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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작가가 되는 건 곧 “일의 대가를 플랫폼에 저당 잡히는 일”이라고, 6년차 작가 장누리(가명·29)가 나직이 말했다. 장누리는 6년 전 한 대학의 만화 전공 학과에 다니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꾸준히 습작 웹툰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웹툰 플랫폼 ㄷ사에서 연락이 왔다. 회사에 갔더니 담당자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생소한 단어들이 포함된 계약서였는데, 정리하자면 웹툰 플랫폼들 다수가 작가와 계약할 때 적용하는 ‘엠지’(Minimum Guarantee·최소 보장금) 제도라고 했다. “작가님을 위한 거예요.” ㄷ사의 간부급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엠지는 명목상으로는 작가에게 최저생계비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했다. 엠지 이전에는 작가가 원고를 보내면 우선 회당 20만~40만원 상당의 고료를 받고, 추가로 유료 수익에 대해 작가가 70% 정도 분배받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웹툰이 인기를 끌면서 유료 수익을 많이 내는 ‘스타 작가’가 늘고 웹툰 수익이 상승세를 타면서, 웹툰 플랫폼들이 2010년대 중반부터 엠지로 계약 방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2015년 웹툰 전문 플랫폼인 ‘레진코믹스’가 작가에게 회당 50만원, 월 200만원의 엠지를 보장하겠다고 밝히면서 엠지는 업계의 대표적인 계약 방법이 됐다.
초반에는 작가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이전 방식으로는 회당 20만~40만원을 받는다고 해도 한 달 수입이 80만~160만원 정도에 불과해 유료 수익을 올리지 못하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엠지로 계약하면 최소 월 200만원은 보장받을 수 있으니, 작업에 쓸 자료 준비 비용, 웹툰용 프로그램과 배경으로 쓰는 이미지 구매 등에 수십만원을 지출하고도 최소한의 생계비는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작가들이 많았다.
장누리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ㄷ사의 간부급 담당자 역시 회당 50만원 남짓, 주1회 연재이니 한 달이면 200만원 정도의 엠지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스타 작가가 아닌 이상 계약의 주도권은 플랫폼에 있었다. 장누리는 고민 끝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하루 최대 14시간에 이르는 작업을 소화하며 한 달에 이틀만 쉬었을 정도로 모든 힘을 연재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곧 장누리가 말한 ‘저당’이 현실로 다가왔다.
장누리의 데뷔작은 다행히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 엠지로 받은 월 200만원 이상의 매출이 나왔다. 그래서 추가 수익을 기대했다. 연재가 끝나고 정산표를 받아본 장누리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가의 최저생계비 보장을 명분 삼았던 플랫폼은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를 하면서 되레 유료 수익 배분에서 이전보다 더 큰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애초 그는 엠지 계약 관행대로 플랫폼과 유료 수익을 5 대 5로 나누기로 했었다. 장누리가 애초 이해한 수익 배분 방법은 이렇다. ‘웹툰에서 엠지로 제공한 200만원 이상의 매출이 생기면, 작가가 미리 받은 엠지는 모두 차감된 셈이다. 그러니 매출 201만원이 될 때부터 1만원을 5 대 5로 나눠 5천원씩 추가 이익을 얻는다.’
ㄷ사는 전혀 다른 셈법을 내놨다. 초기 매출부터 무조건 5 대 5로 수익을 배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장누리에게 지급한 엠지 200만원이 모두 차감된 시점은 매출 200만원이 났을 때가 아니라 400만원이 났을 때라고 했다. 그러니 장누리는 200만원을 받고 작품을 연재했지만, 매출이 400만원을 넘기지 못하면 엠지를 다 갚지 못한 게 된다.
업계에선 장누리가 기대했던 방법을 ‘선차감 엠지’, ㄷ사를 비롯한 플랫폼이 적용하는 방법을 ‘후차감 엠지’라고 부른다.
그뿐만 아니다. 플랫폼은 매달 정산표를 기준으로 작가가 엠지로 받은 금액의 2배 넘는 매출을 올리지 못하면, 엠지를 다 갚지 못했다고 보고 남은 금액을 다음 달로 이월한다. 이 금액은 작가의 빚 형태로 남게 된다. 장누리가 어떤 달에 500만~600만원의 매출을 올렸더라도, 이전에 월 400만원 이하의 매출을 올린 적이 있다면 ‘빚을 갚아야 해서’ 별다른 수익 배분을 못 받게 된다. 작가가 웹툰을 그려서 플랫폼에 건네는 노동의 대가는 전혀 받지 못하고 철저하게 웹툰 매출에 따른 수익만 배분받는 구조에 갇혀버린 것이다. 배분율에서도 이전 제도보다 작가에게 불리해졌다. 플랫폼이 엠지 제도를 도입한 명분은 작가의 최저생계비 보장이었지만, 실제로 의도한 것은 더 많은 이익이었던 셈이다.
장누리가 후차감 엠지가 아니라 선차감 엠지로 이해했던 이유가 따로 있다. 계약 당시 ㄷ사 담당자는 “작가님께 드린 돈을 매출에서 먼저 차감하고, 그다음부터 수익이 돌아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막상 연재하고 나니 말이 달라졌다. “연재가 완결되고 한참 작품이 팔리고 있을 때 플랫폼 담당자가 정산표를 들이밀었어요. 계약하기 전에 이해했던 이야기랑 달랐죠. 후차감 엠지 방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피디님, 왜 말이 바뀌었죠?’라고 물으니 ‘아니에요. 작가님이 잘못 알고 계신 거였어요’라고 해요. 무조건 제가 잘못 이해했다는 식인 거죠.”
“거의 사기 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신인 작가이던 장누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데뷔하고 작품으로 수익을 내면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공간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바람은 저만치 사라졌다.
‘엠지도 못 갚는 작가’ 낙인에 우울감까지 생겨
<한겨레>는 지난 8월부터 22명의 젊은 웹툰 작가와 지망생을 인터뷰해 웹툰 플랫폼과 작가의 불공정 계약에 관해 들었다. 인터뷰에 응한 대다수 젊은 작가와 지망생들은 장누리처럼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플랫폼 쪽과 후차감 엠지 방식으로 계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든 엠지 계약 자체가 문제라고 보진 않지만, 이런 복잡한 계약 방법이 대체로 작가들의 이익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고 봤다.
특히 엠지는 작가를 평가하는 바로미터가 되어 작가들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작가들은 “‘엠지도 못 채운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플랫폼과 협상을 하면서 불리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엠지 차감으로 받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엠지가 한 달에 160만원이었는데 차감하지 못한 적이 있었어요.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플랫폼이 홍보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지 않았어요. 저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 작가들을 보면 ‘엠지도 못 갚는 작가’라는 낙인에 자존감이 낮아지고 우울감에 빠지는 이들도 있거든요.” 44살 웹툰 작가 김성연(가명)의 말이다.
작가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문제는 또 있다. 웹툰 수익 정산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의 매출액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건설회사에서 15년 동안 일하다 3년 전 웹툰 작가로 전업한 손홍래(가명·41)는 플랫폼을 소유한 한 웹툰 에이전시와 엠지 계약을 했다. 사실상 데뷔작이었기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에이전시는 손홍래에게 원고만 받아가고 매출과 상업적 활용 계획은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자신의 작품이 여러 웹툰 플랫폼에 동시에 연재되고 있었다. 손홍래는 황당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에이전시에 웹툰이 얼마나 수익을 냈는지 물었지만, 에이전시 쪽은 공개를 거부했다. “계속 전체 매출을 밝히라고 했지만, 집계할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서 대답을 피하는 겁니다. 계속 물어봐도 ‘수익이 안 났어요’라는 말이 전부예요. 제가 겪은 곳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들이 그래요.”
매출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플랫폼들은 이를 무기 삼아 갑작스러운 연재 종료 등 ‘갑질’을 벌이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케이티(KT)가 운영하는 웹툰 플랫폼 ‘케이툰’이 작가 수십명에게 연재 중단을 통보해 논란이 일었다. 레진코믹스 또한 2018년 일부 작가를 대상으로 부당한 계약해지를 했고, 웹소설 부문 연재 작가에게도 갑작스러운 연재 종료 통보를 했다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웹툰 작가 오현영(가명·29)도 이런 일을 겪었다. 오현영이 한 웹툰 플랫폼에 연재했던 순정만화 판타지물에는 아직도 ‘다른 곳에서 계속 연재해주시면 안 될까요?’, ‘중간에 이렇게 끊어먹는 게 어딨나요’라는 댓글이 올라온다. 그는 이런 댓글들을 보면 속이 쓰리다고 했다.
오현영이 중소 규모인 이 웹툰 플랫폼에 작품을 연재한 건 2016년 말이었다. 3년 동안 전송권 계약을 맺었고, 인기 순위도 상위권이어서 안심하고 연재했다. 그런데 플랫폼 쪽에선 2017년 4월께 갑자기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 앞으로 3~5회 안에 완결을 지으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계약을 해지했지만 전송권을 가진 플랫폼은 종료된 웹툰을 계속 걸어둔 채 이익을 얻으려 했다. “주인공이 이제 모험을 떠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죽는 식으로 끝내야 하는 거죠. 독자들한테 연재 중단의 이유라도 공지를 쓰겠다고 했는데, 플랫폼 쪽은 이마저 거부했어요.”
오현영은 1년 가까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작가들과 싸움을 벌이고 나서야 겨우 전송권을 되찾아왔다. 하지만 1년의 세월을 허비한 탓에 공들여 스토리 라인을 짰던 작품은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화병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열이 올라요. 제가 작업했던 플랫폼에서 제가 아는 사람들만 30명 정도가 이런 식으로 연재를 강제 종료 당했어요. 그것도 서로 단톡방(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얘기하다 알게 됐는데, 다른 플랫폼까지 합치면 이런 일이 아주 많았을 것 같아요.”
5년 전 만든 ‘표준계약서’…실제 사용은 15%뿐
이런 문제 때문에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만화영상진흥원 등이 협의해 ‘표준계약서’를 만들었고, 2018년에는 개정 작업까지 했다. 하지만 표준계약서 작성이 의무가 아니어서 현장에선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펴낸 ‘2019 웹툰 작가 실태조사’를 보면, 표준계약서를 쓰는 웹툰 작가는 15%에 불과했다.
웹툰 작가들의 법률 자문을 해온 김종휘 변호사(마스트 법률사무소)의 말이다. “‘작가님을 위해서’라며 플랫폼이 내민 계약서를 검토해보면, 독소조항이 빼곡한 ‘누더기’ 계약인 경우가 많아요. 표준계약서를 적용해 계약해도 플랫폼 쪽에 유리한 쪽으로 계약서를 만드는 경우도 많죠. 작가가 용역(웹툰 작품)을 제공했는데도 계약 해지 때 지급됐던 엠지를 플랫폼에 돌려주도록 한 경우도 있었어요. 계약서에는 엠지를 반환해야 하는 조건이 ‘작가의 귀책사유로 연재가 중단됐을 때’라고 되어 있는데 말이죠. ‘귀책사유’ 조건이 불분명하거나 플랫폼 쪽에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식인데, 그런 ‘독소조항’을 알게 되고 나서도 참는 작가들이 많아요. 플랫폼에 연재해야 하니 진입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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