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된 전북 전주시 덕진구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1층에 한 직원이 서 있다. 전주/연합뉴스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삼성물산과 국민연금, 삼성그룹 금융계열사들, 케이씨씨(KCC), 한국투자증권 등 10여곳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다. 2015년 7월 진행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2015년 합병)에 연루된 곳들로, 검찰이 2015년 합병 과정을 비롯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경영권 승계 과정을 정조준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달 말 국정농단 상고심에서 2015년 합병 등 이 부회장을 위한 삼성그룹 차원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있었다고 판단한 바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4부(부장 이복현)는 23일 오전 삼성물산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자산운용 등 삼성그룹 금융계열사, 케이씨씨, 한국투자증권, 한투자산운용 등에 검찰과 수사관을 보내 압수수색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압수수색에서 2015년 합병 과정과 관련한 문서, 의사 결정 등이 담긴 서류, 관련 파일이 담긴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압수수색은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지난해 말부터 삼성바이오 회계사기 의혹을 수사하면서 2015년 합병도 함께 수사해 왔다. 검찰은 2015년 합병을 앞두고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지휘 아래, 제일모직의 덩치를 키우기 위해 제일모직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의 덩치를 부풀리는 과정에서 회계사기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29일 대법원이 이 부회장을 위한 삼성그룹 차원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검찰 수사에 탄력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의 핵심은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었다”며 “대법원이 이 부회장의 승계 작업을 인정한 것은 합병의 부당함과 대가관계를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검찰이 입증해야 할 대목을 대법원이 확인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바이오 회계사기 의혹 등에 대한 검찰 수사가 2015년 합병의 부당함을 가리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날 압수수색 대상이 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찬성해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검찰 특별수사본부와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의해 2016년 11~12월에도 압수수색을 당한 바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로 합병이 이뤄질 경우 국민연금에 손실이 오는 것을 알고도, 이에 찬성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당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청와대의 종용을 받고 합병에 찬성한 혐의 등으로 1·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인 정상영 명예회장이 이끄는 ‘범현대가’인 케이씨씨는 2015년 합병 때 합병에 반대했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에 맞서 삼성물산 주식을 매입하며 삼성 쪽 ‘백기사’ 구실을 했다.
삼성물산은 합병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낮춰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합병이 이뤄지도록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삼성물산은 2015년 초 합병이 가시화될 무렵, 브랜드 가치 1위였던 ‘래미안’ 아파트 공급을 축소하고 국외 플랜트 수주 사실을 숨겼다가 합병 뒤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지분은 한 주도 보유하지 않았지만 제일모직은 지분 23.2%를 가진 대주주로,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합병 비율이 짜일수록 이 부회장의 통합회사 지분율이 높아져 삼성그룹 지배력도 강화되는 구도였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삼성자산운용 등도 막강한 운용자산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위탁을 하는 증권사나 중소규모 자산운용사들한테 합병 찬성을 종용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2015년 3분기 기준 삼성생명의 운용자산은 211조원, 삼성화재는 58조원에 이른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삼성생명에서 위탁받는 물량은 증권사 입장에서는 상당한 수입원”이라며 “이를 의식해 당시 합병에 찬성 입장을 냈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최현준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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