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공산주의자.”
2013년 1월 청중 500여명이 모인 보수단체 모임에서 ‘공안검사’ 출신 고영주 변호사가 내뱉은 말이다. 이 발언으로 고 변호사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형사재판을 받게 됐고, 손해배상 민사소송까지 제기돼 민사 법정에도 서야 했다.
같은 사안이지만, 형사와 민사 재판 결과는 달랐다. 지난해 8월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김경진 판사는 “악의적으로 모함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정치적 이념에 대한 평가는 형사법정의 권한을 넘어선다” 등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두달 뒤 서울중앙지법 민사7부(재판장 김은성)는 1심과 마찬가지로 해당 발언이 “사회적 평가를 저하하기에 충분하다”며 고 변호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었고, 정치적 발언에 대한 법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취지에서 배상 액수는 1심(3천만원)보다 줄어든 1천만원으로 정했다.
이처럼 형사처벌을 면했지만, 민사책임은 지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당사자들은 법원이 같은 사안에서 다른 판결을 내놓았다며 ‘이중잣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의 개념과 목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형사소송은 형벌권을 쥔 국가(검사)와 피고인 간 싸움이다. 이때의 법관은 ‘심판자’다. 국가기관이 누군가를 처벌할 권리를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되기에, 형사재판에서 법관은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범죄가 입증돼야만 유죄를 선고한다.
반면 민사소송에서 법관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에 가깝다. 법관은 ‘죄’가 되는지를 따지기보다 피고가 원고에게 끼친 ‘피해’에 집중해 배상 범위를 판단한다. 같은 사안의 형사소송보다 상대방 책임을 인정할 여지가 큰 이유다. 고 변호사 사건을 맡은 민사재판부가 “감정적이고 모멸적인 언사를 사용해 원고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했다”며 문 대통령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예 기소도 되지 않은 사람이 불법행위에 따른 배상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도 있다. 2011년 ㈜케이이씨(KEC)는 노조와해 등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회사 대표 등이 두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에게 희망퇴직이나 사직을 강요·지시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했다. 회사 쪽 노무담당자 일부만 기소돼 벌금형을 받았다.
민사재판에선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지난달 16일 전국금속노조와 케이이씨 노조원들이 회사와 경영진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재판장 정도영)는 곽정소 회장과 김경덕 대표에게 ‘노조와해 책임’이 있다고 선고했다. 수사 단계에서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아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지만, 민사재판부는 검찰 조사 자료와
여러 정황을 종합했을 때 경영진의 책임도 상당 부분 인정된다는 취지의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사측의 부당노동행위 사실과 변론 전체 취지를 종합해볼 때, 두 사람이 (노조와해) 문건을 작성하거나 검토해 불법행위에 적극 가담 또는 방조했다”고 밝혔다.
2004년 대법원은 상반되는 민형사 판결 문제에 대한 판례를 남겼다. “관련 형사 판결에서 인정된 사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사재판에서도 유력한 증거자료가 된다. 하지만 민사재판에 제출된 다른 증거 내용에 비추어 형사 판결의 사실 판단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고 인정되면 법원이 이를 배척할 수 있다.” 민사재판의 판단 폭이 더 넓은 셈이다.
그렇다고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충돌’과 ‘괴리’가 무 자르듯 간단한 것은 아니다. 수년간 민형사 법정싸움을 해온 당사자들로서는 ‘재판이 원래 그렇다’는 말을 쉽사리 수긍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 판사는
5일 “에이아이(AI·인공지능) 판사가 아닌 이상 각 재판부가 증거를 살피고 법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독립된 법관의 판단은 달라질 수 있고, 이는 존중될 필요가 있다”면서도 “같은 사건을 두고 민사와 형사 판결이 차이를 보이는 양상은 사법부 내에서도 중요한 논의 과제”라고 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