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 양천구 행복한백화점에서 열린 마스크 긴급 노마진 판매 행사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다음주부터 마스크를 출생연도에 따라 요일별로 1인당 1주일에 2장으로 구매를 제한하는 ‘5부제’가 시행된다. ‘마스크 대란’이 벌어진 탓이다. 대중교통 안이면 모를까, 길을 걷거나 집에 있을 때는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는데 왜 지침이 통하지 않고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것일까.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2020년 현재 코로나19 사태를 관통하는 원리로 각자도생을 꼽았다. 스스로 힘을 키워 살아남아야 하는 이 세계에서 감염병 위기는 불평등을 강화한다며 그는 사회적 능력을 축적하고 미래를 같이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무심코 지하철을 탔다가 아차 싶어 얼른 마스크를 꺼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똑같이 마스크를 쓴 광경에 나도 모르게 압도된 모양이다. 돌아보니 노약자석에 반쯤 기대 잠든, 아마도 노숙인일 것 같은 사람만 민얼굴. 마스크를 꺼내 쓴 뒤에야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방역당국이 말하는 마스크의 과학은 새삼스럽다. 의료기관 종사자, 호흡기 질환이 있는 환자, 대면 작업이 많은 실내 근무자 등을 빼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사람이 많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이면 또 모를까, 길거리를 걷거나 혼자 운전하는 사람, 더구나 집에서는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다.
코로나19를 관통하는 완강한 원리
권위가 있을 법한 지침이 그저 잘 통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대란’이라니, 과학과 근거는 실패하는 중이다. 나는 마스크가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화된 것이 핵심 이유라 생각한다. 첫째로, 마스크는 ‘선량한 시민’임을 증명하는 눈에 보이는 표시이자 시민적 윤리의 증명이다. 그 효과는 둘째 치고 시민참여형 방역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불확실한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는 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뭐든 해보기 마련인 사람에게는 삶의 ‘능력’을 포기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이 능력은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이 제안한 개념이다).
능력은 능력이되 각자도생의 노력, 그런 뜻에서 최소한의 소극적 능력이라는 점이 못내 걸린다. 작은 가게에서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가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권고를 따를 방법이 있을까. 그러지 못하니 마스크로 대신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리라. 이렇게 해서 개인은 능력을 실천하고 공동체는 확산 방지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런 사회적 결과조차 개인에게 의존하는 사태는 비극적이다.
마스크만 그럴까, 각자도생은 코로나19 사태를 관통하는 완강한 원리처럼 보인다. 사실상 강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진작 동의했고 이젠 내면화했다. 개인정보 문제는 온데간데없는 철저한 동선 추적과 과학적이지도 실용적이지도 않은 발본색원의 전수조사라는 강박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모조리 금지, 봉쇄, 휴업, 폐쇄, 휴교하는 것이 유일한 안전이라는 믿음은 왜 생겼을까?
국가와 사회, 또는 우리가 몸담은 공동체가 바이러스와 감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한다면, 아니 그렇다고 믿을 수 있으면 누가 이렇게 힘든 인지 노동을 부담할까 싶다. 보건당국이 의심자는 잘 파악해서 조치했을 것이고, 위험한 장소는 공공과 민간이 협력해서 이미 마무리를 했으리라 신뢰한다면? 완벽하게 자신을 격리하려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개학을 연기하고 공공기관을 닫는 것도 각자도생의 원리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이야 사회적 거리 두기의 한 방법이라고 하지만, 그 전부터 확진자나 의심자가 생기면 각자 지역사회와 가정으로 흩어지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안전을 도모했으나 막상 그다음은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 개인화의 함정이다. 타자를 가시권에서 지우면 우리는 더 안전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예방과 치료는 말할 것도 없이 생계조차 각자 책임으로 돌아간다. 차별, 배제, 책임 묻기의 경계선 또한 개인으로 접근한다.
지난달 27일 경북 청도대남병원에서 서울 국립정신건강센터로 이동하는 환자 이송 버스 안에서 한 의료진이 커튼을 치고 있다. 연합뉴스
분투하는 개인에게 의존하는 사회
‘개인화’가 방역을 조직하는 중심 원리가 되었지만 그건 각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가 아니다.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피난’하는 것은 공동체를 믿기 어려울 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동이다. 미국처럼 코로나 확진 검사에 100만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코로나가 마무리되는 대로 맞춤형 민간보험이 쏟아지고 많은 사람이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불안을 이기려 할 것이다.
감염병에 대응하는 사회적, 집단적 능력은 ‘공동재’(common goods)라는 것이 정설이다. 공중위생, 응급의료, 재난대응, 건강보장 등 다른 공동재도 그렇듯, 공유하는 기반이 약하면 사회적 재난조차 대응의 책임은 개인에게 분산된다. 공동체가 같이 투자하고 유지해야 할 공동재를 상당 부분 개인별 자산으로 바꿔놓은 체제, 그것이 감염병 유행에 반응하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이다.
공포에 사로잡히는 이유도 생활세계의 원리, 그리고 그 심층 구조로서의 사회경제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조건반사처럼 불안이 개인을 압박할 때, 바이러스나 질병, 죽음이 무섭기도 하려니와 어떤 사람은 사회적 삶이 파탄 나는 것이 더 두렵지 않을까. 가게를 닫거나 일용직 자리를 잃는 것이 ‘사회적 죽음’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건강보험도 있고 보건소도 있는데, 이 병에 걸려 입원한다고 파산할 일은 없는데 거창하게 사회적 삶을 들먹인다고 타박할지 모르겠다. 맞다, 지금도 안전망은 존재한다. 건강보험이 있고, 긴급생계비 지원이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갖가지 긴급돌봄도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게 그냥 한가지 망일 뿐이라는 점이다. 안전망이란 무릇 최악의 결과를 막을 뿐, 벗어나 ‘정상’ 회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다들 확진과 치료만 말하지만 실은 감염 그 뒤와 경계선 바깥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깨진 일과 직장, 가게와 돈벌이, 흐트러진 갖가지 돌봄을 회복하려면 필시 길고 고단한 과정을 견뎌야 할 터, 총체적 삶의 어느 국면에서든 공동재가 빈약할수록 불안과 공포가 더 커진다. 작은 위험으로도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과도 같이 차별받고 배제될 것이라 느끼면, 모든 걸 혼자 견뎌야 한다고 판단하면, 다름 아닌 내가 결사적으로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각자도생의 원리를 결국 내면화하는 과정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점이 더 뼈아프다.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것처럼 각자 알아서 몸과 마음을 채비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다른 도리가 없으니.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면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더 지나면 본래 이게 옳다고 옹호하게 된다. 각자도생은 ‘제도’로 굳어지고, 세상은 이렇게 또 아무 일 없는 듯 돌아갈 것이다.
코로나가 드러낸 비참과 고통
각자도생으로도 행복하기만 하면 굳이 시비할 필요가 없을 터. 스스로 경영하고 힘을 키워 살아남아야 하는 세계는 반드시 더 불평등하니 그게 고통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각자 타고난 바와 사는 조건이 다른데 어느 순간 어떤 결과도 평등하기 어렵다. 공공의 토대가 허약할수록 격차는 더 벌어지는 법, 익숙한 말을 바꾸면 안전망보다 안전 인프라가 관건이다.
토대, 체제, 구조가 발원지면 코로나19를 비롯한 감염병 또한 불평등을 피할 수 없다. 누가 더 많이 감염되고 더 중증인가, 어느 계층이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나, 후유증과 장애가 더 많이 남는 집단은 어떤 쪽인가. 찬찬히 따져볼 일이긴 하나 지금 예측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계층, 교육 수준, 지역, 고용 상태는 피하기 어려운 불평등의 경계선이니 이 역병 또한 거듭 검증된 법칙을 따르리라.
감염병의 특수성, 특히 병이 집단으로 발생하면서 빠르게 진행하면 불평등은 복합적이면서도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모두가 알고 예상했던 것이나 청도대남병원 사건은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다. 질병, 정신장애, 취약한 의료와 돌봄, 차별과 배제, 간접적으로는 가난이라는 갖가지 조건이 겹치고 서로 부추겨 가장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남 일이 아니라 공동재의 문제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것 한가지, 나와 내 가족은 언제고 그럴 일이 없다 자신할 수 있을까?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는 재난 상황에서는 고통스러운 불평등이 또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사태가 더 심각해지면 누군가 이들을 포기하자고 할까 두려웠다. 의료진이 모자라고 다른 지역 병원으로 환자를 옮기기도 어려운 조건, 본래 정신질환이 있는데다 허약한 사람들, 다른 곳에서도 환자가 넘치고 여유가 없을 때 흔히 우선순위에 따라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자는 논리가 지배한다.
좋게 말해 선택과 집중이요, 최악으로는 일부를 ‘버리는’ 사태가 닥칠 수도 있다. 막다른 현실을 두고 다른 대안도 마땅치 않은 곤경에 처하면 딜레마가 더 크다. 유전자처럼 속에 박힌 효율성 논리가 호출되기 십상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마음속 어렴풋하게나마 또는 무의식에라도 지배 이데올로기의 싹조차 없었을까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또한 차별과 혐오는 신종 감염병이 발생하고 유행할 때 드러나는 불평등의 한가지 특수한 양상 또는 원인이다. 지역, 계급, 질병 또는 특정 종교와 관계가 있는 정체성도 위험하지만, 지금은 당장 국적, 민족, 인종을 둘러싼 불안한 기운이 가장 걱정스럽다. 저 시끄러운 중국 문제가 이에 해당하는데, 한국에서는 몰라도 세계적 기준으로는 분명 인종주의로 발전할 씨앗을 품고 있어서다(이미 ‘주의’가 되었다고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합리적 근거 없이 특정 종족이나 국가에 대해 편견과 차별, 반감을 사회화하는 것이 인종주의의 한 요소다. 하자면 중국 경유자 전체를 금지하는 것이 그나마 과학이겠으나 ‘중국’만 거론할 뿐 그 많은 한국인 입국자나 다른 외국인 입국자를 (비과학적으로) 소거하는 것을 편견과 차별 외에 무엇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국제기구의 권고도 무시한 채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질병 이름을 고집하는 한 언론을 뒷받침하는 힘은 무엇인가.
‘가진 자가 더 갖는’ 또 한가지 불평등의 법칙은 위기에도 멈추지 않는다. 나오미 클라인은 ‘재난 자본주의’가 작동해 그렇다고 설득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저 유명한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에게서 빌려온다. “실제이든 아니면 인식이든 간에 오직 위기만이 진짜 변화를 만들어낸다. 위기가 발생하면 이제껏 밀려났던 사상에 근거한 조치가 취해진다. 또한 과거엔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던 일이 오히려 불가피해진다”(클라인이 쓴 <쇼크 독트린>에서 인용). 재난으로 위기가 오고 공포와 무질서가 덮치면 경제적 강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쇼크 요법’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밀어붙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와중에 한국에서 벌어지는 운동들, 특히 자본과 대기업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비상조치들은 재난 자본주의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탄력근무제를 포함해 주 52시간 상한제를 완화하는 것은 일부 분야에 잠시 필요하다 이해하더라도, 화학물질 규제 법률의 개정, 신약 임상시험의 규제 완화, 원격의료 전면 허용은 그야말로 뜬금없다. 재난을 명분으로 불가능했던 일을 불가피한 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으니, 그리하여 불평등의 간격은 한층 더 벌어질 것이다.
‘질병 X’라 할 만큼 새 감염병 반복
기후위기와 같은 차원의 도전으로
감염병 발생·유행 조건 바꾸는
새 사회계약 국가·지역에서 맺어야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이 기자회견을 열어 청도대남병원 등 폐쇄병동 코로나19 확진 환자에 대한 차별 없는 치료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새로운 사회계약의 기회
위기는 기회까지 동반한다는 말에 일부 동의하지만, 이 위기가 신자유주의 ‘감염병 레짐’을 해체하는 계기가 될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낙관보다는 비관에 가깝다. 돌아보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창일 때 정부를 비롯해 모두가 무엇이든 바꿀 기세였으나 기회의 창은 금방 닫혔다. 개혁이 필요해도 개선에 머물렀고, 어떤 실패는 체제가 원인이었으나 건드리지도 못했다. 정권과도 무관한 그 역사가 그대로 반복되지 않을까?
희망을 정의하기에 앞서 한 사회가 보이는 종합적 능력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확인하자. 하루아침에 축적할 수 없으며 생략과 비약도 어림없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그리고 스스로 한 주체인 이 모든 대응은 공동체 전체의 축적이고 역사다.
‘준비론’으로 환원하자는 의도는 아니다. 준비론으로 치면 당장 이 글부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탁상의 고담준론으로 치부될 판이다. 준비론이 절반의 진실이라면, 현재가 미래를 규정한다는 것이 내가 믿는 나머지 반의 진실이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오는 6~7월 사회적 상상과 비전이 달라질 테니, 이는 또한 현재형 실천이다.
실천의 조건은 코로나19의 본질을 포함한다. 신종 감염병 유행은 계속 발생할 것이며, 외부에서 들어올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새롭다, 신종이다, 외래 질병이다 등보다 더 큰 위협은 그것이 무엇일지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세계보건기구(WHO)가 ‘질병 엑스’(disease X)라고 부를까? 불확실한 미지의 위협, 그 자체가 가장 위험하고 불안하다.
비슷한 유행을 되풀이하리라 예상하는 근거는 이런 질병들이 생성부터 구조적이고 체제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감염병 가운데 ‘인수공통감염’이 60%를 넘는다고 한다(코로나19도 이에 속한다). ‘인’과 ‘수’(獸), 즉 사람, 동물, 그 상호작용의 변화까지 발병과 유행의 원인이니, 이는 곧 생태계, 즉 인간 사회와 문명 전반을 포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밀림을 없애 농경지나 축산 시설을 확대하면 사람과 동물의 접촉이 급증하고, 동물에 있던 병원체가 새로운 환경에서 사람으로 옮겨온다. 이 과정에서 갖가지 변이와 연쇄반응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나는 이 때문에 신종 감염병이 기후위기와 같은 차원의 도전이라고 주장한다. 거창하게 새로운 ‘사회계약’을 거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은 일부 의미가 있겠으나 대체로 사후약방문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인플루엔자 백신을 떠올리지만 에볼라는 일부 지역에만 유행하고 메르스는 언제 어디서 다시 올지 모른다. 더구나 ‘질병 엑스’라고 하지 않는가. 확실히 아는 것이 없는데 딱 맞추어 백신이나 치료제를 준비하자는 소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에너지 전환이나 탄소세만으로 기후위기를 되돌릴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 신종 감염병 발생과 유행 조건을 통째 바꾸지 않으면 위기를 되풀이할 것이라는 의견을 보탠다.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한 이유는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평시 인천공항에만 하루 평균 3만5천명의 중국인이 입국하던 상호관계, 이는 관광 정도가 아니라 국제적 상호의존성과 국제적 분업체계를 상징한다. 두 나라만의 일도 아닌 이 견고한 체제를 바꾸지 않고는 국경을 넘나드는 전파와 확산 문제를 풀 수 없다.
현실의 실용이 다급한 이 시기, 신종 감염병에 대응하는 좀 더 구체적인 사회적 ‘능력’을 동원하고 미래 또한 같이 준비해야 한다. 국가 또는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 새 사회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 핵심이나, 처방이라기보다 제안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환자가 급증한 일부 지역에서 병상이 부족한 현실은 함께 깨달은 그대로지만, 내가 본 것은 전체 숫자가 모자라는 것 이상으로 조정과 협력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병원에 환자를 보내기가 그렇게 어렵고 다른 지역 공공병원에 병상을 얻는 데는 누군가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할 정도다. 중앙과 지방, 공공과 민간, 예방과 치료, 대구와 서울이 모두 따로 돌아간다. 단언하지만 개별 행위자가 문제라기보다 공적 목표 달성을 위해 같이 돌아가야 할 시스템이 부재하거나 부실한 탓이다. ‘약한 공공성’이 핵심 문제라 해야 한다.
인력, 시설, 재정, 법과 행정, 관리와 리더십 등을 포함하는 공공시스템 전체를 강화하자는 이유다. 질병관리본부를 청으로 해도 사람과 예산이 충분하지 않으면, 그래 놓고도 실력이 과거 그대로면 시스템은 더 나아졌다고 하기 어렵다. 전담 병원을 신설해도 사람과 재정이 부족하거나 평시 기능이 확립되지 않으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다. 이 모두를 모으고 모아 새로운 사회계약을 제안한다. ‘공공보건의료 국가책임제’는 어떨까?
이 국가책임제는 당장은 서울의 교통에서 지하철이 맡은 역할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40%쯤 되는 교통 분담률, 대부분 부담할 수 있는 어지간한 가격, 접근성이 바로 교통(이동)의 공공성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제시간에 다닌다는 그 공적 ‘보장성’이 더 중요하다. 감염병 유행이라는 재난 상황이야말로 공공이 안전을 보장해야 할 때이니 병원과 보건소, 사람, 돈, 이를 뒷받침하는 법과 행정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책임을 도맡아야 한다.
다시 좋은 의미의 정치로
한가지 계약이 더 있다. 국가와 정부만으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으며,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독점적 지위를 누릴 때도 자본과 기업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거리 두기 한가지를 실천하려 해도 생계를 유지하고 애를 대신 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스마트폰이 없는 독거노인도 어떻게든 정보를 알고 이해하며 혼자 끼니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공공병원 이상이고 공공보건의료라는 범위도 넘는 과제다. 나로서는 경제사회체제 전반의 공공성을 같이 올리는 방법 말고는 대안적 계약을 찾지 못하겠다. 현재는 임금과 소득은 말할 것도 없고 보육, 돌봄, 교통조차 대부분 시장 논리에 묶여 있지 않는가. 신종 감염병에 대한 실용적 대책으로도 생활과 삶의 모든 차원에서 공공성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기본이 되는 물질적 조건, 즉 경제생활의 공공성을 더 강조하고 싶다. 홍콩이 코로나 대책으로 성인 1인당 약 150만원을 주기로 해 유명해진 ‘재난 기본소득’이 공공성의 한가지 예가 되겠다.
다시 좋은 의미의 정치에 이르렀다. 아무리 사회경제적 공공성을 강조해도 그게 저절로 될 리는 만무하니, 민주주의 강화와 심화라는 기초 과제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이 민주주의를, 종적으로는 개인과 지역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고, 횡적으로는 정치를 넘어 경제, 사회, 문화로 확장되는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김창엽(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