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재판소. 현재 최고재판소 장관인 오타니 나오토는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도쿄지방법원을 시작으로 사무총국 비서과장, 인사국장, 사무총장, 오사카 고등재판소 장관을 거쳐 지난해 최고재판소 장관이 되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한국과 일본의 사법제도는 비슷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일본 사법제도가 한국에 이식됐기 때문이다. 일본도 한국처럼 ‘지방재판소-고등재판소-최고재판소’로 이어지는 3심 제도를 운영하고, 한국 사법행정 실무를 법원행정처가 맡듯이 최고재판소 소속 사무총국이 일본 사법행정을 담당한다. 한국처럼 최고재판소나 사무총국의 권한과 영향력이 막강하고, 사무총국의 주요 보직을 재판관(판사)이 도맡는다. 재판관들이 2~3년을 주기로 부임지를 바꾸는 전보 인사가 이뤄진다는 점도 같다.
비슷한 구조 탓일까? 한국 사법부가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권한 남용으로 심한 몸살을 앓는 상황에서, 일본 법조인들은 인사제도를 포함한 사법행정 영역에서 한국 법원의 미래가 일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 ‘육지’ 판사와 ‘섬’ 판사 한국에서 법원행정처 발령을 ‘선발’ 인사라고 보듯 일본도 사무총국 발령을 ‘승진’으로 받아들인다. ‘사무총국에 가는 것은 육지에 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10년 재판관 1000여명의 경력을 추적한 책 <판사 간부 인사의 연구>를 쓴 니시카와 신이치 도쿄 메이지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는 재판관을 두 부류로 구분했다. 우수한 임관 성적을 바탕으로 사무총국, 법무성, 도쿄지방재판소 등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최고재판소 재판관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사법 관료’와 3년마다 지방재판소를 돌아다니며 재판을 하는 ‘실무형 재판관’이다.
한국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 장관 오타니 나오토는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도쿄지방법원, 사무총국 비서과장, 인사국장, 사무총장, 오사카 고등재판소 장관을 거쳤다. 전형적인 ‘사법 관료’ 코스다. 특히 사무총국 경력이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니시카와 교수는 “재판을 오래 한 재판관들이 고등재판소 장관, 최고재판소 재판관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며 “재판 경험이 없고 사법행정을 오래 한 재판관들이 최고재판소 재판관이 되어 행정중심적 판결을 한다”고 말했다.
한국도 법원행정처 출신이 주요 재판부로 발령나는 관행이 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으로 승진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국 사법개혁의 우선 과제로 법원행정처의 탈판사화가 첫손에 꼽힌다.
지난 9월24일 일본 도쿄 메이지대학 연구실에서 이 대학 니시카와 신이치 정치경제학부 교수를 만났다. 니시카와 교수는 2010년 1000명의 재판관 경력을 추적한 책 <판사 간부 인사의 연구>을 쓴 뒤 각 재판관의 경력을 계속 축적해가며 연구하고 있다.
■ 인사 목적의 정보 수집 일본에서 사법행정은 각 재판소의 재판관회의를 통해 결정되지만 실제로는 각 재판소장이나 고등재판소 장관이 사무총국 입장을 들어 결정한다. 재판관 인사도 마찬가지다. 재판관이 소속된 재판소장, 고등재판소 장관 등의 의견을 들어 사무총국 인사국이 결정한다. 한국 법원에서 판사 인사를 할 때 각 법원장들의 근무평정을 토대로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이 결정하는 것과 비슷한 구조다.
일본은 1999년 이후 내각 주도로 진행한 사법개혁을 통해 인사의 불투명성을 다소 해소했다. 사법개혁 이전에는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소 성적, 재판관 본인의 희망 등이 인사 자료로 쓰였다.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인사 정보가 어떻게 모이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깜깜이 인사’라는 지적에 일본 사법부는 2004년 ‘재판관 인사평가 규칙’을 제정하고 ‘사건 처리 능력, 재판 운영 능력, 판결 타당성’ 등을 인사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또 외부위원이 다수 참여하는 ‘하급재판관 재판소지명자문위원회’에서 재판관 임용과 재임용 여부를 심사하고 회의록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재판관 인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지켜지는지 불분명하다는 평가가 많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전직 재판관 출신 한 변호사는 “재판관 인사 기준은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에 최고재판소와 사무총국 의향을 살피는 ‘넙치 재판관’이 생긴다”며 “인사와 관련해 본인 의견을 듣고 불복할 경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으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공식적인 인사 정보가 인사평가에 반영될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고, 재판관 인사이동도 법에서는 본인 동의를 받도록 돼 있지만 형식적이라고 한다.
인사평가를 이유로 재판관들의 평소 언행과 생활에 대한 정보 수집도 여전히 이뤄지고 있다. 지난 9월26일 일본 도쿄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일본변호사회관에서 만난 요네쿠라 요코 ‘일본민주법률가협회’ 사무국장(변호사)은 “사무총국에서 재판관들에게 들키지 않고 정보 수집을 하는 방법을 하급재판소장에게 교육한다”고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이 인사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각 법원장에게 인사평정 외에 대법원 체제에 반대하는 판사들의 행적을 기록해 법원행정처에 제출하도록 요구한 것과 비슷하다. 지난 9월24일 일본 도쿄 메이지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니시카와 교수는 “재판관들이 인사에 신경쓰느라 재판에 집중하지 못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사법농단을 겪은 한국 법원도 투명한 인사를 추진하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소속 판사들이 법원장 후보를 추천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올해 의정부지법, 대구지법에 이어 내년 서울동부지법, 대전지법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전근을 줄이기 위해 판사들이 선호하지 않는 ‘비경합법원’에서 장기근무를 허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내년부터 대법원 재판연구관, 헌법재판소 파견법관, 사법연수원 교수 등을 새로 보임할 때 법관인사분과위원회가 선발 기준을 검토하고 사법행정자문회의의 자문을 거칠 예정이다. 그러나 사법행정자문회의가 대법원장 주도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인사권을 쥔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하는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지난 9월26일 일본 도쿄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일본변호사회관에서 만난 우치다 히로부미 규슈대학 명예교수는 2000년대 일본의 사법개혁이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 판결 때문에 좌천된 재판관 사무총국 중심의 불투명한 인사제도는 판결에도 영향을 미친다. 재판 결과를 바꾸라는 수준의 외압이 아니더라도 재판관들 스스로 본인의 인사를 의식해 판결을 한다.
“시민들의 생존 권리와 전기요금 문제를 나란히 두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2014~2015년 히구치 히데아키 후쿠이지방법원 재판관은 후쿠이현 오이 원전 등의 운전 금지를 결정했다. 이 판결 이후 히구치 재판관은 나고야 가정법원으로 ‘좌천성’ 인사 발령이 났다. 행정이 곧 정치인 일본 사회에서 행정소송에서 정부 정책과 다른 판결을 하는 것은 정부와 맞선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히구치 재판관의 판결을 뒤집은 2심 재판관은 정반대의 결과를 손에 쥐었다. 일본 사법부의 관료주의를 비판해온 우치다 히로부미 규슈대학 명예교수는 “당시 2심 재판관은 엘리트 코스에서 밀려나 있었는데, 이 판결 이후 도쿄지방재판소로 승진성 발령이 난 것으로 안다”며 “사회 경험이 적은 재판관들이 인사 때문에 자기통제를 하며 사회적 감수성과 멀어진다”고 말했다.
니시카와 교수는 “2심에서 판결이 뒤집히는 것은 1심 재판관에게 ‘너는 안 된다’는 뜻과 같다.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을 재판관들이 가장 두려워한다”며 “일본에서는 ‘좋은 판결은 정년이 다 된 재판관이 한다’는 말이 있다. 더이상 인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판사들도 인사를 의식한다. 2017년 법원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발표한 설문을 보면 502명의 판사 중 88.2%(443명)가 대법원장, 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 정책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한 판사는 보직이동이나 근무평가, 사무분담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답했다. 47%(236명)의 판사는 상급심 판례에 반하는 판결을 한 법관은 인사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답했다.
지난 9월26일 일본 도쿄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일본변호사회관에서 만난 요네쿠라 요코 일본민주법률가협회 사무국장(변호사)은 재판관회의의 활성화와 법원 정보공개법 제정 등을 강조했다.
■ 사무총국 권한 분산 요구했지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헌법 교육을 받고 진보적 가치로 뭉친 ‘청년법률가협회’ 회원들 주도로 1970년대 사무총국 해체론이 대두된 적이 있다. 당시 일본 사법부는 이들의 재판관 임관과 재임용 등을 거부하는 등 이른바 ‘사법 위기’ 시기를 통과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사무총국의 권한 분산까지 이르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 수년 동안 이뤄진 사법개혁 때도 활발한 논의가 이어지지 않았다.
실패의 경험이 있는 일본 법조계는 한국 사법개혁을 기대와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상식 있는 판사들의 문제 제기로 사법농단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시민들이 사법개혁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기대하지만, 한 세기 가까이 이어진 공고한 사법체제가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우려한다.
일본민주법률가협회와 자유법조단 등은 중앙집권적 권한 분산을 위해 재판관회의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네쿠라 사무국장은 “일본은 사무총국이 다 결정하기 때문에 재판관회의가 형식적이다. 재판관들이 실질적인 논의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 사법농단 사건 이후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상설화했지만 사법행정의 실질적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한국 사법개혁이 갈림길에 섰다.
도쿄/글·사진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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