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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기업에 맞선 인고의 세월…“2890년에 사건이 끝나겠다”

등록 2020-03-14 11:19수정 2020-03-14 11:23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다크 워터스>

독성물질 원료 테플론 제조 ‘듀폰’
이에 맞선 변호사의 지난한 싸움
‘1998~2015년’ 16년 법정투쟁기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화가 나 있다’
승리에 취하지 않는 인상적 엔딩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파헤치는 언론사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 &lt;스포트라이트&gt;에서 기자 역할을 소화했던 마크 러펄로가 이번에는 폭로·고발물인 &lt;다크 워터스&gt; 제작과 주연(변호사)을 맡았다. 롭 빌럿(마크 러펄로)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인터넷 영화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파헤치는 언론사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기자 역할을 소화했던 마크 러펄로가 이번에는 폭로·고발물인 <다크 워터스> 제작과 주연(변호사)을 맡았다. 롭 빌럿(마크 러펄로)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인터넷 영화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일단 이것부터 짚어두자. 일부 관련 기사 제목이나 카피 등에서 눈에 띄는 것과 달리 <다크 워터스>에 바이러스는 나오지 않는다. 바이러스조차 생존할 수 없는 독한 화학물질이 등장하기는 해도 말이다. 주의 당부드리며 시작하면 <다크 워터스>는 ‘듀폰에 최악의 악몽이 된 변호사’라는 <뉴욕 타임스>의 2016년 특집기사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기사 제목만으로도 80퍼센트가량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한번 인체에 들어가면 배출되거나 분해되지 않는 ‘과불화옥탄산’(PFOA)이라는 독성화학물질에 ‘테플론’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고 그 찌꺼기를 대량으로 무단 폐기해온 거대 화학기업 듀폰을 상대로 벌인, 한 변호사의 지난한 싸움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스포트라이트>에서 무척 흥미로운 캐릭터였던 기자 ‘마이크 레젠데스’를 연기했던 마크 러펄로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탓인지, 이 영화에는 ‘<스포트라이트> 제작진의 충격 고발 실화’라는 헤드 카피가 달려 있다. 하지만 마크 러펄로를 제외하고 실상 제작진 측면에서만 본다면 두 영화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 주요 제작진 중에서는 조너선 킹 정도만 두 영화 모두에 프로듀서로 참여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떠올리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이다. 마크 러펄로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자전거를 탄 동네 아이들이 주인공의 곁을 지나치는 장면 등 몇몇 구체적인 장면이나 다분히 <스포트라이트>스러운 향취 풍기는 음악(마르첼 자르보스)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객관적인 시선과 감정적인 거리 두기부터 이야기의 진행, 그리고 거대권력과 싸우며 진실을 밝히는 일에 소모되는 엄청난 시간과 노동(!)에 대한 부각까지, 두 영화는 아닌 게 아니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다크 워터스>는, 가장 두드러지게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로부터 <스포트라이트>까지 이어져 내려온 폭로/고발자(whistle-blower) 무비의 전통에서, 어떤 자신만의 독자적 시각을 보여줄 것인가.

영화는 1975년 한밤중, 사유지 철조망을 넘어 그 안의 저수지에서 심야 알몸 수영을 즐기는 젊은 남녀들로 시작된다. 이들을 보여주는 수중촬영 숏은 오징어형 수중괴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독성물질 중독으로 인한 돌발 마비/발작/사망 등을 예상케 하지만(실제로 토드 헤인스는 이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죠스>에 대한 애정을 언급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그저 보트를 타고 나타난 듀폰 쪽 직원들을 보고 도주할 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듀폰 직원들이다. 이들은 순찰이 아니라 수면에 낀 정체불명의 거품을 향해 방제 작업을 하던 중 침입자를 맞닥뜨린 것이다. 젊은이들이 달아난 뒤, 서치라이트를 끄지 않는 직원에게 다른 직원이 외친다. “불 꺼! 이 바보야.” 그렇다. 이 영화의 죠스는 다름 아닌, 듀폰이 은폐하고 있는 바로 그 무엇이다.

이렇게 괴물의 발톱 끝을 슬쩍 보여줌으로써 괴물 전체의 모습을 제시하는 영화의 도입부는, 불 꺼진 사무실 빌딩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정체불명의 손전등 불빛으로 시작되는 <모두가 대통령의...>의 도입부부터, 말 몇 마디로 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아동 성추행 신부를 빼 가는 교회 고위층을 보여주는 <스포트라이트>의 도입부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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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아내, 그리고 ‘충격 고발’

그 뒤의 전개 역시 그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크 워터스>는 주인공 ‘롭 빌럿’(마크 러펄로)이 파트너로 있는 대형로펌의 회의실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며, 그곳에서의 짤막하고 압축된 풍경으로 주인공이 처해 있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방인이 등장한다. 사소한 모습을 한 거대한 사건과 함께. 설립자들의 유화 초상화 너머 신시내티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로펌 사무실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야구모자와 청바지 차림의 농부 ‘윌버 테넌트’(빌 캠프)는, 다짜고짜 주인공에게 비디오테이프가 잔뜩 든 박스를 떠맡기고 간다. 그것은 듀폰의 대규모 플랜트가 자신의 농장을 망친 증거들이다.

이후 주인공 롭 빌럿은 ①사건에 점점 빠져들며 고립되어 가는 주인공 ②그와 함께 곤경에 빠지는 가족들 ③주인공이 불고 있는 풍선의 공기를 끝없이 빼내는 거대조직의 노련함과 뻔뻔함 ④주인공을 믿고 싸움을 시작했지만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싸움에 지쳐가는, 그리고 심지어 ⑤목숨을 잃어가는 피해자들 등등, 좀 멀게는 <폴 뉴먼의 심판>부터 비교적 가깝게는 <에린 브로코비치>까지, 거대조직과 맞붙은 개인의 무모해 보일 정도로 고단한 싸움을 그린 많은 법정물과 폭로/고발자 영화의 주인공들이 걸었던 동일한 길을 간다.

짐작하시듯 이것은 꽤 딱딱하고 어두운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의 효율적이고 매끈한 이야기 방식 덕분에 그런 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예컨대, 주인공 롭 빌럿이 임신한 아내 ‘새러’(앤 해서웨이)에게 ‘충격 고발’의 핵심을 들려주는 대목을 보자. 여기에서 영화는 ①PFOA(=테플론)의 치명적 위험성과 ②그걸 알고도 몇십 년간 감춰온 듀폰의 뻔뻔함 ③이 독이 프라이팬부터 콘택트렌즈까지 우리 일상 속에 얼마나 넓고 깊게 퍼져 있는지와 ④우리가 그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무방비한지를 훑는다. 동시에 영화는 ④아내의 출산을 맞은 롭 빌럿이 느낀 기형아 출산에 대한 공포 ⑤로펌 대표 ‘톰 터프’(팀 로빈스)가 거대 화학기업들이 고객으로 있는 로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를 사건을 안게 되며 느끼는 부담 ⑥빌럿의 입을 통해 이 사건의 전모를 듣는 듀폰 쪽 반응을 함께 보여준 뒤, 빌럿이 ⑦애초에 이 사건을 수면 밖으로 끌어낸 장본인인 농장주 테넌트에게 진실의 전모를 알려주는 것으로 이 장면을 마무리한다. 그런데도 많은 정보량이 주는 부담이나, 다른 시간/공간에서 벌어지는 다른 이야기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데 따른 위화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의 감독 토드 헤인스(<캐롤>, <아임 낫 데어>, <파 프롬 헤븐>)라는 이름에서 그러한 매끈함 이상, 즉 이 영화만이 통찰해낸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다크 워터스>만의 통찰은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곳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는 곳곳에서 카메오 출연한 실재 인물들을 보여주며 ‘피해자’, ‘원고’(原告), ‘수용체’(듀폰이 자신의 화학물질에 노출된 사람들을 지칭한 단어) 같은 단어들에 가려져 있는 진짜 사람들을 드러낸다. 그것은 온갖 전문용어들과 신생어의 미로에서 흐려진 우리들의 시력을 체감하게 하는, 영화적 재치 이상의 것이다.

더 핵심적인 통찰은 사건의 변곡점마다 등장하는 연도별 자막에서 엿보인다. 롭 빌럿이 이 사건의 존재를 처음 접한 1998년부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2015년까지 이어지는 이 자막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정보 전달 이상의 의미를 띤다. 그것은 듀폰의 악행이 지속된 시간, 그리고 롭 빌럿이 그것과의 싸움에 쏟은 시간(영화 기준 16년)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빌럿은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화가 나 있다’고 말했다).

새러(앤 헤서웨이)가 거대 화학기업 듀폰과의 법정 싸움에 지친 남편 롭 빌럿(마크 러펄로)을 안아 다독이고 있다. 빌럿은 아내 출산을 앞두고 기형아 출산의 공포를 느낀다. 인터넷 영화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새러(앤 헤서웨이)가 거대 화학기업 듀폰과의 법정 싸움에 지친 남편 롭 빌럿(마크 러펄로)을 안아 다독이고 있다. 빌럿은 아내 출산을 앞두고 기형아 출산의 공포를 느낀다. 인터넷 영화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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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하이라이트는 영화 후반부, 수렁에 빠져 꼼짝 못하던 롭 빌럿의 싸움이 마침내 기적적인 성과를 내며 ‘영웅적 승리’를 거두는 장면 직후에서다. (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보통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영화 속 롭 빌럿의 대사다)라는 대사와 함께 ‘이쯤에서 대략 마무리’로 진입할 법한 그 대목에서 영화는, 암전된 화면 위에 ‘2006’, ‘2007’, ‘2008’, 그리고 ‘2009 첫 사건 시작 후 11년 경과’라는 자막만을 띄운다. 이런 싸움에서 ‘모든 것을 일거에 끝내버리는 영웅적인 승리’ 같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하여 영화의 말미, 2015년 법정에서 판사가 롭 빌럿에게 던지는 “앞으로 도합 3535건의 재판을 진행해야 하니 운이 좋다면 2890년에나 이 사건이 끝나겠다”는 대사,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마지막 자막은, 거대권력이 앞세운 시간이라는 방어벽과 그에 맞서는 인내라는 무기에 대한 <다크 워터스>의 문제의식을 함축하는 핵심이 된다. 그것은 확실히 지금까지 많은 ‘폭로 고발물’들이 혹여 승리의 카타르시스를 해칠까 선뜻 나가길 주저했던 지점이다.

물론 <다크 워터스>를 보고 있노라면 ‘굳이 토드 헤인스가 이런?’이라는 의문이 충분히 들 법하다. 사실 이 영화를 만들고 끌어가는 것은 예술적 성취라는 목표보다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더 많은 사람에게 (그것도 미국 대선 이전에) 알리고자 하는 의지다.

그 의지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하지만 회사도, 과학자도, 기관도 하지 않는 일이기에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을 알리려, 세상을 향해 호각을 부는 예술가들의 의지만큼은 그 사회의 중요한 자산임이 틀림없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기실 영화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논의되고 해결되어야 할 일들에, 영화가 매달려야만 하는 조건 자체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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