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을 이야기할 때 단연 먼저 거론될 특징은 ‘컷 없는 연속영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청각적 체험이 이야기와 맞물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 이유를 잃고 일종의 기술적 스턴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스마일이엔티 제공
<1917>을 이야기할 때 단연 가장 먼저 거론될 특징, 즉 ‘컷 없는 연속영화’ 혹은 ‘원 숏 영화’ 혹은 ‘실시간 영화’라는 특징은, 다들 알고 있다시피 영화사상 최초의 시도는 아니다. 가장 가깝고도 잘 알려진 예인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원 숏’ 영화는 사실, 소형 경량 고화질 카메라와 스테빌라이저(짐벌), 드론과 와이어캠, 정교한 컴퓨터그래픽(CG) 같은 기술들이 없던 20세기에도 실현되었던 시도다. 그 대표적이자 가장 탁월한 예로서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1948년 작 <로프>를 들 수 있겠는데, 35밀리 필름 한 릴이 허용하는 연속촬영시간과 치밀하게 설계되고 활용된 세트와 동선, 그리고 교묘한 편집을 조합해서 만들어진 이 놀라운 실시간 영화는, 사건 전체가 실내, 그것도 한 공간 안에서 진행되었다. 반대로 <1917>의 이야기는 거의 영화 전체가 야외에서, 그것도 극단적인 참호전이 벌어졌던 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 진행된다. 카메라는 참호, 무인지대(no man's land), 포대 진지, 초원, 도시 등 전장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주인공(들)을 줄곧 밀착해 따라간다. 그리고 짐작하셨듯 이런 시도는 수많은 기술적 난제들을 야기시킨다.
한번도 끊어짐 없이 실시간으로
우선 <1917>의 이야기는 이렇다. 1차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던 1917년, 영국군 병사 ‘스코필드’(조지 매케이)는 지휘관의 호출을 받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에 이끌려 별생각 없이 참호의 작전회의실로 간다. 그곳에서 두 병사는 장군(콜린 퍼스)으로부터, 위장 퇴각한 독일군의 함정에 걸려들어 몰살당할 참인 1600여명 규모의 다른 대대에 공격작전 중단 명령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임무에 블레이크가 호출된 이유는, 메시지를 전달할 대대에서 그의 형이 장교로 근무하고 있기 때문.(그렇다면 스코필드는? 그냥 블레이크가 “별생각 없이” 골라서.)
눈치채셨듯 <1917>은 기본적으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매우 흡사한 전쟁 로드무비적 틀을 취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1명 때문에 8명이 목숨을 거는’ <라이언…>과는 달리 <1917>의 주인공(중 한명)에게는 주어진 시간 내에 작전을 수행해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주어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영화에 단순하면서도 효과 빠른 정서적 시동을 걸어준다.
그렇게 두 병사는 무인지대와 버려진 적군 참호와 적군 점령지역을 아우르는 15㎞ 구간을 통과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 카메라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참호 작전실로 향하면서부터 시작되어 거의 멈추지 않고 이동하는 주인공들의 동선을 따른다. 한번의 끊어짐도 없이 ‘실시간’으로.(실제로는 중반에 한번의 단절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기술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 때문이다.)
실제로는 대략 5분에서 20분 사이로 비교적 길게 촬영된 숏들을 정교한 시지와 편집으로 연결한 결과물인 이 ‘원 숏’ 전략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 영화가 시지가 개입할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주인공과 카메라는 지면에 파 놓은 일종의 비좁은 복도인 참호를 비집고 지나가면서 그곳에 가득 찬 사람들(다른 병사들)과 부딪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물건들과도 부딪친다. 따라서 주인공들 주변의 인물이나 사물들을 시지로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물론 주연배우 주변의 지형지물과 배경을 모두 시지로 만들어낸 <정글북> 같은 특수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아직은 주연배우가 시지 동물과 접촉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해서 ‘계속해서 이동하는 카메라’와 ‘컷 없는 연속성’은 이 시지 전능의 시대에, 시지가 없던 시절의 전쟁 스펙터클과 그것이 주는 압도감을 재현하려는 영화의 전략에 확고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단적인 예로, 이 영화의 참호 세트 길이는 무려 1.6㎞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실물감 있는 스펙터클에 대한 추구는 비단 참호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는 일견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이 <레버넌트>에서 보였던 ‘실물영화’에 대한 지향을 연상시키고 있는데, 그렇다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제작 과정에서나 비용 면에서나 모두 적잖은 부담을 부르는 이러한 시도가 필요했던 영화적 이유는 무엇인가?
시각적, 기술적 완성도 자체가 주는 놀라움과 쾌감(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그 유명한 로저 디킨스가 아닌가)에 더해, 이 영화의 독특한 형식이 의도하는 바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917>의 ‘원 숏’ 또는 ‘실시간’ 전략은 샘 멘더스 감독 본인이 언급하고 있듯 관객에게 주인공들의 육체적 고난을(또는 전쟁터 자체를) 체험시키는 효과를 가장 주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비록 ‘원 숏’ 영화는 아니지만 카메라와 주연배우가 맺는 관계에서 <1917>과 상당히 유사한 <사울의 아들>이 노렸던 효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은 두 주인공 병사가 소속 부대의 참호 밖으로 나와 무인지대를 가로지르는 초반 25분가량, 대단히 성공적으로 달성되고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는 그것이 보여주는 모든 것을 낭만화시키기 때문에 전쟁 장면을 보여주면서 반전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고 했지만, 팔다리가 자갈처럼 굴러다니고, 흙탕물에 거꾸로 박힌 시체 속에서 팔뚝만한 쥐들이 기어 나오는 등등 전쟁이 만들어낸 지옥도를 적나라한 풍경으로 보여주는 <1917>의 초반 25분여 동안만큼은 최소한 트뤼포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 듯 보인다.
1인칭 컴퓨터게임과 흡사
관건은 그다음이다. ‘새로운’ 시청각적 체험이 주는 놀라움은 대개 그 자체만으로는 30분 이상 효력을 지속하기 어렵다. 이야기와 효과적으로 맞물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 이유를 잃고 일종의 기술적 스턴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들이 무인지대를 지나 독일군 참호 내의 갱도로 진입하는 장면부터 영화는 일순 1인칭 컴퓨터게임과 흡사한 양상을 띤다. 이 스테이지가 ‘클리어’되고 난 뒤에도, 주인공(들)은 계속해서 버려진 진지, 버려진 헛간, 아군의 수송 트럭, 파괴된 다리와 불타는 도시, 급류가 흐르는 강, 고요한 숲 등의 새로운 스테이지들을 마주치게 되고, 덕분에 그러한 양상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 스테이지들을 지날 때마다 주인공(들)은 전투기 파일럿, 카리스마 넘치는 아군 장교 ‘스미스 대위’(마크 스트롱)와 휘하의 부대원들, 저격수, 적군, 민간인 등등을 만나며 ‘미션을 수행’한다. 득템을 하기도 하고, 대미지를 입기도 하고, 힌트를 얻기도 한다. 예컨대 작전 중단 명령을 전달하러 간다는 스코필드의 말에 스미스 대위가 던지는 “누군가는 전쟁을 원하기도 한다”는 의미심장한 암시 같은.
단지 주인공(들)을 내내 따르는 원 숏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1917>을 1인칭 컴퓨터게임에 비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유가 가능한 것은, 이 영화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멘데스 감독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200만 병사 중 특별할 것 없는 두명’이라는 초기 설정에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채, 거의 관객의 전장 체험을 위한(그것도 일종의 시간제한까지 수반한) 아바타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1917>이, 예컨대 <하드코어 헨리>처럼 계속해서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고, 문제를 풀어야만 결말에 도달할 수 있는 게임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도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은 돌발적인 상황들을 만날 때마다 저마다의 선한 의도를 품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 자신이 힘든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는 원동력이 그들의 내부에 있는 ‘의로움’, ‘정의’, ‘올바름’ 같은 가치임을 관객들에게 확인시킨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구체적인 살과 피, 땀과 눈물이 있는 인물로 느껴지기보다는, 영화가 기리고 지지하고자 하는 어떠한 가치의 상징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는 영화 중반, 주인공들에게 닥치는 매우 커다란 변화(스포일러 우려로 상세 내용 생략)로 인해 오히려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겪는 극적인 변화는, 그 엄청난 강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진행 방향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굳이 찾는다면, 결말에서 좀 더 정서적인 색채를 더하는 장면의 추가를 가능하게 하는 정도뿐. <1917>의 주인공이 이러한 평면적인(‘평범한’이 아니다)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자막으로 명시되고 있듯 이 이야기가 감독 할아버지의 경험담에서 영감을 얻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이 후반으로 향할수록 점점 불사신에 가까워지며 영웅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똑같이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영광의 길>에서 커크 더글러스가 부대를 이끌고 무인지대를 전진하는 장면은 전쟁 스펙터클의 기념비적 장면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영광의 길>은 <1917>과는 달리 시선을 스펙터클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으로, 특히 얄팍한 장식 뒤에 숨은 벌거벗은 인간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전쟁의 본질을 통찰해내는 데 성공했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시작이자 끝은 결국 인간인 것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