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50년, 여기 다시 전태일들]
3부 2020 전태일, 무엇이 필요한가
②노동 밖 대안 ‘기본소득’
3부 2020 전태일, 무엇이 필요한가
②노동 밖 대안 ‘기본소득’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 기본소득 이 때문일까. 정치권은 요즘 여야를 가리지 않고 기본소득을 언급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기업이윤 초집중, 구조적 일자리 소멸, 소비절벽으로 상징되는 코로나 이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정책이다.” 유력한 대선 주자로 꼽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도내 청년 기본소득을 시행하는 등 정치 공간에서 기본소득 제안을 지속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예산 조정으로 단기 목표 연 50만원, 조세감면 축소로 중기 목표 연 100만원, 탄소세 등 새로운 목적세를 만들어 장기 목표 연 200만~600만원 등을 전국민에게 지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부터 기본소득을 말해온 소수정당도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본소득당은 매달 60만원의 기본소득을 목표로 증세를 제안했다. 녹색당, 미래당, 여성의당, 시대전환 등도 기본소득 논의에 힘을 보태고 있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도 최근 기본소득을 언급했다. 상대적 빈곤선(중위소득의 50%)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소득을 보전해주는 방안이 검토됐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했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 또한 이 방식을 ‘안심소득제’라고 부르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만 19~34살 청년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며 논의에 합류했다. 다만 국민의힘 방식을 기본소득으로 부를 수 있느냐는 논란은 존재한다. 기본소득은 ‘자산 심사나 노동에 대한 요구 없이 무조건적(무조건성)으로 모두에게(보편성) 개별적으로(개별성) 주어지는 정기적인(정기성) 현금(현금성) 이전’(기본소득네트워크)을 의미한다. 정치권의 제안들은 기본소득의 기준이 되는 이런 5가지 조건(보편성, 무조건성, 정기성, 개별성, 현금성)에서 한두가지를 빼거나 더하는 형태로 편차를 보인다. 지급 목표액도 저마다 다르다. _________
불안정 노동·기술 실업의 대안 될까 국내에서 기본소득 담론이 주목받은 데는 ‘복지의 사각지대’가 크다는 문제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현행 사회보장·복지 제도는 정규직 임금노동자 위주로 짜였다. 그러다 보니 비정규직이나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 등 ‘2020년 전태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지금 시대에 적용하기에는 빈구석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지난 8월 기준 비정규직 임금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46.1%이고, 국민연금에도 37.8%만 가입했다. 그만큼 많은 이가 사회보험 제도권 밖에 있다는 이야기다. 제도권 밖 사람들을 위한 대표적인 제도인 기초생활보장 수급제를 봐도 수급자 비율은 전체 인구의 3.6% 수준(지난해 기준)이다. 이마저도 수급을 위해서는 여러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전국민 고용보험 등 정책적으로 빈 곳을 메우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이 지난 7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등 비임금 노동자가 213만명가량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산·지급액 수준에 대한 논의를 빼고 보면, 기본소득에는 ‘사각지대’가 없다는 게 큰 장점으로 꼽힌다. 또 임금노동을 전제하지 않고 소득을 지급한다는 점도 기존 복지체계와 다른 점이다. 정원호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제로 취업노동으로만 사회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며 “대가가 없는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이 없으면 사회가 안 돌아가지 않나. 철학적으로 그런 노동도 보장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기본소득제 도입은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_________
기존 복지를 대체하진 않을까 다만 기본소득에는 대표적인 의문이 존재한다. 기본소득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다 보면 기존 복지가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다. 실제 보수 우파들이 기본소득을 말할 때 이런 논리를 편다. 대표적 보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정해진 최저생계비보다 적게 버는 국민에게 국가가 차액을 보조하는 제도(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제안했다. 기본소득과 유사한 개념인데, 이 방법을 도입하며 국가 복지제도를 대대적으로 해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의힘에서 논의하는 ‘안심소득제’ 또한 이런 개념에 기반을 둔 기본소득론이다. 국내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백가쟁명이다. 학계 일부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차원에서는 기존의 복지를 유지하며 보완하는 기능을 얘기하고 있다. 서정희 군산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기본소득을 소득의 ‘1층’에,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소득·사업소득을 ‘2층’에 쌓자는 얘기다. 1층만 할 건지 2층만 할 건지 선택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처음에는 복지와 기본소득 둘 다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더라도, 결국 두 요소가 복지 예산을 두고 경합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한수 경북대 교수(경제학)도 국회예산정책처 학술지를 통해 기본소득을 시행하면 빈곤층 중에서도 소득 하위 10% 가구는 오히려 가처분소득(가계의 수입 중 소비와 저축 등으로 쓸 수 있는 소득)이 감소할 거라고 내다봤다. 빈곤층에 선별적으로 집중된 지원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 주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기본소득론자인 백승호 가톨릭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기존 복지가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고 재반박한다. 그는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비난받을 일은 피한다. 정치 구조상 복지나 사회보험을 축소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 정치학자 폴 피어슨의 ‘칭찬 획득의 정치’와 ‘비난 회피의 정치’ 개념을 빌린 건데, 칭찬 획득의 정치란 정치인들은 더 많은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 인기 있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의미다. 비난 회피의 정치 역시 정부와 여당이 선거 패배를 우려해 대중의 복지 손실을 피하는 정치를 말한다. 복지 후퇴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_________
재원 확보 방안 논쟁은 여전히 거세 기본소득의 재원 확보 방안 또한 논쟁이 거세다. 당장 전국민에게 한달 30만원을 지급한다면 약 180조원이 든다. 이는 현재 국내 복지·고용 예산을 합친 것과 맞먹는 금액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선 비과세·감면 개혁과 예산 조정 등의 방법으로 기본소득 30만원을 지급할 재정을 마련하자(랩2050)는 제안이 있다. 국채 발행 등 정부가 기본소득을 위해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방법을 검토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전용복 경성대 교수(경제학)는 “정부가 국채 발행 등을 하며 세출을 늘리면 세입 또한 증가하게 된다. 우려했던 만큼의 재정적자는 일어나지 않는다”며 기본소득 등에 쓰일 예산 확보가 가능하다고 봤다. 기본소득론자들 대다수는 결국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다. 공동체가 함께 소유한 자산인 공유부(富)를 세금의 형태로 사회에 환원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토지와 같은 자연적 공유 자산, 지식과 같은 역사적 공유 자산, 빅데이터와 같은 인공적 공유 자산으로부터의 수익이 대표적인 공유부로 꼽힌다. 조세저항을 줄이기 위해 기본소득에만 쓸 토지세나 빅데이터세, 탄소세, 환경세 등을 목적세로 거두자는 게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재원 마련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다거나 증액된 막대한 예산을 과연 기본소득에만 쓰는 게 적절하냐는 의문도 존재한다. 남재욱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은 “공유부에 대한 논의를 얼마나 많은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특히 예산 180조원이 마련되면 왜 건강보험 등의 확충에 쓰지 않고 기본소득에 써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기본소득 재원 문제를 언급하며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하기는 어렵다”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_________
핀란드와 스위스 기본소득 실패했다고? 국내에서 기본소득을 논할 때 국외 사례를 끌어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해의 여지가 있게끔 인용되는 일도 많다. 핀란드와 스위스 사례가 대표적이다.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이 “기본소득 실험은 핀란드에서는 도입 1년 만에 폐기됐다. 스위스에서는 국민투표로 부결됐다. 이미 실패가 입증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거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언급이다. 핀란드는 2017년부터 실업자 2천명에게 매달 560유로(약 72만원)를 2년 동안 지급하는 실험을 했다. 실업자들의 노동 의욕과 복지제도 효율화 방안을 알아보기 위한 목적이었다. 핀란드는 지난 6월 공개한 결과에서 “고용 촉진 효과는 적었다”는 결론을 냈다. 일부 언론들은 이를 두고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이 실패했다”는 취지로 보도했지만 이 결과를 실패로 단정하기는 무리다. 실험 결과 최종 보고서를 보면, 기본소득을 받은 이들은 삶에 대한 만족감이 실업급여를 받은 이보다 높았다. 스위스 사례도 맥락이 다르게 국내에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2016년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기본소득 도입은 찬성 23%, 반대 77%로 부결됐다. 이후 국내에서는 “스위스 국민들이 포퓰리즘을 거부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이 투표는 매달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성인에게 2500스위스프랑(약 311만원)을 주겠다는 것에 대한 투표로 종종 오해된다. 하지만 투표는 ‘정부는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 등 3개 조항을 헌법에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는 내용이었다. ‘월 300만원대 지급’은 스위스 기본소득 시민단체가 제안한 것이다. 헌법 개정안 부결에 표를 던진 사람들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다수(63%)가 동의했다. 이 국민투표 이후 기본소득이 스위스에서 정치적 의제로 부각됐다는 점에서, 기본소득론자들은 이를 여전히 의미 있는 투표로 보고 있다. 박준용 김양진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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