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7월1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범죄 양형기준 등을 다루는 제103차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11월 <한겨레>가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보도를 시작하자 ‘박사’ 조주빈은 “한겨레가 텔레그램을 침공했다”고 주장하며 ‘보복’을 선언했습니다. 추종자들에게 해당 보도를 한 기자의 신상을 털어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참혹한 범죄가 고발되었음에도 반성이 아닌 언론의 공적 역할을 희롱하는 것을 새로운 ‘게임’으로 즐겼습니다. 앞으로 피해자들을 모두 ‘한겨레 피해자’로 부르겠다고도 했을 때는 아득하고 어지러운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지난 3월 조주빈이 검거됐습니다. 서울 종로경찰서 앞 포토라인에서 처음 언론과 마주한 그는 “피해자들한테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뜬금없이 “손석희 사장님, 김웅 기자님, 윤장현 시장님을 비롯해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수십명의 성착취 피해자들이 아닌 세명의 유명 남성을 향한 그의 사과는 심리분석 대상이 될 만큼 화제를 모았고, 잠시나마 사건의 초점을 분산시켰습니다.
재판 중인 조주빈은 곧 최후진술을 할 것입니다. 뭐라고 말할까요. 그는 지난 3월 이후 80여건의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했다고 합니다. 1년 전에는 언론이 ‘텔레그램의 왕’인 자신의 세계를 침공했다고 주장했고, 6개월 전에는 피해자들을 그냥 ‘모든’으로 퉁쳐 미안하다 했던 그는 지금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반성하고 있을까요. 이제야 사건의 참상을 깨달았을까요. 혹시 그의 ‘지속적인 반성’에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요.
안녕하세요. 사회부 탐사팀 기자 김완입니다.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보도 이후
‘벌써 1년’이 다 돼가나 싶을 정도로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지난 15일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새로 권고한 것입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이 논란이 되고, 국회가 아동·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해 디지털 성범죄의 처벌 수위가 높아지자 이를 반영해 양형기준을 상향한 것입니다. 물론 지난 1년여 동안 ‘#사법부도_공범’이라고 외치며 온·오프라인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환기해온 여성들의 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디지털 성범죄자는 초범일 경우 찍어내듯 1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다크웹에서 수백건의 아동 성착취물을 판매한 손정우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징역 1년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올해 4월 만기 출소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는 안 됩니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범죄는 기본
양형이 징역 5년~9년 형으로 상향됐습니다. 총 8개의 특별가중인자가 인정되면 최대 29년3개월까지 선고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징역 100년도 때리는데 한국은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에 사법부가 응답한 셈입니다.
강화된 양형기준은 제2의 조주빈을 막고 국민 법감정에 부합하는 정의의 받침대가 될 수 있을까요. 양형기준 강화는 지난 1년여간 우리가 함께 내디딘 거대한 한 발입니다. 성범죄에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처벌을 내려온 관행이야말로 디지털 성범죄의 최종 숙주였습니다.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르면 끝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분명 범죄를 억제하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조주빈은 형법상 초범으로 분류됩니다. 초범의 사전적 의미는 ‘죄를 처음 저지른 사람’입니다. 보통 동종 전과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초범은 모든 죄에서 형 집행의 참작 사유가 됩니다. 법원이나 수사기관은 기본적으로 초범에 관대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한번쯤 실수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정된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에도 여전히 초범은 감경 사유입니다. ‘불특정 또는 다수 피해자를 상대로 하거나 상당 기간에 걸쳐 반복적 범행을 한 경우’에만 제외될 뿐입니다. 모든 디지털 성범죄자의 경우 붙잡힌 것이 처음이지 온라인상에서는 수백, 수천, 수만의 동종 범죄를 이미 저질렀다고 봐야 합니다. 형법상의 초범 개념은 디지털 공간에서 벌어지는 범죄 특성에 맞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가중인자가 없다면 여전히 디지털 성범죄의 기본형은 1년~5년에 불과합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한 피해자의 인생을 파괴하고, 그 파괴는 누군가들에 의해 무한 반복될 우려가 큽니다. 엄중한 처벌 이전에 신속한 수사와 모든 디지털 성범죄자는 반드시 잡힌다는 확실성이 필요합니다. 이제 양형기준이 바뀌었을 뿐 신속성과 확실성을 강화할 대책은 여전히 말만 무성합니다.
조주빈 이후 1년, 그렇다면 그는 이제 29년 형을 선고받을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론 새 양형기준은 개정 이후 기소된 이들부터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김완 사회부 기자 funnyb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