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패소 후 2주 만에 목숨 끊은 고 이재학 PD 14년 동안 임금 받은 곳은 CJB 청주방송뿐인데 법원 “AD는 대체로 프리랜서… 근로자로 볼 수 없다” 동생 이대로 씨 “패소 후 엉엉 울며 엄마에게 전화해 억울하단 말만 되풀이했던 형… 프리랜서라 불렸지만 실제론 불법 노동 착취당했다”
한겨레TV 갈무리
지난달 22일 고 이재학 씨제이비 청주방송(CJB/이하 청주방송) 피디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에 아홉 번은 가족행사에 빠지던, 말수 적고 무뚝뚝한 그였다. 수화기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 피디는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울음 사이사이엔 억울하단 말만이 튀어나왔다. “억울해, 너무 억울해… ” 그로부터 14일 뒤 그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두 장짜리 유서에는 ‘억울하다’는 표현이 두 차례 적혀 있었다.
그날은 고 이재학 피디가 청주방송을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판결이 나오는 날이었다. 2004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프리랜서 AD(조연출)로 입사해 만 14년을 몸담았던 회사에서 사실상 ‘근로자’로 일했음을 인정해 달라고 낸 소송이다. 그러나 청주지법은 ‘이 피디는 프리랜서이지 청주방송 직원으로 볼 수 없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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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형 별명이 라꾸라꾸(간이침대)였어요. 제사 땐 절만 하고 가버리고, 어머니 환갑여행 땐 일정도 못 마치고 갈 정도로 정말 바빴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바쁠 수 있는지 이해를 못 해서 싸우기도 했어요.” (동생 이대로 씨)
이렇게 정신없이 일했던 이 피디가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건 2018년 4월. 자신을 비롯한 조연출 •작가의 임금을 올리고 최소 제작 인원을 확보해 달라고 사측에 요구한 직후였다. 당시 이 피디는 회당 40만원을 받고 1주일에 1회 <아름다운 충북>을 연출했는데, 이 금액은 그가 처음 이 프로그램 연출을 맡았던 2011년부터 8년째 그대로였다. 이 피디와 함께 일하는 조연출과 작가 등 다른 방송 스태프 임금도 회당 20만∼35만원 선에 책정돼 한 달을 일해도 최저임금을 받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입사 후 처음으로 꺼낸 ‘돈’ 얘기였지만 돌아온 건 하차 통보였다. 동생 이대로 씨는 “이 말을 하자마자 형은 스태프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럼 너는 일을 그만 하는 걸로 알겠다’라는 말을 들었고, 며칠 만에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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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회사를 떠나고 한 달 뒤 이 피디는 방송계 갑질119에 제보 메일을 보냈다. ‘쉬운 말로 괘씸죄에 걸려들었습니다. ‘감히 프리랜서가 금액을 얘기해’라는 묘한 분위기가 간부들 사이에 흐르더군요. (중략) 정말 다른 곳 안 보고 제 직장처럼 그렇게 일해 왔습니다. (중략) 제 다음 생에 후배들은 정규직, 비정규직 설움을 못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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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연을 접한 방송계 갑질119의 법률 스태프인 이용우 변호사가 그를 도왔다. 변호사 선임 계약서엔 이런 문구가 적혔다. ‘소송이 아무리 길어져도 후배를 위해 청주방송과 어떤 합의도 하지 않고 계속 가겠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고용형태는 ‘프리랜서’였지만 사실상 청주방송의 정규직 직원과 다름없이 일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두 사람은 착실히 증거를 모았다. 14년 치 과세정보는 주요한 자료였다. 이 기간에 이 피디가 임금을 받은 곳은 오직 청주방송뿐이었고, 이거면 근로자성 판단의 주요 기준인 ’종속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봤다.
14년 동안 모아둔 사과박스 한 상자 반 분량의 문서도 꼼꼼히 뒤졌다. 회사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내면 근로자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회사 내부 문서에는 형 이름이 들어가 있어도 대외적인 서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그 와중에 실수로 형 이름이 들어간 문서가 몇 개 있었어요. 프로그램 계획서나 지자체 보조금 사업 관련 문서에는 형이 작성한 문서에 팀장, 국장이 사인까지 했고요. 하지만 법원에서 이 자료는 인정되지 않았어요. ”
더불어 이 피디가 사실상 정규직처럼 일했고, 임금인상을 요구한 직후 부당해고를 당했다는 동료 피디 세 명의 진술서도 확보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한 명은 진술을 번복했다. 이대로 씨는 “친한 동료였는데, 회사의 회유와 압박에 못 이겨 ‘실수로 썼다’는 취지로 진술을 바꿨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 형이 많이 속상해했던 거 같아요.”
이 피디가 회심의 증거로 여겼던 노무컨설팅 자료도 법원에 제출되지 않았다. “고인이 해고되기 전인 2017년, 청주방송이 노무법인에 의뢰해 비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근로자성을 따져봤는데, 고인 포함 세 명의 프리랜서 피디가 근로자로 인정된다는 검토 결과가 나왔어요. 법원은 이 자료를 제출하라고 명령했지만, 회사는 끝내 이 자료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용우 변호사) 결국 청주지법은 “이재학 피디는 정규직 채용 과정을 겪지 않고 프리랜서 AD로 입사했고 AD는 정규직이 아니라 프리랜서가 맡는 게 일반적이며, 회사로부터 지휘·감독을 일정 부분 받은 사실이 인정되나 프로그램을 넘어 지속적으로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이 피디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는 판결 당일 바로 항소했지만 지난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왜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라고 적혀 있었다. “이 피디가 판결문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14년 동안 몸으로 증명했던 근무실태를 (사측이) 정반대로 꼬아서 내고, 판결마저도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고 있으니까요. ”(이용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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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디가 끝내지 못한 싸움은 동생 이대로 씨가 이어가고 있다. 유가족과 청주방송 노조, 사측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형의 명예회복과 보상,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과 사내 징계, 비정규직 프리랜서에 대한 실질적 대책을 요구할 예정이다. 그러나 진상조사위는 시작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유족이 요구한 1) 노무컨설팅 자료 공개 2) 가해자 두 명 대기발령을 청주방송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주방송 관계자는 “(해당 자료는) 회사 내부에도 없고, 노무 컨설턴트 쪽에도 얘기했는데 없다고 해서 제출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해당 노무컨설팅을 진행한 노무법인 유앤 측은 “청주방송으로부터 자료를 달라는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한 노무사는 “공인노무사법은 컨설팅 자료를 3년 보존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했다. 현재 유족이 지목한 가해자 두 명은 대기발령 대신 보직해임 처분을 받아 평소와 같이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청주방송은 지난 17일 도의적 책임을 지고 모든 국장이 보직을 사퇴했고, 진상조사가 선행되면 그 결과를 토대로 추가 징계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프리랜서’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대로 씨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랜서라는 명칭은 진짜 다신 듣고 싶지 않아요. 형은 프리랜서라는 명목하에 불법 노동 착취를 당한 거라고 봐요. 형은 단순히 임금 문제로 싸운 게 아니었어요. 청주방송이 자행했던 부조리와 위법 행위를 법정에서 (고발하고) , 이기면 후배들 처우가 분명히 바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웠던 거예요. 그렇지만 솔직히 아직은 … 형의 오지랖이 원망스러워요.”
취재 최윤아 기자 ah@hani.co.kr
연출 김현정 피디 hope021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