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검사장급 인사를 놓고 정면 충돌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연합뉴스
‘윤석열 사단’이 해체됐다. 호기롭게 청와대 권력을 겨눈 것도 잠시, 정권의 ‘표적’이 된 검사들은 북악산 기슭에서 날아온 스마트 포탄을 맞고 경향 각지로 날아갔다.
‘조국 수사’가 한창일 때 누군가 말했다. “너무 세. 저렇게 계속 밀고 가다간 결국 피바람이 불 거야. 총장은 임기가 있어서 함부로 내칠 수가 없으니, 대신 손발을 자르겠지.” 이어 말했다. “검찰총장 권한이 엄청나 보이지? 그러나 대통령의 권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이렇게 말한 이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검찰 선배다. 그의 눈에는 ‘조국 수사 이후’가 훤히 보였던 모양이다.
비슷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검찰의 칼끝이 자신들을 겨누면 어떤 정권도 가만있지 않는다. 최근 검찰 고위 간부 인사에서 윤 총장의 ‘손발’이 잘린 뒤 검찰 안팎에선 이름도 생소한 ‘저질연탄 사건’이 새삼스레 소환되고 있다. 무려 40년의 시공을 넘어서다. 기자가 만난 여러 법조인이 연탄 사건을 입에 올렸다. 그런데 그들도 오래 전 일이라 대부분 수박 겉핥기로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곡절이 있기에 이 시기에 그 사건이 호명되는 걸까.
전두환은 검찰에 ‘격려 전화’까지 걸었다
12·12와 5·18 연속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이 1980년 9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임기 7년의 ‘체육관 대통령’으로 뽑힌 지 1년이 된 1981년 9월. ‘철권통치’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무렵, 서울지검(지금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연탄 제조 회사 3곳(삼표·삼천리·대성)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서민들의 연료로, 지금의 도시가스 같은 구실을 하던 연탄 제조사들이 불량 재료를 섞어 넣어 폭리를 취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서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는 임상현(고등고시 16회) 부장에 최경원(사법시험 8회), 정홍원(〃 14회), 박주선(〃 16회), 안대희(〃 17회) 4명의 검사로 구성돼 있었다. “연탄을 만들 때 갈탄을 섞어 넣어서 화력이 안 좋고, 밤중에 갑자기 꺼지기도 하고 그러니 국민의 불만과 원성이 대단했어요. 여론이 나쁘니까 민생침해 사범 차원에서 수사를 시작하게 된 거죠.” 지금은 국회의원(바른미래당·광주 동구남구을)인 박주선 전 검사의 회고담이다.
수사 초기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연탄 제조사 대표들을 줄줄이 구속했다. 10월8일 수사 결과가 발표되자 여론은 박수를 쳤다. 저질연탄을 만든 3개 제조사가 도합 400억 원대의 폭리를 취한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개당 소맷값이 150원 안팎이던 연탄에 갈탄 등 불량 재료를 첨가해 추가로 챙긴 이익만 장당 20원이 넘었다. 검찰수사에 한껏 고무된 전두환은 삼천리 연탄 제조공장을 직접 시찰하기까지 했다. 검찰수사에 기대어 ‘내가 이렇게 서민 생계를 챙긴다’는 과시용 행차를 한 것이다.
전두환은 내친김에 김석휘(고시 8회) 당시 서울지검장에게 직접 전화까지 걸었다. (대통령이 수사 책임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도 문제가 되지 않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다)
“김 지검장이 부르더니, ‘(전두환이) 자기가 보안사령관을 해봐서 아는 데, 이런 사건의 배후에는 반드시 공무원이 있다, 그러니 공무원 수사도 해라. 압수수색도 좀 하고 그래라,’ 그런 말까지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윤석구씨라고, 동력자원부 석탄국장을 맡아서 이미 수사하고 있었어요. 전두환씨 그 지시가 있기 전에 공여자 진술도 받아서 하고 있었거든요. 석탄국장이라는 자리가 당시로는 대단한 자리였어요. 석탄을 캐는 탄좌회사에다 장려금(정부 보조금)을 나눠주는데, 어느 회사에 얼마를 줄지 결정하는 자리였으니까요. 연탄값 인상 청탁·명절 떡값 등 명목으로 (연탄 제조사에서) 윤 국장이 받은 돈이 1940만원이나 됐어요.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40만원 안팎일 때다) 당시로는 건국 이래 최대 액수의 뇌물 사건이었지요.” (박주선 의원)
“무식한 검사들이”…검찰을 쑥대밭으로
검찰은 10월 중순께 윤 국장을 구속했다. 문제는 거기서 터졌다. 윤 국장은 간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뒤엔 전두환의 처삼촌, 그러니까 이순자씨의 작은아버지인 이규광씨가 있었다. 군 출신(육사 3기)으로 당시 대한광업진흥공사(현 대한석탄공사) 이사장을 하던 이씨가 청와대에 들어가 전두환 부부를 만나면서 검찰수사는 급전직하,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그 사람이 군 헌병대 준장 출신인데,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소문이 나 있었어요. 그런 아주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인데, 내 앞에서 윤 국장한테 뇌물을 갖다 바쳤다고 자백까지 한 탄좌회사 사장들이 그 양반을 찾아갔어요. 가서, ‘윤 국장은 죄가 없다. 청렴한 공무원이다. 그런데 매명의식에 사로잡힌 검사가 강제 수사로 허위 자백을 받아낸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이 얘기를 이규광씨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전두환 부부에게 전달한 거죠. 그 무렵에 마침 전국 검사장 회의가 있어서, 그거 마치고는 검사장들이 모두 청와대에 오찬을 하러 들어갔는데, 이순자씨가 나타나서는 ‘죄도 없는 사람을 검찰이 억지로 잡아넣었다’고 공개적으로 핀잔을 준 게 보도가 되고 그랬어요” (박 의원)
상황이 180도 급반전했다. 정권은 더 이상의 수사를 용납하지 않았다. 검찰을 표적 수사, 먼지떨이 수사, 반인권 수사로 무고한 공무원을 잡아넣은 천하의 무뢰배 집단으로 낙인찍었다. 이규광씨가 윤 국장과 어떤 관계였기에 구명에 나섰는지, 윤씨가 받은 뇌물을 ‘상납’받은 사람은 없는지, 윤 국장 이외에 탄좌회사 대표들한테서 뇌물을 받은 고위 공직자가 더 있는지 등은 조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쩌면 ‘연탄 커넥션’은 이미 청와대까지 닿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순자씨의 핀잔을 신호탄으로, 정권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살아 있는 권력’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는 혹독했다. 그해 12월 허형구(고시 2회) 검찰총장이 재임 9개월 만에 ‘날아갔다.’ “사회 지도층 비리를 뿌리 뽑겠다”던 3월 취임 당시의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다. 신임 검찰총장에는 검찰 역사상 최초로 여섯 기수 아래인 정치근(〃 8회) 부산지검장이 고검장 승진을 건너뛴 채 임명됐다. (그다음으로 총장 기수가 파격적으로 내려간 역대급 사례는, 전임자보다 다섯 기수를 건너뛴 지난해 윤석열 총장 임명이었다) 정권은 고시 3회부터 7회까지 ‘낀 기수’를 모조리 쫓아냈다. 검찰 역사상 최대폭의 물갈이 인사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경제 수사하려면 장관 사전 승인받아라”
그뿐이 아니다. 인사권을 가진 정권이 서울지검 수사팀을 가만둘 리 없었다. 김석휘 서울지검장은 서울고검장으로 ‘좌천성 승진’을 시켰다. 수사 실권이 없는 ‘뒷방’으로 내몬 것이다. 특수1부를 지휘하던 김유후(고시 15회) 3차장 검사는 부산지검 2차장으로 귀양 보내고, 임상현 특수1부장은 서울고검 검사로 ‘날렸다.’
특수1부장 자리는 그 뒤 10개월을 비워둔 채 발령조차 내지 않았다. 존재 자체를 눈엣가시로 본 것이다. 검찰에선 조선 시대 ‘정여립의 난’이 새삼 화제가 됐다. 난을 진압한 조정이 정여립의 집터를 파서 연못을 만들어버린 일에 비유하면서다. 외형상 최경원 이하 특수1부의 평검사들은 정권의 징벌을 면한듯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나중에 김석휘 선배가 ‘그때 (윤 국장을 직접 조사한) 박주선이 사표를 받으라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책임은 내가 진다며 버텼다’고 하시더라고요.” (박 의원)
‘보복 인사’가 끝이 아니었다. “검사들이 경제를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 경제 관련 수사를 할 때는 법무부 장관의 사전 승인을 받아라.” 청와대의 ‘오더’에 따라 당시 이종원 법무부 장관이 대검찰청에 내린 지시다. 재계나 경제 관련 공무원 수사는 물론 연관된 뇌물 수사까지도 손대지 못하게 하는 ‘초법적’ 경고였다.
“그래서 ‘연탄팀’ 중에서는 초임검사인 나 혼자 남아서 공소유지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그렇게 바뀌어 버리니까, 탄좌회사 사장들이 집단으로 증인 출석을 거부했어요. 구인장 발부받아서 잡으러 간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출석은 했는데, 나와서는 전부 ‘검사 강요에 의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하는 거예요. 피고인도 부인해버리고. 그런데 새로 온 정해창 서울지검장은 ‘수사를 열심히 한 거 말고 우리가 뭘 잘못했냐. 뇌물 액수는 한 푼도 깎여서는 안 된다. 박 검사를 믿는다’ 그러고. 재판장까지도 갸웃거리니까 중간에 끼어서 정말 힘들었지만, 결국은 전액 유죄를 받고, 나중에 대법원에서도 유죄가 확정됐어요. 아무튼 범죄를 수사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검사들에게 가혹한 불이익을 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 검찰 인사를 보면 그때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요.” (박 의원)
“원칙대로” 대통령 말 믿었다 축출·유배
역사는 가끔 반복된다. 2013년 ‘국정원 댓글 공작 사건’을 수사한 검찰도 된서리를 맞았다. 자신의 임기 첫 검찰총장으로 채동욱(사시 24회)을 임명(3월15일)한 박근혜는 민정수석을 시켜 “원세훈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해 달라”고 당부한다. 직전 대선에서 국정원이 댓글 공작을 벌여 자신의 당선을 도왔다는 의혹-그때도 선거법 위반 혐의였다-에 대해 원칙대로 수사해 달라고 한 것이다. “정말 그래도 되나?” 채 총장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윤석열(〃 33회) 당시 여주지청장을 수사팀장에 앉혀 제대로 파고 들었다. “(원세훈 등에 대해) 선거법 적용과 구속 수사가 불가피하다.” 한 달 조금 넘게 수사한 검찰의 결론이었다. 그러자 황교안(〃 23회) 법무부 장관이 강력한 태클을 걸고 나섰다. “선거법 적용은 말이 안 된다.” 총장과 장관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다 6월 초 구속 수사를 양보하는 대신 선거법을 적용하겠다는 검찰 방침을 법무부가 승인했다. 수사팀은 만세를 불렀지만, 정권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채 총장의) 검찰 조직 운영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검찰) 자체의 자정 노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부의 힘에 의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7월 초 국정원이 작성해 박근혜에게 보고한 ‘(원세훈) 수사 대응 문건’의 요지다. ‘외부의 힘에 의한 특단의 조치’는 9월 초부터 착착 실행에 옮겨졌다. 9월6일 <조선일보>에 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이 보도됐다. 황 장관은 이를 계기로 채 총장을 만나 “변호사는 돈벌이가 된다”며 자진 사퇴를 권했으나, 응하지 않자 감찰을 지시한다. 결국 채 총장이 9월13일 사표를 던졌다.
다음은 윤석열의 차례였다. 채 총장이 잘려나간 뒤에도 집요하게 수사를 계속한 그는 댓글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국정원 직원들 체포 문제로 ‘지휘부’와 정면 충돌했다. 그해 10월21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선 “국정원 수사 초기부터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배후로 황 장관을 지목했다. 당시 폭로 이유를 캐묻는 여당 의원의 질의에 답한 말은 이제 ‘어록’ 대접을 받고 있다. “저는 검찰을 대단히 사랑합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항명 파동’이라 이름 붙은 그 일로 정직 1개월의 징계를 받자 지지와 응원이 빗발쳤다. 거기엔 조국 당시 서울대 교수의 트윗도 있다. “더럽고 치사해도 버텨주세요!”(11월9일) 추미애 현 법무부 장관은 당시 야당 의원으로 나선 대정부질문에서 “(정권이) 수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검사들을 다 내쫓았다. 한 사람(박근혜)만 쳐다 보니 이것을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한다”(11월19일)고 정부를 비판했었다. 윤석열은 이듬해 1월 인사에서 대구고검으로 좌천됐고, 2년 뒤 인사에서 다시 대전고검으로 전보됐다. 나가라는 얘기였다.
‘정권의 시간’ 끝나면 ‘검찰의 시간’이
인사권을 휘두를 때 그들은 ‘정당한 권한 행사’로 포장했다. 그러나 권력은 유한하다. ‘정권의 시간’이 끝나면 ‘검찰의 시간’이 시작된다. 인사권이 선행하지만, 그 인사권을 가진 자들이 사방에 흩뿌려놓은 비리와 범죄는 나중에 드러나 단죄된다. 무슨 법칙처럼 되풀이돼온 현대사의 ‘희비극’이다.
‘저질연탄 사건’ 때 검찰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 이규광은 이듬해인 1982년 알선수재(특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밝혀진 수뢰 액수가 1억원에 이르렀다.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은 40만원 안팎이었다) ‘정의사회 구현’을 국정 목표로 삼았던 전두환 정권 최초의 친인척 비리이자 권력형 범죄였다.
영구히 독재자로 군림할 것만 같던 전두환도 결국 검사들의 칼을 피하지 못했다. 1995년 12월 반란수괴와 내란, 내란목적살인, 수뢰 등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경제 수사는 사전 승인을 받으라”며 검찰의 손발을 묶어 놓고 그가 대기업들에서 받아 챙긴 뇌물은 2205억원에 달했다. 박근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뒤 2017년 3월31일 뇌물(특가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황교안은 검찰 수사를 피한 듯했으나, ‘세월호 수사’가 재개되면서 안심할 수 없는 처지가 돼 있다) 박근혜가 서명한 인사로 지방고검 유배를 다녔던 윤석열이 국정농단 특검의 수사를 이끈 것은 드라마의 단골 메뉴인 ‘사필귀정’을 현실에서 확인한, 보기 드문 아이러니다.
그랬던 윤석열이 이제는 검찰총장이 되어 문재인 정부와 불화를 겪고 있다. 지난해 임명장 수여식에서 활짝 웃으며 “우리 윤 총장님”이라고 부르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윤 총장 관련 질문이 나오자 표정이 굳어졌다. “살아 있는 권력도 엄정하게 수사하라”던 ‘덕담’(지난해 7월25일)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열심히 수사한다”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대통령이 언급한 ‘어떤 사건’이 무엇인지는 국민 모두가 안다. 1부(검사장급 인사)에 이어 2부(중간간부 인사) 개봉을 앞둔 검찰 인사는 그 불화와 원망의 귀결이다.
“모든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에 미혹된다. 그 권력이 한창일 때 끝이 있다는 걸 자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예로부터 ‘권불십년’이라 했는데….” (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 전두환이 그랬고, 박근혜가 그랬다.
강희철 선임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