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12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합헌 결정은 임신을 중지(낙태)할 수 있는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태아의 생명권’을 앞에 뒀기 때문이다. 7년이 지난 11일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안위가 곧 태아의 안위”라며 둘을 분리하는 시각을 거부하고, 낙태죄가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여성 인권을 한발 더 나아가게 하는 결정으로, 그사이 여성 인권이 강화된 사회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 “여성의 안위는 태아의 안위”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은 임신한 여성이 겪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주목했다. 헌재는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라고 전제했다. 또 “여성에게 자녀의 양육은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신체적·정신적·정서적 노력을 요구하고, 적지 않은 경제적 부담과 직장 등 사회생활에서의 어려움, 학업 계속의 곤란 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짚었다.
헌재는 여성과 태아의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봤다. 재판관들은 “특별한 예외적 사정이 없는 한 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곧 태아의 안위”라며 “‘가해자 대 피해자’의 관계로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관계를 고정해서는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바람직한 해법을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임신 22주(결정가능기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여성이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를 결정할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봤다. 22주는 태아가 모(母)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으로 이때까지는 고민해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태아의 발달과정에 따라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달리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앞서 2012년 헌재는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해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며 합헌 판단을 한 바 있다.
■ “사회·경제적 이유 낙태 허용돼야” 헌재는 현행 모자보건법이 사회·경제적 이유로 임신중지를 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모자보건법은 유전학적 문제, 성폭행, 임신부의 건강 등 예외적으로만 임신중지를 허용한다. 그러나 헌재는 △사회활동 지장 우려 △소득 불안정 △유자녀인 경우 △결혼 계획이 없는 경우 등의 이유로 임신중지를 고민하는 상황에 놓인 여성이 낙태죄로 임신의 유지와 출산을 강제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헌재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사유를 이유로 낙태 갈등 상황을 겪고 있는 경우까지도 낙태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이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기여하는 실효성 정도가 크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위헌 의견을 낸 3명의 재판관(이석태·이은애·김기영)은 한발 더 나아갔다. 위헌 의견에서 “임신 제1삼분기(마지막 생리 기간의 첫날부터 14주 무렵까지)에 적절하게 수행된 낙태는 만삭 분만보다 안전하다”며 “(이 시기에는) 낙태 여부를 (여성)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헤어진 연인 또는 남편의 괴롭힘의 수단으로 낙태죄 처벌이 악용될 수 있고, 또 사실상 사문화된 현실 등을 들며 당장 낙태죄를 폐기해도 “법적 혼란이나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합헌 쪽 “우리 모두 태아였다” 7년 전 합헌 판결 때는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해 본 재판관이 넷이었지만, 이번엔 둘로 줄었다. 조용호·이종석 재판관은 “지금 우리가 자기낙태죄 조항에 대한 위헌, 합헌을 논의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모두 모체로부터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며 “우리 모두 태아였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우리 세대가 상대적인 불편요소를 제거하는 시류, 사조에 편승하여 낙태를 합법화한다면 훗날 우리조차 다음 세대의 불편요소로 전락해 안락사, 고려장 등의 이름으로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며 “태아가 모체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임신한 여성에게 태아를 적극적으로 죽일 권리가 자기결정권의 내용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도 강조했다.
이들은 또 다수의견이 말한 임신중지의 ‘사회·경제적 사유’도 그 개념과 범위가 매우 모호하다며 “결국 임신한 여성의 편의에 따라 낙태를 허용하자는 것인데, 이는 낙태의 전면 허용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해 일반적인 생명경시 풍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도 7년 전 합헌 때보다는 진일보한 견해를 제시했다. △남성의 책임을 강화하는 양육책임법 제정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 △모성보호정책 △임신 부부 지원과 육아시설 확충 등 입법을 통해 임신중지를 줄일 수 있는 사회적 여건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한 대목이 그렇다.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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