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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22살 전태일도 나같은 청년, ‘기계 아니다’는 외침 유효해”

등록 2020-11-13 05:00수정 2020-11-13 06:58

연극 전태일의 ‘전태일’-투잡 뛰는 배우 고기현씨
12일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배우 고기현. 고기현 제공
12일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배우 고기현. 고기현 제공

“졸음운전이었던 것 같아요.”

연극배우 고기현(27)씨가 3년간 했던 배달일을 그만둔 계기는 ‘동료의 죽음’이었다. 함께 배우의 꿈을 키워가던 친한 형은 지난해 8월 오토바이 배달을 끝내고 가던 중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로 숨졌다. 형은 앞날이 창창한 서른셋이었다. 연극을 쉬고 돈을 벌려다 벌어진 비극이었다.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던 그에게 운명처럼 ‘전태일’이 찾아왔다. 형이 세상을 떠난 지 3개월 뒤인 그해 11월, 극단 동료가 미싱사 역으로 참여한 연극 <청년 전태일 불씨>를 보며 50년 전 전태일을 만났다. “연극을 보면서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인가? 사람이 어떻게 이 정도로 이타적일 수 있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연극이 끝난 뒤 서점으로 바로 가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집어 들었다. “책 내용이 엄청 뜨겁더라고요. 전태일은 기독교도였는데 한국에서 예수를 찾으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한 카페에서 만난 고씨는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현재 공연 중(8~12월)인 <연극 전태일>(2020 연극 전태일 추진위원회·나무닭움직임연구소 제작)에서 ‘전태일 역’을 맡고 있다. 전태일 50주기를 앞두고 그는 ‘2020년의 전태일’과 ‘1970년의 전태일’ 사이를 수시로 오가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한 극단의 배우 모집 공고에 지원하면서 연극에 발을 디딘 고씨는 첫 무대에서 ‘연극뽕’을 맞아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군 전역 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연극에 몰두했지만,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규칙한 연극 일정 탓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지금도 공연이 없는 날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 아침과 저녁에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인력사무소에 새벽 5시 반에 나가서 서울의 한 공사 현장으로 갑니다. 오후 5시까지 일하면 소개비 떼고 11만7천원 받습니다.” 100여명이 있는 일터에서 화장실은 소변기·좌변기 하나씩 있다. 휴게공간이 없어 아무 데나 앉아서 쉰다. <전태일 평전>에서 읽었던 50년 전 풍경이 그의 머릿속을 수시로 스쳐간다.

&lt;연극 전태일&gt;에서 재단사들에게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함께하자는 설득을 하고 잠이 든 전태일(배우 고기현) 모습. 나무닭움직임연구소 제공
<연극 전태일>에서 재단사들에게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함께하자는 설득을 하고 잠이 든 전태일(배우 고기현) 모습. 나무닭움직임연구소 제공

<연극 전태일>은 ‘우리 모두가 전태일’이라는 취지로 배우 10명이 각 장면에서 서로 다른 전태일을 연기한다. 고씨는 근로기준법에 눈을 떠 ‘바보회’를 결성했던 때의 전태일 역을 맡았다. “하루 14시간! 이렇게 어린 시다들이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겠습니까! 근로기준법 제42조, 근로시간은 1일에 8시간. 일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고씨가 감정을 끌어올릴 때마다 관객석에서 박수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여전히 전태일 연기가 어렵다고 했다. “배우인 제가 전태일이 돼야 하는데, 누군가 ‘전태일처럼 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러지 못하는 소시민이라고 답할 것 같아요. 그래서 괴리감이 느껴지거나 자꾸 반성을 하게 돼요.”

그래도 연극은, 삶은 계속돼야 한다. “삶 자체가 영웅적인 이미지로 각인됐잖아요. 그래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계속 생각해요. 22살에 죽은 그 역시 우리 같은 청년이잖아요. 사랑하고 싶고 재밌는 일을 하고 싶은 우리들의 모습이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50년 전 전태일의 외침에 2020년의 전태일은 답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달라는 전태일의 외침이 실현됐다면 (공사 현장에서) 다들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 쉬지 않을 것 같아요. 50년 전 그의 외침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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