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빌미를 제공한 피해자도 잘한 건 없다.’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을 다룬 기사마다 달리는 댓글입니다. 애초에 일탈계(신원을 노출하지 않은 채 신체 일부만 찍어 업로드 하는 계정)에 사진을 올리거나 조건 만남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범죄 대상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식인데요. 일부 ‘악플’만 그런 게 아닙니다. <반일종족주의> 공동 저자 이우연 낙성대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달 22일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딸이 피해자라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고 했습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이런 말들, 어떤 점에서 문제일까요? 19년 동안 1000명 넘는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해 온 배복주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자에게 물었습니다.
Q.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정의당 비례대표 7번 배복주입니다. 장애여성공감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다 2001년부터 성폭력 상담을 시작했고 2014년부터 올해 2월까지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대표로 일했습니다. 이 같은 현장 경험을 가지고 최근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Q.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을 다룬 기사나 영상 아래엔 항상 ‘피해자도 잘한 것 없다’‘피해자도 처벌받아야 한다’는 댓글이 달립니다. 이런 인식, 어떤 점에서 문제인가요?
A. 다른 범죄와 달리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비난하는 일이 유독 잦습니다. 피해자의 행실, 선택이 사건을 유발한 원인이라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식인데요. 저는 소위 ‘스폰알바’를 제안하는 링크를 받았을 때 과연 자신의 신체 사진과 신상 정보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퍼지고, 성범죄에 노출될 거라고 피해자가 예상하고 동의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즉, 가해자가 만든 범죄 구조에 피해자가 유인당한 건데, 유인을 당했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 문제라는 거죠. 보이스피싱처럼 수많은 링크가 오고 궁핍한 피해자가 클릭했는데, 이 클릭 한 번으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을 대상화할 거라고 예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 가해 구조를 만든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2차 가해가 ‘원래 피해를 지속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피해가 있고, 2차 피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원래 피해를 연속시키는 게 2차 피해라는 거죠. 피해자 행실의 문제를 지적하면 피해자는 ‘내가 잘못한 거구나’라고 자책하면서 피해를 부정하게 되고 원래 피해로 회귀하게 됩니다. 문을 열고 잠들었는데 강도가 들어왔다면 사람들은 강도를 욕할까요? 문을 열고 잠든 사람을 욕할까요? 일반 범죄에서는 강도를 욕하는데 성범죄에서는 문을 열어둔 사람을 욕합니다. 이런 얘기들이 반복되면 결국 성범죄는 피해자가 유발한 게 되고 피해자 책임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나라는 피해자를 끊임없이 자기성찰 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피해자가 비난을 너무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왜 밤늦게 돌아다녔냐’, ‘왜 그렇게 야하게 입었냐’, ‘왜 그렇게 화장했냐’ 이런 수많은 질문 앞에서 피해자는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고, 완벽해야만 신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Q. ‘이런 말도 2차 가해가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A. “신고해봤자 너만 손해야.” 이게 피해자를 걱정해서 하는 말 1위인데 사실은 피해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해자가 신고를 못하게 하고 책임을 묻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게 왜 같이 술을 먹었어’‘왜 정신을 잃었어’라는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피해자의 실수를 극대화하는 반면, 가해자의 잘못은 축소합니다. 소문을 유포하는 것도 2차 가해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힘을 잃게 하고 결국에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범죄는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Q. 후보자가 만약 현장에서 n번방 피해자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A. 첫째,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둘째, 용기 내어 말해줘 고맙습니다. 셋째, 당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무엇입니까? 넷째 당신 곁에 우리가 있습니다. 안전해질 때까지 혼자 무서워 말고 우리랑 얘기합시다.
Q. 아직 신고하지 못한 n번방 피해자에게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A.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는 피해자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이분들께는 첫째 용기를 내 달라, 둘째 이번에는 국가의 공권력을 한 번 믿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많은 피해자가 ‘내가 사는 이 사회가 나를 지켜줄까’ 타진하고 있을 겁니다. 말하면 도와줄 기관이 있고 사람이 있습니다. 국가와 정부도 피해자가 신뢰할 수 있는 메시지를 내줘야 합니다.
Q. 현장에서 성범죄 피해자가 가장 많이 토로하는 고민은 무엇인지, 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궁금합니다.
A. ‘내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무고죄(로 고소를 당하거나) 손해배상으로 보복당하는 두려움도 호소하시고요. ‘사람 눈을 못 보겠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는 등의 증상을 말하고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묻는 분도 많습니다. 심한 경우 갈 곳이 없는 분도 계십니다. (성범죄는) 주변인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아 집과 직장으로 (피해자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어섭니다. 이럴 때는 쉼터를 연결해 드립니다.
가장 효과적인 상담은 ‘정보’를 주는 겁니다. 신고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신고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무엇인지 등 적절하고 예측 가능한 정보를 제공해 피해자가 자신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도록 도움을 주는 거죠. 또 어떤 선택을 하든 동행하겠다는 신뢰를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Q. 언론이 특히 조심해야 할 표현은 무엇인가요?
A. 언론노조에서도 발표(※지난달 24일 언론노조는 피해자 보호를 위한 ‘n번방 보도 관련 긴급지침'을 내놨다)했는데 일단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언론이 성범죄를 다룰 때 ‘씻을 수 없는 상처’, ‘악마’같은 표현을 쓰는데, ‘씻을 수 없는 상처’는 성범죄를 ‘범죄’가 아닌 ‘성관계’로 보는 관점이고, 피해자는 범죄 피해를 당한 것이지 성적으로 훼손된 게 아니기 때문에 써서는 안 되는 표현입니다. 또 ‘악마’라는 표현은 평범한 사람인 (가해자를) 타자화, 비 일상화시키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Q.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시급히 이뤄져야 할 지원은 뭔가요?
A. 피해자에게 가장 시급한 건 법적 조력입니다. 특히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뢰 관계인이나 조력자를 배석하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도 경찰에서 “(조력자를 배석) 할래요 말래요” 묻기는 하는데, 그 수준이 아니라 조력자 배석 제도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이뤄지고 (배석이) 전제된 상태에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불어 우리나라는 성범죄 가해자가 주변인인 경우가 많아 범죄를 당하면 직장과 주거를 한꺼번에 잃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긴급 쉼터를 충분히 확보해야 합니다. 영상 삭제도 시급한데, 여성가족부가 지원하고 있지만, 인력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한겨레TV 갈무리
Q. ‘n번방 특별법’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 법안에 반드시 담겨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A.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은 가해자가 한국사회 입법 공백을 정확히 알고 이용한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낮은 성인식, 경미한 처벌, 제대로 판결되지 못한 수많은 판례, 가해자 사이에서 공유된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방법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 범죄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이 문제들을) 풀어야 한다고 봅니다.
n번방 특별법에는 크게 네 가지가 담겨야 합니다. 첫째 성착취물이라는 용어가 정확하게 법적 용어로 정리되어야 하고, 둘째 디지털 성범죄 형량을 강화해야 하고, 셋째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범주를 ①유포 협박에 시달리는 자 ②유포 당한 자 ③재유포 당한 자 등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현재는 (성착취물이) 유포된 분만 피해자로 지원하고 있는데 유포 협박에 시달리는 분도 피해자 범주에 포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포·제작·이용·소지자로 범죄 유형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특히 소지자의 경우 (현재는)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성착취물)만 처벌되는데, 성인 성착취물도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 영상이) 협박이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건지, 의사에 반해 만들어진 건지 등 구분 요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Q. 국회청원 1호 법안, 부족한 부분은?
A. 국민 10만명이 국회에 요청한건 디지털 성범죄 국제공조수사를 쉽게 하고, 양형을 높여달라는 건데 (1호 법안에 반영된 부분은) 딥페이크 영상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열렸던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일기장에 혼자 그림 그리다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 있냐’(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 혼자 즐기는 것까지 처벌할 수 있냐’(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 ‘청원한다고 다 법 만드냐(김도읍 미래통합당 의원) 등의 말이 오갔습니다. 이 속기록을 보면서 성인지 감수성은 둘째치고라도 (의원들이) 본인이 심사하는 이 법안이 왜 청원이 됐고 뭐가 문제인지는 좀 학습하고 심사했어야 하지 않나 싶고 한 마디로 무지하고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당의 성인지 감수성, 10점 만점에 4점 정도라고 봅니다. 둘 다 똑같습니다. 미투 운동에 두 당 모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투라는 사회적 운동이 있었기에 20대 국회는 과제를 많이 받은 국회였습니다. 그런데 국회가 응답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를 가만히 보니까 정치인들이 왜 이런 운동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부족합니다. 남성이 많은 국회 안에서 여성들이 입는 성폭력에 대해 감수성이 많이 떨어지는 거예요. 또 거대 기득권 양당정치다 보니까 소수의 목소리를 듣는데 예민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국회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대한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고, 다양한 커뮤니티를 매개로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많아져야 합니다.
취재/ 최윤아 기자 ah@hani.co.kr
연출/ 김현정 피디 hope021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