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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법원은 보통사람이 오는 곳”…시민들이 만드는 뉴욕시 판사

등록 2019-11-12 18:36수정 2019-11-13 17:43

[사법개혁, 길을 묻다-미국]
깜깜이 임용은 없다
형사·가정법원직은 실력 위주 임명
지역민 포함 자문위가 검증 맡아
지원자 주변인 수십명에 평판 들어
민사법원직은 주민주표로 선출
정당 경선서 뿌리조직 지지가 관건

천편일률적 법관 구성도 없다
지역사회 추인받는 과정 거치면
검사·로클러크 출신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한 변호사들이 뽑혀
한국의 시험 위주 방식과 대조적
“보통사람 삶 알아야 공정한 재판”
지난달 5일 뉴욕 브루클린의 리걸에이드소사이어티 사무실에서 만난 그레이스 박 변호사. 임재우 기자
지난달 5일 뉴욕 브루클린의 리걸에이드소사이어티 사무실에서 만난 그레이스 박 변호사. 임재우 기자
지난달 5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그레이스 박(50) 변호사는 미국 최대 법률지원 비영리기구인 리걸에이드소사이어티(리걸에이드)의 뉴욕지부에서 13년을 일했다. 그는 대학 졸업 이후 학자금을 갚기 위해 로펌에서 일한 5~6년을 빼고는 모든 경력을 리걸에이드에서 이민자와 저소득층 소송에 투신했다. 지난 5년간 그의 법률 조력을 받은 어린이만 300명이 넘는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상의 모습과 최악의 모습을 모두 경험했죠.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경험이에요.”

박 변호사는 ‘판사 후보’다. 그는 올해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뉴욕시의 민사법원 판사 경선에 지원했다. 지난 6월 미국 민주당의 예비선거에서 뉴욕 대형 로펌 출신 후보를 꺾은 박 변호사는 이달 본선거에 경쟁자 없는 단독 후보로 입후보한 상태다. 이변이 없으면 내년 1월부터 뉴욕시 민사법원 판사(10년 임기)로 일하게 된다.

‘투표로 뽑는 판사’가 한국의 사법시스템에 익숙한 기자의 눈에는 ‘난센스’처럼 보였다. 그레이스 박 변호사는 이렇게 반문했다. “법정엔 결국 판사가 아닌 ‘보통사람’이 오잖아요. 보통사람이 판사 선발에 관여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끼리끼리’ 한국…‘시민사회’가 뽑는 미국 동질화된 법관 구성은 ‘사법농단’의 주요 배경이었다. 일제 강제동원 재판 사건에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민걸 부장판사의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학연을 내세워 조태열 외교부 차관과의 점심자리에 동석을 제안했다. 특정 재판을 검토한 문제 문건을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하는 데 ‘사법연수원 동기연’이 활용됐다. ‘끼리끼리’가 윤활유 구실을 한 셈이다.

2013년 시행된 한국의 ‘법조 일원화’(일정 경력의 변호사 자격자 소지자 중 법관을 뽑는 제도)로 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꾀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다. 사법시험을 통과한 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젊은 엘리트 법조인을 곧바로 판사로 임용하던 ‘경력법관제’에서는 탈피했지만, 임용·검증 과정이 법관인사위원회와 대법관 회의 등 ‘대법원’의 테두리 안에서 ‘깜깜이’로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대법원 자료를 보면, 올해 임용된 신임 법관 5명 중 1명은 김앤장 등 7대 대형 로펌 출신 변호사이고, 전체의 63%가 이른바 ‘서연고’ 출신이었다. 법조계 안에서도 ‘시험성적순으로 사람을 뽑는 엘리트주의에 갇혀 있다'는 등 비판이 여전한 이유다.

이렇듯 ‘밀실’과 ‘끼리끼리’가 익숙한 한국의 법관사회에 ‘법조 일원화’의 전통이 깊은 미국의 ‘법관 임용 방식’은 짚어볼 만한 참조점이다. 미국의 ‘법조 일원화’는 크게 ‘선거 방식’(지역주민의 투표로 법관 선출)과 ‘실력 위주 선발 방식’(법관지명위원회의 검증을 거쳐 주지사나 시장이 법관 임명)의 경쟁 속에 발전해왔다. 미국 안에서도 뉴욕은 두 방식을 혼용한 독특한 형태의 법관 임용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뉴욕의 법관 임용이 ‘시민사회’가 함께 검증하고 추인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 그 결과 다채로운 법조 경험을 갖춘 법조인들이 판사에 임용된다는 것이다.

‘지역사회’ 검증받는 임명직 판사 ‘뉴욕시장 사법자문위원회’의 자문위원이었던 이찬우 변호사는 지난해까지 16년간 뉴욕시의 법관 지원자를 검증했다. 뉴욕시 형사법원, 가정법원 판사(10년 임기)는 선거가 아닌 ‘실력’을 평가해 뽑는 ‘임명직 판사’다. 뉴욕의 경륜 있는 법조인과 지역 인사 19명으로 구성된 사법자문위원회는 뉴욕시 형사법원의 후보들을 검증해 시장에게 3명의 법관 후보를 올리고, 시장은 이 중 1명을 판사로 고른다.

뉴욕시 법관 임용의 핵심은 ‘평판 검증’이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지원자(뉴욕주 변호사 자격 10년 이상)는 자신이 관여한 소송 목록과 법조인·지역사회 인사들의 추천서를 제출한다. 자문위원 2~3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는 이 자료를 기초로 광범위한 ‘검증 인터뷰’를 진행한다. 지원자의 재판을 담당한 판사, 동료 변호사, 상대측 변호사에 사무실 직원까지, 자문위가 접촉하는 사람은 지원자 한명당 수십명에 이른다. “저는 항상 그 사람이 지원서에 적지 않은 사람과 접촉해요. ‘친구’들은 언제나 좋은 말을 하기 때문에 ‘지원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이렇게 집중적인 평판 검증을 통과한 지원자는 19명의 자문위원이 함께 참여하는 ‘전원위원회’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전원위는 평판 검증 내용과 지원자 관련 서류를 토대로 ‘심층면접’을 하고 시험을 치른다. 이 과정에서 법률 지식, 실무능력뿐만 아니라 인종·성별 등 ‘다양성’도 고려된다.

이는 민형사 실무능력 평가 면접 등 ‘시험 위주’로 법관 지원자를 평가한 뒤 ‘의견 조회’를 맨 마지막에 거치는 한국의 법관 임용 방식과 대조적이다. 법조 경력 5년이면 판사에 지원할 수 있는 한국(2026년부터 법조 경력 10년)과 달리, 적어도 10년 이상의 법조 경험을 요구하는 뉴욕시에서는 축적된 평판을 검증해 지역 법관사회의 인정을 받은 법조인을 법관으로 임용한다.

이렇게 선발된 ‘예비판사’들은 최종적으로 뉴욕 변호사협회가 주최하는 ‘공청회’를 거쳐야 한다. 뉴욕에는 맨해튼, 브루클린 등 자치구 단위로, 또한 아시아계, 한국계 등 인종적 배경으로 나눠진 수십개의 변호사협회가 있다. 지역사회 ‘평판’을 인정받은 예비판사는 민간단체인 변호사협회의 공청회를 거쳐 비로소 지역사회가 ‘추인’한 법관이 된다. 이런 방식을 거쳐 검사·로클러크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변호사들이 판사로 뽑힌다는 게 이 변호사의 설명이다.

그레이스 박 변호사가 예비선거 과정에서 사용한 공보물들. 임재우 기자
그레이스 박 변호사가 예비선거 과정에서 사용한 공보물들. 임재우 기자
‘보통사람들’이 뽑는 선출직 판사 선거로 선출되는 민사법원 판사들도 형사법원 판사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검증 과정’을 거친다. 차이가 있다면 형사법원 판사들과 달리 정당 산하의 ‘검증위원회’에서 후보들을 검증한다는 점과 직접 ‘발로 뛰어서’ 정당 내 지역 조직(클럽)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선출직 판사 후보에게는 무엇보다 정당 뿌리조직의 지지가 중요하다. 뉴욕시 맨해튼에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민주당의 ‘클럽’이 35개에 이른다. 35개의 ‘클럽’에는 투표로 뽑힌 클럽 대표가 2명씩 있다. “사회에 관심이 많고 무보수로 활동하는 ‘평범한 아저씨, 아주머니’로 구성된 이 클럽 대표들에게 지지를 얻어내는 게 ‘빅딜’”이라고 박 변호사는 말했다.

‘판에 박힌 엘리트’가 아니었던 박 변호사의 경력이 선출직 판사가 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됐다. “선거운동 할 때 제가 리걸에이드에서 일했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오, 당신을 돕겠다’고 해줬어요. 제 상대 후보가 갖고 있던 화려한 로펌 경력이 선출직 판사에게는 이점이 아닌 것이죠.”

물론 선거 방식에는 부작용이 있다.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들고, 정치 개입을 피할 수 없다. 박 변호사의 경우 이번에 경선을 치르면서 15만달러를 사비로 썼다. 법관 경선의 경우 후원금 모집도 쉽지 않아 자비로 선거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특정 정당이나 지역 변호사단체 도움으로 당선되기 때문에, 향후 판결의 정치적 공정성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법원은 가난한 자, 소수자들, 평범한 사람들이 오는 곳” 부작용이 많은 ‘선출직 판사’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한국의 가장 개혁적인 법조계 인사들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뉴욕의 판사는 변호사협회, 주요 정당, 시민단체 등 시민사회의 역동적인 검증과 추인 속에 만들어진다. 법관인사위원회가 있지만 결국 ‘시험 위주’로 선발되는 한국의 임용제도와는 대조적이다. 뉴욕에서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법리에 밝은 ‘엘리트’가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법조인이 돼야 한다.

뉴욕에서 만난 법조인들은 ‘보통사람’(레귤러 피플)이라는 단어를 여러차례 강조했다. ‘보통사람’의 관여와 감시 속에 법관 지원자가 검증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레이스 박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민사법원, 형사법원, 가정법원은 엘리트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소수자들, 또 평범한 사람들이 오는 법원입니다. 그들과 호흡할 줄 알아야 현실적이고 공정한 재판도 할 수 있죠.” 뉴욕/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9년 기획취재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9년 기획취재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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