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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흔적 없이 사라졌던, ‘가이리치스러움’이 돌아왔다

등록 2020-02-29 09:20수정 2020-03-02 10:13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젠틀맨>

대마초로 유럽을 장악한 미키
미국 억만장자와 빅딜에 나서
온갖 캐릭터 등장해 물고 물려

‘각 부품이 어떻게 연결돼서
어떤 기능 수행할까’ 편집 묘미
‘왕년’ 가이 리치의 속도감·쾌감
영화 &lt;젠틀맨&gt;은 유럽에서 마리화나 제국을 세운 미키 피어슨(매슈 매코너헤이)이 가족과 여생을 즐기려 사업 처분을 결심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줄거리로 한다. 미키(오른쪽)와 그의 아내 로절린드(미셸 도커리)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영화 데이터베이스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영화 <젠틀맨>은 유럽에서 마리화나 제국을 세운 미키 피어슨(매슈 매코너헤이)이 가족과 여생을 즐기려 사업 처분을 결심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줄거리로 한다. 미키(오른쪽)와 그의 아내 로절린드(미셸 도커리)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영화 데이터베이스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지난해 박스오피스를 내내 장악했던 디즈니 라인업 중 가장 두드러진 성적을 냈던 <알라딘>. 하지만 이 영화 역시 다른 디즈니(와 그 계열사들)의 실사영화와 다름없이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 감독(가이 리치)의 흔적을 찾으란 말이냐!’라는 불평이 절로 나올 만큼 감독의 개인적 색채를 말끔히 눌러 다림질한 공산품스러운 향취가 가득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맨 프롬 엉클>이나 <킹 아서> 등 최근작을 볼 때 ‘가이 리치 자신이 딱히 가이리치스러움을 추구하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마당에 그런 얘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반박 역시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 대한 나름의 응답인지 아닌지는 알 길 없다. 아무튼 <젠틀맨>은 가이 리치 자신이 공언하듯 <스내치> 이후 떠나 있던 자신의 뿌리로 돌아간 영화다. 그 뿌리란 물론 그가 29살에 내놓았던 첫 장편이자 출세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가 보여준 스타일로 요약될 텐데, ‘가이 리치 스타일’이라는 단어를 확실한 실체로 굳혀줬던 두 번째 장편 <스내치>(2000)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가이 리치의 뿌리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져 있을 것인가. 성장인가, 노화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 어떤 것인가.

일단 모양새로 볼 때 <젠틀맨>은 확실히 뿌리로 돌아가 있다. ①매슈 매코너헤이를 필두로, 휴 그랜트, 콜린 패럴, 찰리 허넘, 그리고 미셸 도커리까지 아우르는 떼스타 캐스팅부터가 그렇거니와, 이들을 한두 장면 슬쩍 출연시킨 다음 포스터에 이름만 얹는 게 아니라 ②모두를 거의 동일한 분량과 비중으로 출연하도록 역할을 안배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특유의 ③블록 조립형 이야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 모두 가이 리치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 특징 그대로다.

이보다 더 그의 왕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른바 범죄 액션 영화라는 장르명으로 요약되는 ‘범죄의 예비와 실행, 그 과정 중 돌발 변수, 그로 인한 예기치 못한 사태 전개와 그에 따른 주인공(들)의 고충과 애로 사항, 그리고 그의 극복’이라는 소재 및 이야기 그 자체인데, 바로 이것이야말로 가이 리치의 뿌리이자 고향이라 할 것이다.

①~⑩번까지 캐릭터 잔치

뭐, 이 영화의 감별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먼저 <젠틀맨>의 줄거리를 가볍게 브리핑해 올리면 다음과 같다.

머리는 좋지만 배경은 없는 우리의 주인공 ‘미키 피어슨’(매슈 매코너헤이)은 영국 명문대에 진학해서는 하라는 공부는 않고 그곳에서 만난 각종 상류층 사람에게 질 좋은 대마초를 팔아가며 밑바닥부터 다지고 올라간 유럽의 대마 제왕이다. 그는 영국의 지리적·역사적·사회적 특성을 활용하여 질 높은 대마를 비밀리에 대량 재배하는 데 성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던 중, 갑자기 가족과 함께 평화로운 여생을 영위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사업 처분을 결심하게 된다.

하여, 영국이 대마를 합법화하기 전까지 10년, 그리고 합법화 이후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을 때까지 또 15년 동안 막대한 수익을 바라볼 수 있는 이 엄청난 사업의 인수를 둘러싸고(그렇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인수합병(M&A)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모든 과정이 어둠의 뒷골목에서 진행된다는 특수성이 있을 뿐) ①미키가 지정한 공식 우선협상자 ‘매슈’(제러미 스트롱)와 ②삼합회의 치고 올라오는 젊은 피 ‘드라이 아이’(헨리 골딩)가 각자 스타일대로 인수 대금 후려치기를 시도하며 각축하는 가운데, ③신문기사를 통해 자신의 사익 실현과 사적 원한 해소를 구현하는 양아치 언론사의 양아치 편집장 ‘빅 데이브’(에디 마산)와 ④그의 사주를 받고 미키의 뒤를 캐는 사립 탐정 ‘플레처’(휴 그랜트) 그리고 ⑤플레처로부터 범죄 영화 시나리오 설명회를 빙자한 공갈·협박과 금품 요구를 받게 되는 미키의 오른팔 ‘레이’(찰리 허넘)가 이 대마 사업 인수 전쟁에 일제히 얽혀들고, 그 복잡다단한 와중에 ⑥아이들에게 존경받는 동네 권투도장(맞다. 이 권투 또한 가이 리치를 따라다니는 키워드 중 하나다) 코치님(콜린 패럴)과 ⑦그의 제자들이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네 아이들 ‘토들러스’(배우들 이름 생략)가 추가 투입되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⑧마약 소굴에 빠진 영국 귀족의 딸과 ⑨그녀 덕분에 이 물고 물림의 도가니탕에 개입하게 된 러시아 재벌 등등까지 모두 한데 짬뽕이 돼 어우러진다. 아 참, 거기에 ⑩미키가 숭배해 마지않는 아내인 ‘로절린드’(미셸 도커리) 또한 이 점입가경 연쇄반응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대충 요약하기만 해도 무려 ⑩번까지 나가는 이 캐릭터들이?

앞서 말씀드렸듯 이 ‘어떻게?’야말로 이 영화, 그리고 가이 리치 스토리텔링의 핵심이자 재미일 것이다. 그와 더불어, 굽이굽이 사건의 골목길들을 돌 때마다 튀어나오는 캐릭터들의 ‘골 때리는’(죄송하다. 하지만 이 표현보다 적합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면모들과, 이 부품들이 대체 이야기의 어디에 어떻게 연결돼서 어떤 기능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것을 궁금하게 만드는 떡밥 투척형 편집은 왕년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에서 익히 즐겼던 가이 리치 영화만의 특징이겠다.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가던 위 두 영화와는 달리 <젠틀맨>은, 레이를 찾아와서 “내가 영화 시나리오를 하나 썼는데 한번 들어봐”라고 설레발 치며 늘어놓는 플레처의 공갈·협박을 영화 전체를 둘러치는 액자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 대목이 나름 꽤 참신하면서도 재미있다. ‘대체 어느 대목에서 협박 포인트가 등장?’이라는 호기심 유발 면에서도 그렇거니와, 2017년 숨은 걸작 <패딩턴2>에서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휴 그랜트의 새로운 이미지와 연기라는 면에서도 그렇다. 더하여, 영화 서두의 영화제작사(미라맥스) 로고와 영화 말미 플레처의 행보가 회로가 이어지듯 마침내 연결되며 순간 촉발되는 코믹함은, 과연 세계적 수준이라 할 가이 리치의 재치와 익살(조크) 능력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할 것이다. 그 밖에 영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코믹 장면들과 더불어 말이다.

미키의 뒤를 캐는 사립 탐정 플레처(휴 그랜트, 오른쪽)가 의자에 앉아 있는 미키의 오른팔 레이(찰리 허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lt;젠틀맨&gt;은 뻔뻔할 정도로 솔직하다. 영화 데이터베이스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미키의 뒤를 캐는 사립 탐정 플레처(휴 그랜트, 오른쪽)가 의자에 앉아 있는 미키의 오른팔 레이(찰리 허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젠틀맨>은 뻔뻔할 정도로 솔직하다. 영화 데이터베이스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부담스러운 초대형 떡밥들

이 영화의 허점을 짚어내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많은 외국 언론이 말하고 있는 ‘왕년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안이하고도 헐렁한 자기 표절’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가이 리치의 스타일을 거의 표절에 가깝게 흉내내고도 언론의 호평을 받았던 다른 많은 영화를 생각하면 더욱.

사실 관객과 벌이는 퍼즐 게임이라는 면에서 이 영화는 적잖은 허점과 편의적 전개들을 함유하고 있다. 예컨대 미키의 막강한(최소한 영화 내내 그래 보였던) 사업 상대 매슈는 막판에 지나치게 허술하게 처신한다. 드라이 아이 역시 그저 겁 없이 날뛸 뿐, 전혀 삼합회의 후계자씩이나 될 만한 카리스마나 자질을 보여주지 못한다. 권투체육관에 다니는 동네 아이들인 토들러스는 막판에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채 결정적 순간, 문제해결사로 ‘갑툭튀’ 한다.(‘데우스 엑스 마키나’? 설마?) 미키가 극비에 부쳐져 있는 사업을 처분하는 방식은, 뛰어난 수완과 두뇌의 소유자치고는 너무 허술하다, 등등 말이다.

여기에 영화가 초입에서 관객들의 호기심 촉발과 유지를 위해 던져놓은 초대형 떡밥의 싸구려 트릭 같은 조잡한 맛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이러한 ‘주인공인데 설마 그럴 리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떡밥은, 이야기에 강한 시동을 걸어주는 효과보다는 이야기의 추력에 대한 주최 쪽의 자신감 결여를 드러내는 역효과만 내기 마련이다. 후반부에 이자가 잔뜩 붙은 대출 만기처럼 찾아오는 떡밥 회수 장면이 안기는 허탈감에 더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젠틀맨>은 충분히 즐길 만하다. 교훈이라 해봐야 ‘잘 달리는 말에서 함부로 내리지 마라’ ‘놀 생각 말고 근면·성실해라, 노동 가능 연령까지’ 정도뿐이겠고, 지고지순한 도덕률 설파는 고사하고 ‘정치적 올바름’의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대사와 설정도 가끔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왕년 가이 리치의 초기작이 보여줬던 영화적 퍼즐 게임의 속도감과 쾌감 재현이라는 목적에 철저하게 집중하고 있고, 그 목적 하나만큼은 충실히 달성해주고 있다. 적어도 수많은 가이 리치 아류들이 달성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충실하고도 확실하게.

그거면 되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이 영화의 뻔뻔할 정도의 솔직함은, ‘점점 심해지는 빈부 격차에 대한 묘사가 세계적인 공감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그 영화가) 세계적으로 천몇백억원이 넘는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란히 함께 내놓는 것보다는 훨씬 말이 돼 보인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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