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앞두고 ‘에버랜드 동식물을 이용한 바이오 신사업’을 추진하는 것처럼 꾸며 제일모직의 기업가치를 3조원가량 부풀린 사실이 드러났다. 평가액으로 따지면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 콜옵션 부채 누락액(1조8000억원)보다 더 큰 규모다. 두 사안에서만 제일모직의 가치는 4.8조원가량 과대평가된 셈이다. 당시 합병에서 제일모직이 고평가될수록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구조였다.
<한겨레>는 최근 국내 4대 회계법인에 속하는 딜로이트안진(안진)과 삼정케이피엠지(삼정)가 2015년 5월 작성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 검토보고서’를 입수했다. 각각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편에 서서 두 회사의 기업가치를 평가한 뒤 적정 합병비율을 계산한 내용이 담겼다. 특히 삼성물산을 대리한 안진 보고서는 국민연금을 비롯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합병 찬성을 설득하는 주요 근거로 활용됐다. 그러나 대외비로 분류돼 지금껏 구체적 내용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22일 이 보고서를 보면, 안진은 당시 제일모직의 총가치를 21.3조원으로 평가하면서 이 중 ‘바이오사업부’(제일모직바이오)의 영업가치를 2.9조원(삼정은 3조원)으로 산정했다. 사업 시작 첫해인 2016년 매출 839억원을 올린 뒤 2024년엔 4조원까지 늘어난다고 가정했다. 제일모직바이오는 삼성바이오와 전혀 별개의 사업이다. 보고서에는 ‘바이오사업부(신수종사업)’이라는 표현만 등장할 뿐 아무런 설명이 없다. 나중에야 “에버랜드가 보유한 동식물을 이용해 바이오 소재와 헬스케어에 활용한다”는 구상만 존재하는 사업임이 알려졌음에도 당시 제일모직의 주력사업인 건설(1.5조원), 패션(1.3조원), 식음료(2.5조원)보다 높은 가치를 매겼다. 그러나 제일모직바이오 사업은 합병 전 제일모직이나 현 삼성물산의 사업보고서 등 공개된 자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합병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실체가 없는 ‘유령사업’인 것이다. “관련 사업을 추진했거나 추진 예정인지”를 묻는 <한겨레>에 삼성물산은 “수사 중이라 답변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해명했다. 이 보고서를 검토한 한 회계사는 “대형 회계법인이 작성한 보고서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허술하다”며 “급조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평가했다.
회계 전문가들은 안진과 삼정의 보고서가 삼성 쪽의 요구를 반영한 ‘맞춤형 보고서’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실제 안진은 보고서에 “대상 회사(제일모직)가 제시한 개략적인 수준의 사업계획과 외부에서 작성한 자료에만 근거해 산정했다. 세부적인 자료의 입수 및 검토나 인터뷰 등 절차는 수행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고서의 정확성이나 신뢰성,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도 했다. 문제가 될 경우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삼성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실 실사’였음을 고백한 셈이다. 삼성 관련 수사를 담당했던 한 인사는 “삼성 쪽이 안진의 담당 회계사에게 제일모직의 가치를 높이라고 강요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부실 보고서’는 합병 과정에서 매우 공신력 있는 자료로 둔갑해 활용됐다. 삼성물산은 그해 6월 이 보고서를 근거로 주주들에게 ‘안진의 회계 및 세무 실사’ 등 상세한 평가작업을 마친 결과 합병에 찬성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로 합병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국민연금 역시 합병 찬성 결정을 내리는 데 이 보고서가 영향을 끼쳤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2015년 6월 중순께 이 보고서를 삼성 쪽에서 전달받은 뒤 합병에 대한 최종 의사결정이 이뤄진 투자위원회에 제출했다. ‘합병관련 분석보고서’ 실무를 담당한 국민연금 직원은 “회계법인에서 작성한 검토보고서라 신뢰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제일모직에 대한 부풀려진 평가결과가 병기되지 않았다면 자체 추정한 합병비율만으로는 국민연금이 찬성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홍순탁(회계사)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은 “검토보고서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는 회계법인의 보고서를 활용한 행위는 사실상 주주를 기만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혐의를 수사 중인 검찰도 삼성이 제일모직바이오 사업을 통해 제일모직의 가치를 임의로 부풀렸다고 보고 이런 행위가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한 배임죄에 해당하는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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