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아무개(58)씨는 2016년 1월 ‘○○상호저축은행 직원 정아정’이라는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대출을 받게 해주겠다”며 주민등록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마침 돈이 필요했던 최씨는 주민등록번호를 말해줬다. 막상 정씨는 “신용이 좋지 않아 당장 대출은 힘들다. 입출금 거래 실적을 쌓아서 신용을 올린 후에 500만원을 대출해주겠다”며 최씨 명의의 계좌와 연결된 체크카드와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최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건넸고, 며칠 뒤 자신의 계좌가 보이스피싱 송금계좌로 이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씨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했지만, 보이스피싱 방조 혐의(사기 방조)와 대가를 바라고 체크카드를 대여한 혐의(전자금융거래법 위반)로 기소됐다. 1심은 계좌 대여의 대가를 요구하거나 받지 않았다며 두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2심은 “보이스피싱에 계좌가 이용될지는 몰랐을 것”이라며 사기 방조 혐의는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향후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대가’를 기대하고 계좌를 빌려줬다”며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는 인정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지난달 이 판결을 확정했다. 몇백만원이 아쉽던 최씨는 졸지에 수백만원의 벌금을 내야 하는 전과자가 됐다. 대검찰청 조직범죄과는 25일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계좌를 건넨 행위만으로도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을 인정한 첫 사례”라고 설명했다.
‘대포통장’(사기계좌)은 대포통장 판매업자 등을 통해 보이스피싱 조직이나 불법 도박사이트 등으로 흘러 들어간다. 지난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은 4440억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2017년 2431억원에 견줘 82.7% 늘어난 수치다.
피해액이 늘었다는 것은 범죄에 이용된 대포통장 수도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감독원 자료를 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된 대포통장은 6만933개였다. 2017년 4만5494개보다 33.9% 증가했다.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 변화가 대포통장의 증가를 불러왔다. 수사·금융기관을 사칭해 돈을 가로채던 보이스피싱 범죄가 2016년을 기점으로 신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거나 저금리로 대출을 전환해주겠다는 식의 ‘대출 빙자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로 대출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자 보이스피싱 조직은 이들로부터 대포통장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이런 대포통장을 보이스피싱 송금계좌로 한번 이용한 뒤 통장 사용을 중단해 수사기관의 추적을 따돌리고 있다. 대신 무심코 또는 대가를 바라고 계좌를 건넨 사람들은 해마다 수천명씩 재판에 넘겨진다.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은 2014년 6714명, 2015년 6145명, 2016년 5083명, 2017년 7858명에 달했다. 대포통장 업자나 보이스피싱 조직원 등은 대부분 ‘성명불상자’로 입건돼 사실상 처벌을 면하는 것과 대조된다.
다만 최씨처럼 보이스피싱 범죄의 공범(사기방조)으로 처벌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형사재판이 아닌 민사재판에서도 2015년 대법원은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계좌 명의자에게 보이스피싱 피해액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대검 조직범죄과는 지난달 보이스피싱 범죄 유형별 수사 방법과 구형 기준 등을 담은 ‘보이스피싱범죄 수사 실무’ 자료를 펴냈다. 다음달에는 중국·필리핀·타이 등 외국 수사기관과 국제공조티에프(TF)를 꾸려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의 효율을 끌어올릴 방침이다. 대검 관계자는 “일단 보이스피싱에 이용되는 통장을 줄이는 것이 범죄 예방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