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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우리 시대 ‘임계장’, 경비원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등록 2020-05-29 20:05수정 2020-05-30 02:30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주민의 괴롭힘을 호소하며 세상을 등진 아파트 경비원 최희석씨가 쓴 근무일지. <한겨레> 자료
주민의 괴롭힘을 호소하며 세상을 등진 아파트 경비원 최희석씨가 쓴 근무일지. <한겨레> 자료

“주민께 친절봉사, 인사 철저히, 순찰 강화.”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던 최희석(59)씨가 빼곡히 적은 근무일지입니다. 최씨는 일지에 차량점검 한 시각을 초 단위까지 적어놓을 정도로 성실하고 꼼꼼했습니다. 주민들은 최씨를 ‘맑은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를 2년 가까이 봐온 한 주민은 “주차된 차가 움직일 걸 방지하려 받침대까지 손수 만들 정도로 성실했다. 강아지에게 인사할 정도로 착해서 불평 한마디 하질 않았다”고 했습니다. 한평 남짓한 경비실 구석에는 안데르센 동화집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씨는 지난 3일을 마지막으로 근무일지를 더 적지 못했습니다. 대신 격의 없이 지냈던 입주민에게 지난 10일 새벽 삐뚤빼뚤하게 적은 글을 보냈습니다. “저 너무 억울해요.” 최씨는 결국 그날 세상을 등졌습니다.

안녕하세요. 경비원 최희석씨의 비극과 우울증을 앓아온 김한성(가명·71)씨의 사연을 취재한 사회부 사건팀 배지현입니다. 최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건 한 입주민의 ‘갑질’이었습니다. 유족과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최씨는 지난 4월부터 주차 문제로 입주민 심아무개씨에게 지속적인 협박과 폭행을 당했습니다. 최씨는 생전에 도 넘은 괴롭힘을 알리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친형인 최광석씨는 “입주민이 ‘경비 주제에 사장이 나가라고 하면 머슴이 나가야지’라며 관리사무소로 동생을 끌고 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동생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죽도 넘기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일부 입주민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경찰에 심씨를 고소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툭하면 심씨는 그만둘 것을 요구하며 강도 높은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결국 최씨가 목숨을 끊고 나서야 폭행 혐의로 구속기소됐습니다.

갑질로 인한 고통은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에게 따라붙는 그림자입니다. 공기업에서 정년퇴직하고 고령에 임시직 일자리를 경험하며 써 내려간 노동일기 <임계장 이야기> 저자인 조정진(63)씨는 빌딩 경비원 등 여러 계약직 노동 가운데 아파트 경비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한 입주민은 음식물 잔반통을 씻던 조씨에게 “수압을 세게 해 수돗물을 낭비한다”며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은 마스크나 방한복을 부탁하면 “얼마나 더 살고 싶어서 그러느냐”며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선임 경비원은 조씨에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 일을 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조씨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아파트 경비원이 마주하는 일상은 인격이 말살당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임계장의 제보도 있었습니다. 11년 가까이 경비원이었던 71살 김한성씨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습니다. 한 주민은 수시로 경비실을 들여다보며 김씨가 쉬고 있지 않는지 5년 동안 감시했다고 합니다. 또 목이 말라 찬물을 마시러 관리사무소에 가면 바로 민원을 넣어 김씨가 정수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협력업체가 바뀌면서 해고를 당한 김씨는 한동안 부인이 그 주민으로 보이는 등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김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맺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같은 인간인데….”

임계장들에게는 ‘작은 방패’조차 없습니다. 특정 주민의 일방적인 갑질이 시작되면 오로지 혼자 견뎌내야 합니다. 일자리를 소개해준 협력업체도, 아파트를 관리하는 관리사무소도 방어막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이들을 보호할 법적 근거도 부족합니다. 공동주택관리법은 ‘입주자 등이 경비원에게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지만, 이를 처벌할 조항은 마련해두지 않았습니다. 용역업체를 통해 단기계약으로 일하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입주민과 개인 문제로 해결하라는 건 이미 갑을관계가 형성된 아파트 공간에서 부당한 해결책입니다.

최씨의 죽음 이후 경비원 보호장치 마련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현행 경비업법에 경비원들의 복지나 피해방지 조항을 넣고,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경비원들도 최소 근로시간과 주휴일 등을 보장받게 하자는 내용입니다. 또 경기도 고양시는 경비원에 대한 갑질이나 폭행 등이 발생했을 때 관리사무소와 그 입주민에게 연대책임을 묻는 ‘경비원 인권지원 조례’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경비원 갑질행위 관련 특별 신고 기간을 기한 없이 운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배지현 사회부 기자 bee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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