 그에게 와서 책을 물어볼 정도로 ‘책 도사’로 통하며 책방골목을 지켰다. 2013년부터는 “책 읽는 사람은 그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대우독서회’도 만들었다. 오랜 단골들이 한달에 한차례씩 모여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는 모임으로, 책방이 지역문화를 가꾸는 데 힘을 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헌책과 책읽기에 자부심이 높은 그였지만 “책 팔아서 임대료를 못 맞추는” 상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2018년 초, 점포 한곳의 건물주가 10년 동안 세를 안 올렸으니 이번엔 좀 올리자며 두배를 요구했다. 감당하기 힘든 금액인지라, 고민 끝에 그 점포를 정리했다.
이듬해 2월엔 다른 점포를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지난 6일, 전남 구례군에서 만난 김 사장은 “건물주가, 내가 나가면 재건축을 하겠다길래 차라리 나한테 팔라고 했다. 그런데 가격이 맞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건물주 쪽은 “재계약을 몇달 앞두고 김 사장님이 먼저 그만두겠다고 했다. 목조건물인데 워낙 오래돼, 건물을 지탱하고 있던 책이 빠지면 붕괴 위험도 있어 재건축을 안 할 수가 없었다”며 “매매도 생각했지만 제시하신 가격이 너무 낮았다”고 설명했다.
양쪽의 이야기는 조금 엇갈리지만, 분명한 건 보수동 골목에서 대우서점을 계속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잇따라 일을 겪다 보니 월세를 내는 게 질리더라”는 김 사장은 결국 지난해 8월 다른 점포까지 모두 정리하고 구례로 터를 옮겼다. 이미 책방을 줄이고 이사하는 과정에서 폐기된 책만 수만권이다. 남은 20만여권은 타던 차를 팔고 1톤짜리 트럭을 구해 차곡차곡 옮겼다. 그곳이 구례구역 맞은편, 섬진강과 맞닿은 3층짜리 옛 모텔을 어렵사리 매입해 리모델링한 ‘섬진강 책사랑방’이다. “책은 안 사도 커피는 마시고 가지 않겠냐”는 생각에 헌책방과 북카페를 겸하기로 했다. 개업을 앞두고 이 지역을 강타한 홍수로 1층에 뒀던 1만여권이 젖어 버려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평생을 바쳐 사랑한 헌책과 함께하는 게 그에겐 가장 행복한 일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42년 동안 대우서점을 운영하던 김종훈 사장은 지난해 여름 전남 구례군으로 터를 옮겨 카페 겸 헌책방 ‘섬진강 책사랑방’을 열었다. 김 사장이 지난 6일 이곳에서 책을 찾고 있다. 구례/조혜정 기자
부산시는 보수동 책방골목을 2019년 ‘부산 미래유산’ 20개 가운데 하나로 지정했다. 중구청은 책방골목에서 매년 문화축제를 열고, ‘책방골목 문화관’을 만들고, 이 골목 활성화 지원 사업을 맡을 티에프(TF)를 꾸리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 미래유산은 지정이 되더라도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다. 중구청의 문화관은 책방골목과 무관한 형식적인 운영에 그친다는 비판을 받다 지난해엔 그나마 위탁운영업체도 찾지 못했다. 책방골목 활성화 티에프는 전임 구청장이 당선무효형으로 물러난 사이 만들어졌다가 보궐선거로 새 구청장이 취임하면서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책방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책방을 헐고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선대도, 이 골목의 이름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업종의 가게가 들어와도 사유재산이라 별다르게 제한할 방법이 없다는 게 지방정부의 해명이다.
허양군 번영회장은 “부산 미래유산이라고 해도 도와주는 건 하나도 없다. 공공기관에서 홍보 영상이나 촬영하러 오고, 기관장이나 정치인들이 치적용·선거용으로 쓸 뿐”이라며 “책방골목을 살리겠다며 축제를 한다, 조형물을 만든다 해도 책을 팔아서 임대료를 감당할 수가 없으면 점주들이 연로한 상황에서 책방골목은 자동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관이 나서서 책방 운영의 통합 관리를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고령의 책방 주인들이 하기 힘든 보유 서적 데이터베이스화와 재고 관리 시스템 구축 등을 지원해 책방골목 전체가 하나로 굴러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책방마다 주인의 기준에 따라 들쑥날쑥 배치된 책도 시대별이든 장르별이든 일관되고 구체적인 체계에 따라 분류하는 일도 지원이 필요한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책방골목을 살리려면 ‘문화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태원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도시재생이 성공하려면, 다시 가고 싶은 그곳만의 차별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전국에 벽화마을이 많지만, 다 비슷비슷하니 한번 가면 그만 아닌가. 책방골목도 마찬가지다. 책을 상업적으로만 보면 대형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책방골목엔 절판된 책,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 있다. 이걸 문화적으로 풀어서 옛날엔 책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팔았나, 어느 시대엔 어떤 책들이 많이 나왔나, 그래서 책방골목에 있는 헌책과 이 골목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책방골목의 정체성을 살려야 부산이라는 도시의 대표 브랜드가 될 수 있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상인들도 보호할 수 있다. 노르웨이에선 산악지대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세금 등 각종 지원을 해준다. 관광객들이 그 경치를 보러 오는데, 농부가 소출이 적다고 농사를 짓지 않고 떠나면 관광자산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관료들도 ‘문화를 판매한다’는 생각으로 책방골목을 지원해야 한다.”
김종훈 사장의 책방골목 도시재생 아이디어도 이런 맥락이다. 중구청이나 부산시에서 책방을 임대해 정년퇴임한 교사나 교수, 책에 관심이 많은 은퇴자한테 일주일에 이틀 정도씩 운영을 맡기고 판매수입을 가져가게 하자는 것이다. 문화관광해설사처럼 은퇴자는 소일거리와 용돈을 챙기고, 책방골목은 사람이 북적대도록 만들자는 취지다. 김 사장은 청년들에게도 창업 지원하듯 책방 운영을 지원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는 “몇년 전에 책방골목 번영회 회장을 할 때부터 해온 얘기지만, 나는 책방이 더 늘어나 100여개는 돼야 한다고 본다. 구청이나 시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규모부터 세계적인 책방골목을 만들어놓으면, 아무리 전자책과 인터넷 판매가 잘된다 해도 사람들이 골목을 계속해서 찾지 않겠냐”고 했다.
지난해 8월 전남 구례군으로 이사한 대우서점 자리에 임차인을 찾는 전단지가 붙어 있다.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책방골목을 그저 장사하는 곳, 막연히 향수와 추억이 있는 곳, 생색내기 행사를 치르는 곳이 아니라 역사, 시민의 삶과 기억, 책의 유통, 보수동 주민과의 소통이 어우러지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살려나가려면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김광수 사무국장은 “책방골목은 70년 된 시민의 공공자산이자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조례든 특별법이든 예산과 사유재산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시민적 기구가 필요하다”며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업종이나 건물은 못 들어오게 하는 등 재산권 같은 사적 권리를 어느 정도 제한하고, 장사하시는 분들에겐 국가나 지방정부가 수입 보전 등 일정한 혜택을 주면서 안정적으로 책방을 운영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책방골목 상인들도 그런 지원을 받으면 수익에서 어느 정도를 떼어 동네 환경 개선에 써 주민들과 혜택을 나눈다든지 하는 식으로 ‘보수동의 책방골목’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주민들과 소통하고 상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지적에 곽옥란 부산시 문화유산과장은 “부산 미래유산은 시민들이 가진 특별한 기억과 유산을 미래세대가 기억하고 보존하면 좋겠다는 취지로 2019년에 부산시가 조례를 발의해 지정된 것”이라며 “올해가 3년차로, 지정된 유산이 적합한가 등 심화연구를 같이 해야 하는데다 예산도 부족하다 보니 행정적·재정적 지원은 별로 없었다. 내년부터는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수철 중구청 문화관광과장은 “올해부터는 책방골목 문화관을 구청이 직영하기 때문에 상인들과 연계해 골목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업을 하려고 고민 중이다. 책방골목 활성화 티에프는 없어졌지만, 하던 업무는 문화관광과에서 모두 전담하고 있고 배정됐던 예산도 올해 집행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6월 책방골목이 전통시장 육성법의 ‘전통시장’으로 등록돼 여러 지원이 가능해졌으며, 올 상반기에 책방골목의 서적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맡을 전담 직원도 채용한다고 덧붙였다.
책방골목을 주제로 학생과 시민 200여명이 쓴 시를 엮어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을 만든 동주여고 1학년 김연경·임지나양.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임지나양이 우리글방 서가를 가리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꽂혀 있는 책만 봐도 한자 섞여 있는 책들, 진짜 나온 지 오래된 책들, 할아버지·할머니가 읽던 책들이에요. 절판된 책도 많고 종류도 안 가리고 다양하고요. 이런 건 지금 온라인 서점이나 새책만 파는 곳에선 못 찾잖아요. 시에도 썼는데, 이건 헌책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다시 나온 한정판이에요. 사용할 가치가 충분한 것,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 모여 있는 한국의 유일한 헌책방골목, 여기 잘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지 않나요?”
김연경양이 말을 받았다. “저도 아직 잘은 모르지만, 도시재생이라는 건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지역만의 특성을 발전시키고 보존하는 거라고 들었어요. 이번에 시집을 만들면서 책방골목이 진짜로 다른 데선 찾아볼 수 없는 보수동만의 고유한 특징이자 문화유산이라고 절실히 느꼈어요.” 자신이 사는 동네 골목의 역사를 공부하고, 현재를 보듬어 시를 쓰고, 이곳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학생들은 책방골목을 지켜야 하는 이유, 나아가 도시재생의 방향을 체득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어른보다 나았다.
보수동 책방골목를 소재로 한 단편영화 <영원히 간직하고픈… 너의 이름은>에 출연한 동주여고 2학년 양지혜(왼쪽부터)·김현지·양혜진양.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보람도 느꼈다. “영화에 나온 장소가 어디냐며 가보고 싶다는 친구들이 있어서 뿌듯했어요. 뭔가 보수동에 도움이 되는 것 같잖아요. 서울에 아는 친구도 부산에 오면 저한테 가이드를 해달라고 하는데, 꼭 책방골목을 알려주고 싶어요.”(양혜진) “단편영화를 보고 나서 부모님이 ‘보수동이 없어진다고? 오랜만에 한번 가볼까?’ 하시더라고요. 그분들은 저보다 보수동을 자주 왔던 세대니까요. 책방골목을 통해 그 세대가 남긴 흔적을 우리가 느껴보면 좋을 것 같은데, 거기에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김현지)
보수동 책방골목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을 신청해 시집과 단편영화 만들기를 주도한 동주여고 김성일 교사.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책방골목 기획’을 이끈 김성일 교사는 “학생들이 즐겁게 도시재생에 참여하고 사람들 관심을 불러일으킨 게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여기가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과거도 지키면서 지금 일어나는 변화도 담아내야죠. 그러려면 책방골목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지침이 꼭 필요합니다. 헌책 수요가 적다고 전부 카페로 바꿔 헌책방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사람들한테 여기 와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책방골목에 사람들이 돌아올 방법이 뭘까 생각해 보니, 그건 아이들이 오는 거더라고요. 시집을 만들고, 단편영화를 찍게 된 것도 그런 생각 때문이었어요. 아이들이 와서 헌책을 뒤적이고 산책도 할 수 있는 ‘젊은 헌책방골목’을 상상해봅니다.”
<와보시집>에 실린 ‘헌책’(이연수)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와인은/ 숙성된 걸 고르고// 미술품은/ 예전 작품을 선호하고// 엘피(LP)판은/ 갈수록 희소해지는데// 왜 책은 새 책만 찾아?” 추억과 역사와 출판문화의 흐름이 담긴 헌책, 그 헌책을 품은 보수동 책방골목을 ‘재생’시키려면 풀어야 할 문제다.
부산 구례/조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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