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비에스(SBS) 스페셜-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으로 방송돼 사회에 큰 울림을 남긴 김용현(67)씨를 <한겨레>가 첫 지면 인터뷰했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충북 제천의 한 병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병원 뜰 산책에 나선 그가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 제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분19초짜리 영상에는 환자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누워 있다. 강원도 속초여고 학생들에게 졸업 축하 메시지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가 힘겹게 입을 뗀다. “신사임당, 닮으시고, 의리, 최우선으로 하고, 데모, 참여하고” 한다. 성인이 되면 시위에 나가라는 뜻이냐고 되물으니 고개를 끄덕, 왼팔로 팔뚝질하며 하회탈처럼 웃는다.
요즘 학생들이 “저를 부끄럽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손편지를 쓰고 영상 메시지로 한 말씀만 듣길 원하는 이 어른은 누굴까. 바로 김용현(67)이다. 2019년 6월부터 방송된 <에스비에스(SBS) 스페셜―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 등 총 4부작으로 전파를 탄 그는 87년 민주화운동, 군 의문사 진상규명 싸움, 삼풍백화점 구조 현장, 구미 산동골프장 반대 시위 등 현대사의 지독한 곤경의 자리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몸을 불사르다 조용히 사라진 청년 ‘요한’이며, 2012년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온 원조 자연인 ‘씨돌’이다. 일평생 불의에 항거하고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나섰지만 자취를 남기지 않았던 의인의 출현은 사회적으로 큰 울림을 남겼다.
현재 그는 뇌졸중으로 오른쪽 반신마비와 언어장애 상태다. 구강 근육이 경직돼 정확한 발음을 내기 어려운데, 다행히도 그가 단어를 뱉으면 조사를 붙여 문장으로 번역해주는 미더운 이가 곁에 있다. 제각각 흩어진 씨돌, 요한, 용현의 존재를 꿰어 세상에 알린 사람, 이큰별 에스비에스 피디의 ‘동시통역’으로 지난달 24일 충북 제천의 한 병원에서 인터뷰를 했다.
요한, 씨돌, 김용현씨는 2016년 뇌출혈로 쓰러져 재활 치료를 받고 있다. 자신을 “연초록 평화주의자”라고 써놓은 김씨의 공책. 제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른일곱, 봉화치 씨돌로
―요한은 세례명이고, 씨돌은 무슨 뜻이에요?
“배고플 때 도라지를 먹었는데 씨가 떨어진 자리에 도라지꽃이 피었어. 내가 씨를 좋아하는 강원도 감자바우라는 뜻이야.”
이름 그대로, 씨돌의 삶은 강원도 정선에서 영글었다. 그는 1989년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시위 도중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심하게 다쳤는데 입원 치료를 할 정도로 심각했다. 시위 때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앞장서는 그를 지켜봐왔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고민 끝에 그를 정선으로 요양 겸 피신을 시켰다.
―몸이 회복된 다음에도 서울로 안 가고 정선에 남은 이유가 있나요?
“정선 다리 밑에서 밤나무 공동체란 이름으로 부랑자들이랑 살았어. 내가 거지 대장(웃음). 나중에 부랑자들이 많이 모여들고 말썽을 피워서 꽃동네로 보내고 나는 봉화치로 올라왔어.”
그때가 마흔 즈음이다.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봉화치 마을은 해발 800m에 집이 세 채뿐인 심심산골이다. 창문도 없는 허름한 집을 얻어 1991년에 둥지를 틀었다. 텃밭에다 배추, 무, 당근을 키우고 겨울이면 고라니가 사냥꾼들에게 잡힐까 봐 발자국을 빗자루로 쓸고 다녔다. 이웃집 옥희 할머니가 수확한 감자를 소쿠리에 내주면 옥수수를 찌고 집 앞에서 꺾은 들꽃을 얹어 돌려주었다. 봉두난발에 지게를 지고 봉화치에서 읍내까지 왕복 세 시간을 걸어다니던 그는 ‘지게꾼’ ‘참 좋은 아저씨’ ‘정선의 명물’로 알려졌다.
―생활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자급자족. 전화비가 한 달에 3천원, 전기요금 1300원. 한 달에 4300원이면 돼. 쌀은 물물교환. 그리고 토끼가 많이 와. 새끼를 8~10마리씩 낳으니까, 토끼 두 마리씩 어깨에 메고 정선 장에 가서 팔면 만원 줘. 검정고무신 제일 좋아했어요. 네 켤레씩 사왔어. 맨발로 갔다가 고무신 신고 와요.”
―자연인으로 티브이에 나간 출연료도 기부하셨죠. “돈을 갖는 게 무섭다”고 하셨어요.
“정말 무서워.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남의 돈을 뺏은 거 같아. 마음이 불편해. 자연인으로서 자연법에 따라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내 것이라고 싸우고 그런 게 안 맞아요.”
씨돌의 서랍에는 돈 대신 글이 쌓였다. 봉화치의 긴긴밤마다 쓴 산중일기가 2000페이지다. “진박새 고목 둥지에서 알까다. 드디어 울다. 다들 목을 쭉 빼다. 어미 새 오자 고요하다.” “첫눈이 내렸습니다. 송이송이 아름답습니다.” 같은 담담한 문장들 가운데 “의문의 죽음, 그들과 만날 것 같다” 같은 피맺힌 말들이 누워 있다.
―선생님에게 글쓰기는 무엇이에요?
“한풀이. (시위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친구들 얼굴이 생각나. 머릿속에 떠오르면 적어요.”
―자연을 노래한 시가 많아요.
“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있는 그대로 써요.”
―글이 안 써진다거나 하신 적 없으셨어요?
“없지.”
―와, 글이 잘 써지는 비법을 알려주세요.
“새소리, 물소리, 풀벌레 소리, 개구리 소리 들으면 돼. 홀딱 벗고 들으면 더 좋아.(웃음)”
티브이에 나온 자연인 씨돌은 실제로 영하 18도 날씨에 ‘홀딱 벗고’ 물웅덩이에 들어갔다. 고드름을 따서 얼음과자처럼 먹는가 하면 “개구리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느냐?”며 살가운 목소리로 고백했다. 또 비료 포대를 깔고 산비탈에서 신나게 눈썰매를 타기도 했는데 아이 같은 환호성 끝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혹시 세상에 기분 나쁘고 때려죽이고 싶은 사람 있고, 미운 사람이 있거들랑 다 여기 놀러 오시오.”
―그 말이 좀 처연했어요. 선생님은 잊고 싶은 미운 사람이 누구였어요.
“때려죽일 놈들, 박정희(후예들), 노태우, 전두환 죽이고 싶어. 제일 가슴 아픈 게 인혁당 사건…. 흐아아아악 (갑자기 울음이 터진다). 대구에서 알던 사람들이야. 끌려가기 전에 만났어. (1975년) 사형당한 8명 중에 세 사람을 알고 그 어머님들도 알아. 억울한 친구들인데 민주주의를 위해서 고문당하고 도장 찍고. 그 당시 신부님들하고 같이 서대문형무소 앞 집회 가서 영구차 밑에 누워서 못 나가게 하다가 두드려 맞았어. 허리를 다쳤어. 그때부터 몸이 안 좋아요.”
요한, 씨돌, 김용현씨가 지난 24일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충북 제천의 한 병원 뜰 산책을 하면서 새싹을 코에 대고 향을 맡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제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용현의 꿈, 요한의 싸움
용현은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병이 깊어 보육시설에 맡겨졌다. 평생을 결혼하지 않기로 서약한 엄마들이 한 가정에서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에스오에스(SOS)어린이마을에 1호 아동으로 들어온 용현은
어린이마을 어머니 최해연 여사 손에 자랐다. 대구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섬유회사에서 3년간 경리로 일했는데, 임원의 자금 횡령을 목격하고는 부정의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직업으로 법조인을 꿈꾼다. 지리산에 들어가 공부한 끝에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사법시험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에서 시위 전력을 문제 삼아 사법시험 1, 2차 합격자들을 3차 면접에서 탈락시키는 초유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고교 시절 교련반대 시위 이력으로 인해 용현의 꿈은 난파됐다.
이듬해 대자연의 품을 찾아 제주로 내려갔다. ‘사랑과 믿음의 집’이라는 장애인 시설을 만들려고 한라산 아래 터를 잡았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나 남을 돕겠다는 외지인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뭐 하는 사람이냐?’는 물음에 내보일 만한 선명한 사회적 표지를 갖지 못한 그는 간첩조작 사건의 손쉬운 표적이 됐다. 과거 시위 경력이 있었던 용현은 제주 보안대에 의해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자금으로 땅을 샀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 고문을 당했다.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한 청년의 꿈도 몸도 무참히 망가뜨리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1986년 서른셋 용현은 국경을 넘었다. 남미에서 광야의 성자 요한으로서 뜻을 편다. 남미의 파라과이에서 교민 신문을 만들고 민원상담소를 운영하고 한글학교를 세웠다. 먹을 물이 없던 현지인을 위해 우물을 팠다. 빼앗긴 농토를 원주민에게 돌려달라고 외치던 수녀가 살해당했을 때, 시신을 수습한 것도 그다. 이유 없이, 목적 없이, 대가 없이 이웃의 손발이 되어주던 그는 조국에서 날아온 비보, 87년 1월 박종철의 죽음 소식을 듣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87년 6월항쟁 당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실린 시위 사진에 그가 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의 거대한 물결에 흡수돼 몸을 던져 싸우던 그를 두고 이한열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말한다. “요한씨는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부터 투쟁 현장 제일 앞에서 우리를 인도한 사람이에요.” 박종철 아버지 고 박정기씨는 오랫동안 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맺었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그를 “요한아”라고 불렀다.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부모들이 제발 몸을 좀 챙기라고 꾸중하면 그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남을 돕는 일이 어떤 점이 좋으셨어요?
“질문이 잘못됐어. 돕는다는 생각 안 했어. 내 맘 가는 대로. 아무 생각 안 했어. 자연 그대로. 양심이 가는 대로.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맞는 거 아프고 무서운데…. 집회마다 맨 앞에 나가셨어요.
“그런 거 없어. 나도 유도 배웠어요. 근데 한두 명은 되지만 서너 명은 안 돼. 어머니들이 머리채 잡혀서 끌려가면 그놈들을 때려죽이고 싶었어.”
―안 맞으려고 몸을 피하면 혹시 비겁하게 느껴지나요?
“그렇지, 그렇지.”
―속초여고 학생들한테도 그래서 의리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하셨나 봐요. 근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의리가 뭐예요?
“연민의 정. 불쌍한 거 반드시 도와야 해.”
김용현씨는 1987년 12월 군 의문사 사건으로 숨진 정연관 상병의 죽음을 밝히는 일에도 앞장섰다. 2004년 7월15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이소선 여사(왼쪽부터)와 정씨의 형 정연복씨, 어머니 임분이씨가 김용현씨에게서 정 상병 관련 증언 자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군 의문사 사건 정연관을 돕다
전쟁도 아닌데 청년들이 무시로 죽었던 시대, 그러나 죽음은 공평하지 않았다. 고 정연관 상병은 87년 대통령 선거의 군부재자 투표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했다가 맞아 숨졌다. 부모에겐 가수나 배우를 꿈꿨던 아들, 출세해 엄마를 호강시켜 준다던 막둥이의 원통한 죽음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포항 출신 고졸 군인의 의문사였다. 서울 명문대생 죽음과 같지 않았다. 요한이 나섰다. 동료 장병들을 만나 증거를 모으고 정치인과 면담을 하고 소책자를 만들어 뿌렸다. 유가족과 한몸이 되어 싸운 덕분에 국회에서 다룬 최초의 군 의문사 사건이 되었지만 진상규명의 결론을 맺지 못했다. 이 사건은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17년 만에 진실이 밝혀졌다.
봉화치에서 소식을 들은 그는 포항에 찾아가서 고인의 어머니 임분이 여사를 안아드리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요한은 작년에 <에스비에스(SBS) 스페셜>을 촬영하면서 유가족과 15년 만에 상봉했다. 임분이 여사는 요한에게 묵혀둔 질문을 꺼냈다. “우리 처음 만났을 적에 무슨 맘으로 우리를 그렇게 도와주었어?” 그가 답했다. “가족 같아서.”
―자기 일처럼, 가족 같아서 나서다가도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사라지셨잖아요. 그러는 이유가 있으세요.
“내 마음속에 아픈 마음이 있어. 산에 가서 기도하고 싶어서.”
―어떤 아픔인가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사진이 나를 따라와.”
―너무 많은 죽음을 보셔서….
“종로6가 꽃시장에서 씨앗을 사서 뿌려. 길가에도 뿌리고 남한강에도 뿌리고, 서울에서 여주, 원주, 정선으로 걸어오면서 뿌려.”
―혼자서 원혼제를 지내시는 거네요. 억울한 죽음들을 겪으면서 선생님이 받은 상처도 클 텐데요.
“전태일 열사가 초등학교도 안 나왔어. 종철이는 명문대니까 많이들 데모도 같이 하고 그랬지만, 명문대가 아닌 애들도 많이 죽었어. 떨어져 죽고 무지 많이 죽었는데, 시신 수습하러 갔는데 아무도 안 와. 명문대생이 아니니까. 그런 게 싫어. 내가 방송통신대학교 나왔는데(1기 졸업생이다) 대학 취급도 안 하고 힘들었어. (잠시 침묵) 그래도 유가협 어머니들이 최고, 어머니들 만나면 가슴이 다 풀려.”
―서러운 일, 부당한 일을 겪으면서도 남 일에 나서서 미친놈 소리 듣고 간첩으로도 몰리고… 이런저런 오해를 많이 받으셨어요.
“기분이 좋아.”
―왜요?
“채찍질해주니까. 자만심을 없애주니까.”
―본심을 몰라주면 원망스럽잖아요.
“그런 것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다 풀린다.”
언젠가, 다, 풀린다. 어쩐지 그의 말은 체념이 아닌 인내의 주술로 다가왔다. 그가 상처를 품듯이 반대로 그도 누군가를 아프게 했음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역사의 고비마다 나타나서 어려운 사람을 도운 뒤 홀연히 사라졌던 김용현씨. 그는 지난달 24일 <한겨레>와 인터뷰하던 중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인혁당 피해자, 이명박 정권 때 스스로 삶을 끝낸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얘기 등을 할 때면 “허어억”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제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노무현 선배한테 홍당무를 줬어”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미안한 사람이 혹시 있으세요?
“어. 노무현, 노무현 선배님. 허어어어억. (또 한 번 그의 입이 검은 구멍처럼 벌어지고 소리 울음이 쏟아진다) 억울해애애…. (한참 운다) 그리고 6월항쟁 때 명동성당에서 끌려가서 두드려 맞고 정신병자 된 사람 많아. 마음이 아파.”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봉하마을 가셨어요?
“봉화치에서 봉하마을까지 걸어서 갔어요.”
―그 먼 길을(367㎞다). 얼마나 걸리셨어요?
“12일 정도”
―아, 세상에….
“눈물을 같이 흘리면서 가고 싶어서. 묵주 굴리고, 염주 끼고 갔어.”
―서거 소식에 너무 놀라셨을 거 같아요.
“검사 새끼들이 잘못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노무현 대통령과 추억이 있으세요?
“부산역 앞에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이 있었어. 유가협 어머니들이랑 같이 갔어. 얼마나 인간적인지. 이야, 다른 사람 나가라고 하고 어머니들 얘기 직접 앉아서 혈서를 쓰듯이 한 자 한 자 다 받아적고. 이야, 꼬르륵 소리가 나. 내가 주머닛돈이 있으면 가서 막걸리하고 호떡하고 사서 주고 싶어. 선배님이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안 먹고 일해. 마음이 아파. 돈이 없어서 대신 배낭에 홍당무가 있어서 줬어.(웃음)”
87년 6월15일 명동성당 시위대가 해산돼 구심점 사라지고 시위대는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 가톨릭회관 꼭대기에서 6월29일에 마지막 시위를 했는데 요한은 그 자리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이 있었다.
“그때 노무현 변호사가 김승훈 신부님 앞으로 보낼 종이 한 장 줬어. ‘부산의 민주화 열기를 서울에서 이어주십시오. 노무현 드림.’ 그걸 말아서 주머니에 넣고 홍제동 성당 신부님한테 가져갔어. 노무현 선배님은 정말 인간적이고 착한 사람이야.”
학벌주의로 견고하게 짜인 한국 사회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할 때 그가 본 것은 무엇일까. 근래 병실에서 쓴 투병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소생은 자연 시인이고자 한다. 연초록 평화주의자다. 불평등, 출신, 학력, 종교 차별 등을 거부한다. 특히 고교 동창, 대학 졸업장을 적폐 청산으로 본다. ― ‘자연인 선언’ 중” “유명대학 출신자는 중증장애인 돌봄에 하루 4시간, 3년간 성실히 봉사한다. 최저임금에 큰 일꾼이신 요양보호사 어머님에게 최대한 널리 대우한다. 성직자와 승려는 고교부터 개방하여 인간미 넘치는 젊은이를 널리 받아들인다 ― ‘김씨돌법’ 중.”
<에스비에스(SBS) 스페셜>을 통해 오랜 선행이 알려졌던 요한, 씨돌, 김용현씨(왼쪽)가 지난달 24일 오후 충북 제천시의 한 병원 야외 공원에서 은유 작가(오른쪽), 이큰별 에스비에스 피디(가운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각각 흩어진 요한, 씨돌, 용현의 존재를 꿰어 세상에 알린 이큰별 피디는 이날 인터뷰에서 언어장애가 있는 김용현씨의 동시통역사 역을 맡아 한마디 한마디를 옮겼다. 제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현실을 외면 않는 자연주의자
씨돌의 산중 생활은 세속과의 단절이 아닌 이동일 뿐이었다. 그가 외친 민주주의는 6월 광장에서 종료되지 않았다. 봉화치에서 우체부에게 신문을 받아보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예의주시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할 수 있는 걸 행하고 보이는 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났을 때는 농기구 짊어지고 달려가 시민구조대로 활동했다. 당시 구조 영상에는 “산소호흡기! 산소호흡기 가져와!” 하는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남아 있다. 그는 스물두 살 이아무개씨를 극적으로 구출했다.
―그때 기자들이 선생님을 인터뷰하려고 하니까 “난 괜찮다”며 가셨어요.
“그 아가씨를 파란 담요를 덮어서 끌고 나왔는데 그때 전세계 기자들이 다 왔어. (생존자가 캄캄한 데 있다가 나와서 빛을 보면 안 되니까) 얼굴 사진을 찍지 말라고 제가 말했는데, 기억이
생생한 게 한 방송사 기자가 담요를 벗겨서 사진을 찍었어. 아가씨가 손을 발발발 떨더라고. 저 죽일 놈들. 제가 땅을 치고 눈물을 흘렸어요. 그 이후로 사진 찍는 사람은 다 거짓말한다고 생각해. 내 마음에 원한을 샀어. 그 구조된 사람이 이틀 후 죽었어.”
바람처럼 사라졌다 돌아온 씨돌. 봉화치로 돌아온 그는 이웃들에게 자신이 어디서 무얼 하고 왔는지 알리지 않았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 게 그에겐 중요했다. 언론사와 서울특별시 소방본부장에게 직접 항의 편지를 썼다.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고 소방본부장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김용현 앞으로 회신을 보내왔다.
그런 그가 정선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음은 당연지사. 농가에서 토종벌 폐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초지종을 조사하고 피해 내용과 탄원서를 작성해 지자체와 관계 기관 측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발 벗고 나섰다. 어느 해인가는 작은 사찰을 지나다가 스님에게 부탁해 음력 7월15일 백중에 망자들의 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행사에다 고 박종철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자신을 민주주의에 크게 눈뜨게 해준 존재, 알게 된 뒤로는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이름이다.
그렇게 자비의 우물처럼 제시간, 품, 노동 다 퍼주던 이웃, 영원히 건재할 것 같던 그가 2016년 산속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뇌출혈로 인해 더 이상 지게 지고 물물교환과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작년에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신부님과 수녀님의 도움으로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방송 이후 전국에서 답지한 후원금으로 이제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중이다. 오전에는 재활 치료를 하고 오후에는 책과 신문을 보거나 왼손으로 힘겹게 글을 쓰며 지낸다. 봉화치에서 긴긴밤 그랬듯이. 그때처럼 혼자는 아니다. 돌봄의 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방송을 만들다가 삶을 배워버린 이큰별 피디가 그의 입이 되고, 성당 교우인 정광수씨는 24시간 그의 손발이 되어 아무런 대가 없이 용현의 곁을 지킨다. 씨돌이 그랬고 요한이 그랬듯이.
―세월호 사건 일어났을 때 선생님이 얼마나 달려가고 싶었을까 생각했어요.
“아이고, 말도 못 하지. 몸이 안 아팠으면 가고 싶었어. 수능시험 끝나고 정선 가리왕산에 와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린 학생들을 많이 봤어. 세월호 학생들 보면서 그 생각도 났고. 그 학생들 떨어지면 꽃이 돼.”
―학생들이 산에서 투신을 하는 거예요?
“약을 먹기도 하고. 주민등록증을 보면 거의 서울 학생이야. 대통령들이 학력 차별, 빈부 격차 못 없앴어. 가슴이 아파.”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어떻게 해주어야 좋을까요?
“요즘은 열두 살만 돼도 아이들이 참 똑똑해. 학원 보내지 말고, 북돋워주고.”
―선생님은 어릴 때 뭐하면서 지내셨어요? 영향받은 것이 궁금해요.
“어린이마을에 책이 있었어요.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나이팅게일, 아라비안나이트, 레미제라블, 닥터 지바고, 서유기. 책 보는 게 너무 좋았어. 어린이마을 설립자 이프란체스카, 하마리아 여사가 영어, 독어 알려주고. 중요한 건 대구 어머니(
최해연 여사)가 나를 논농사 밭농사 짓는 거 흙일을 가르쳤어. 중학교 때 돼지도 키우고 자립정신, 검소함을 배웠어.”
―어머니의 양육 방식이 마음의 힘을 단단하게 길러줬네요.
“고아라고 밖에 나가서 맞았을 때 울분이 올라왔는데, 흙 만지고 일하면 그게 다 씻기고 사과 따 먹고 나면 인류애, 인류애가 생겨.”
―선생님에게 ‘왜 평생 남을 위한 삶 사셨냐’고 물었을 때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했는데, 그걸 대부분은 못 하고 살아요.
“아닌데… 다 하는 거고, 나는 요만큼 한 거예요.”
―선생님처럼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내가 거지같이 사는 거야. 언젠가 산에 갔는데 절 입구에 스님이 붓글씨로 ‘알음알이(세속적 지식)를 버려야 오히려 맑아지고 빛을 발한다’는 글을 적어놨어. 알음알이를 버리는 게 최고. 배운 사람들이 하는 거 다 사기야.”
―안다고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게 아니라는 거죠.
“측은지심이 중요해. 신천지는 개천지. 종교가 기생충. 종교가 다 거짓말해.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 도둑놈들.”
―새해 인사 영상에서 남자들 뒤로 빠지고 여자들이 존중받고 우선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여자들이 최고다 하셨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틀린 말이야. 닭이 먼저. 지금까지 2천년 동안 남자가 지배해서 여자가 뒤로 와 있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전쟁을 만들었어. 그래서 수녀님들, 비구니 스님들, 특히 아마존 쪽에 ‘농토는 농민들에게’ 돌려주라고 생태운동하는 분들 전부 다 여성들. 여성이 더 앞장서야 돼요.”
이큰별 에스비에스(SBS) 피디 등이 김용현씨의 삶을 기록한 책. 가나출판사 제공
“기뻐, 기뻐, 항상 기뻐”
―선생님 자신을 위해서는 뭘 하고 싶으세요.
“지리산 쪽에 아는 분 있으면 오두막 소개해줘요. 지리산에서 고백론 쓰고 싶어. 반성문.”
―씨돌의 고백론. 뭐 반성하시려고요?
“어릴 때 개고기 먹은 거. 농사지을 때 소 때린 거. 돼지 잡아먹은 거. 개구리 구워 먹은 거.”
―지금 채식하세요?
“채식 많이 했는데, 병원에 있으니까 고기가 나와. 멸치도 나오고.”
―다시 태어나도 씨돌, 요한, 용현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고개를 젓는다) 알려지는 거 싫어. 소리 없이 죽은 억울한 친구들, 여학생들, 그 사람들 말고 내가 앞에 있는 거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 미안해.”
―그럼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이끼가 되고 싶어. 밑거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 정선에서 사람들 장례 치르고 이장을 많이 했어.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가. 너그럽게 산 사람들이 죽어서도 미소 짓고 있어.”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이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커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두려움은 없어. 제일 중요한 건 쓰레기, 핵폐기물 그런 것들이 세계를 오염시켜. 죽는 건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꽃이 되니까 헛산 건 아니야. 열매도 되고 나무도 되니까. 기뻐, 기뻐, 항상 기뻐.”
항상 기쁘다는 말에 불현듯 “너무 슬퍼하지 마라”는 말이 떠오른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던 노무현 대통령 유서가, 깨어 있는 시민 김용현의 일관된 생을 통해 이해되는 듯하다. 자연의 순환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높은 자리에 올랐던 권력자의 말이 아니라 고개 숙여 흙 만지고 살았던 농부의 말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산책 겸 사진 촬영을 위해 병원 마당으로 나가는 길에 그가 파란색 스웨터를 걸쳤다. 색이 곱다고 말하자
“도라지꽃 색깔” 한다. 땅에 버린 도라지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는, 자연이 베푸는 기적에 반해 씨돌이 된 사람. 한국 민주주의 역사 뒤뜰에 떨궈진 요한이라는 씨앗이 도라지꽃으로 피어나 세상에 향기를 전한다. 측은지심을 잃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끌어올린 용현의 씨앗은 또 어디로 얼마나 멀리 날아갈 것인가.
■ 후원 계좌 안내 신한은행 100-033-687880(김씨돌 후원회)
▶은유: 글 쓰는 사람. 글쓰기 수업도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을 펴냈다. 2005년부터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고 인터뷰를 해왔다. 성폭력 피해 여성, 국가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산재 노동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나고 기록했다. 사람을 살게 하는 말을 모으고 나누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 ‘은유의 연결’은 4주에 1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