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저녁 서울 성북구 인촌로 한 주택가 건물 지하에 있는 미싱공장에서 노동자가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와인색 매니큐어를 손톱에 바른 김정미(가명·53)씨의 두 손이 재봉틀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김씨가 오른발로 페달을 밟은 채 미싱 바늘 사이로 두 손을 지나치면 “드르륵 드득” “드르륵 드득” 흰색과 파란색 스트라이프 문양의 몸통 뒤판이 몸통 앞판과 붙었다. 30여장 쌓인 천은 빠르게 소매와 붙었다. 충남 부여군 출신인 김씨는 15살에 상경했다. 서울에서 일하면 큰돈이라도 버는 줄 알던 시절이었다. 김씨는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하고, 공장 바닥이나 미싱 바로 위 다락방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번 돈을 부모한테 보냈다. 김씨 같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사장의 지시로 공장에서 직접 밥까지 지어야 했다. 17살 되던 해 김씨는 공장 밖 계단에 놓인 화로에서 끓인 국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져 왼팔을 크게 뎄다. 팔 곳곳에 물집이 잡혔지만 사장은 김씨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김씨의 왼쪽 팔 겨드랑이 근처엔 아직도 화상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젊은 시절 매일 새벽 1~2시까지 일했던 김씨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지금도 아침 8시부터 밤 10~11시까지 일한다. 쉬는 날은 일요일뿐이다. 토요일도 저녁 7시까지 일한다. 그나마 딸과 아들을 취업시키고 시간을 줄인 게 이 정도다. 이렇게 한달 일하면 김씨 손엔 250만원가량이 쥐여진다. 여기엔 주휴수당도, 야근수당도 없다. 그저 ‘남방 3000원×○○개’ ‘트렌치코트 7000원×○○개’가 월급 내역의 전부다. 전태일 열사가 1970년 11월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외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말은 절반만 현실이 됐다. 전태일 열사가 몸을 사른 지 48년이 지난 지금, 김씨는 일요일에만 쉰다.
종일 어깨를 굽히고 앉아서 천만 보고 있으면 눈도 침침하고 허리와 목, 손목이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다. 김씨는 10여년 전엔 미싱 바늘이 왼쪽 검지를 뚫는 사고를 당했다. 치료비는 다행히 사장이 내줬다. 함께 일했던 동료는 비슷한 사고를 당했지만 지금까지 엄지손가락 뼈 안에 바늘이 으스러진 채 박혀 있다. 바늘이 깨져 조각을 빼내려면 큰 수술을 해야 해지만, 돈 문제로 수술을 포기한 탓이었다. 여성용 남방 한개를 만들고 김씨가 받는 돈은 3000원. 김씨가 만든 옷은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2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린다. 각종 비용을 공제한 1만원 남짓을 재단사, 미싱사, ‘시아게’(단추 등을 달며 마무리하는 공정)집, 도매상이 나눈다. 김씨는 “20~30년 전에 트렌치코트의 공임이 개당 7000원이었는데, 지금도 그대로야. 그땐 디자인이 단순하기라도 했지…”라고 말했다. 소비자가 싼값에 옷을 살 수 있는 건 봉제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있어 가능한 일로 보였다. 동대문 쇼핑센터들의 화려한 빛은 창신동까지 번지지 못했다.
■ 불 꺼지지 않는 ‘창신동 647번지’ 김씨가 일하는 창신동 647번지 봉제거리엔 “드드득 드득” 재봉틀 소리와 “부웅” 오토바이 소리로 종일 분주하다. 자동차 한대 겨우 들어갈 좁은 골목 사이로 원단과 완제품을 실은 오토바이가 정차 중인 자동차들 사이로 아슬아슬 달린다. ‘부인복’ ‘패턴’ ‘샘플제작’ 등을 알리는 팻말이 붙어 있는 건물 1층엔 스팀다리미의 흰 수증기가 쉴 틈 없이 빠져나왔다.
창신동엔 봉제공장이 약 1000개 있다. 종로구에 동종 업장이 1400여개가 있는 것으로 집계가 되니 실제로는 봉제공장 대부분이 창신 1·2·3동과 인근 숭인동에 모여 있는 셈이다. 다가구주택 한 건물 통째가 봉제공장인 곳도 있다. 한국의류산업협회와 산업통상부가 2017년 봉제업체를 실태조사한 결과,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전국 14만5468명으로 서울에만 약 9만3624명이 있다.
1970~80년대 섬유산업 수출을 이끈 ‘산업역군’들은 이제 50~60대가 됐다. 다락방 숙소, 어두운 형광등 같은 열악한 작업환경은 개선됐지만 장시간 저임금 노동구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김씨 같은 ‘객공’(작업량에 따라 돈을 버는 숙련공)들은 대부분 주 6일 하루 12시간 이상 일한다. 창신동 한 미싱공장에서 17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우영미(가명·50대 중반)씨는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9시까지 일한다. 오후 6시까지 일하는 토요일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날이다. 우씨는 이렇게 해서 한달에 200만원 정도 번다. 한달 노동시간이 280시간 남짓이다. 야근수당, 주휴수당 등 없이 최저시급 7530원을 곱하면 210만원이 나온다.
18살에 전라남도의 한 산골에서 올라와 창신동 봉제 하청공장에서 재하청을 받는 이정기(49)씨도 하루 13시간 정도 일한다. 이씨는 “보통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아침 6시에 일을 시작해 밤 9~10시까지 한다. 하루 15~16시간 일하는 셈인데, 20~30년 전보다 근무시간이 오히려 늘었다”고 했다. 봄가을(3~6월, 9~11월)에 일감이 많은데, 할 수 있을 때 하나라도 더 하자며 미싱 앞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김씨는 “일 많은 땐 많이 벌면 300만원, 나머지 달엔 일감이 없으면 100만원 벌 때도 있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에도 창신동 647번지에는 여유가 없다. 객공들의 식사시간은 보통 5~10분을 넘지 않는다. 이씨는 “보통은 공장 미싱테이블에서 후루룩 마시듯 먹는다. 식당에서 먹어도 10분을 넘기는 사람이 없다”며 “다른 사람도 일하니까 내 일감을 뺏기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고 말했다. 미싱테이블은 이들의 밥줄이자 식탁이었다.
지난달 27일 오후 6시께 창신동 봉제거리의 한 공장에서 김정미씨가 한창 여성용 남방을 만들고 있다. 사진 장수경 기자
■ 4대 보험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4대 보험에 가입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우영미씨는 기가 찬다는 듯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40년 가까이 봉제 노동자로 일했지만 4대 보험에 가입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김씨는 “4대 보험이 뭐야. 이 동네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4대 보험 가입한 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이라고 말했다. 30년째 봉제일을 하는 이정기씨도 사정은 같았다. 이씨는 “이 동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예 가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2015년 서울시 봉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봉제 노동자의 4대 보험 미가입률은 83%에 달했다. 따로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는다. 일감을 찾아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객공들은 샘플만 보고 자신이 옷을 제작할 수 있는지만 판단해 미싱을 돌린다.
그래서 봉제 노동자들은 일하다가 다쳐도 주먹구구식으로 치료한다. 장민숙(가명·55)씨는 재봉틀 바늘에 숱하게 찔려도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신 재봉틀 몸체를 뒤로 젖히면 들어 있는 공업용 기름에 바늘에 찔린 손가락을 넣고 휘젓는다고 했다. 그 뒤 화장지에 닦으면 피가 멈춘다. 장씨는 “시다 시절에 배웠는데 지금도 습관적으로 그렇게 한다. 신기하게도 덧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천을 자르고 박음질하면 옷감에서 떨어져 나온 가루로 미싱테이블엔 금세 먼지가 앉는다. 이씨는 “2~3일만 청소를 안 해도 테이블이 뿌옇다. 보통 공장들이 지하에 있어 환기가 잘 안 되기 때문에 천식 환자들이 많다”고 했다. 서울노동권익센터 조사를 보면, ‘봉제 일을 하면서 호흡기 증상(숨막힘·가래·비염 등)으로 불편을 느낀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63%에 달했다.
국민연금이 없으니 노후 대책도 없다. 이들은 “일을 관두게 되면 답이 없으니 계속 일한다”고 말했다. 미싱을 돌린 지 17년 된 우씨도, 30년 된 이씨도, 40년 된 김씨와 장씨도 퇴직금은 없다고 했다. 장씨는 “업계 관행상 그냥 묵인한다. 노동부에 고발해야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 사무실 벽면에 붙어있는 종로구 창신·숭의동 일대 봉제공장 지도. 사진 장수경 기자
■ 하청에 재하청, 가내수공업으로 창신동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5060’이다. 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들이 동남아 등 국외로 떠나 일감이 준 탓도 있지만 젊은 인력의 유입도 없다. ‘패스트 패션’ 스파 브랜드가 저렴한 가격의 의류를 내놓으면서 덩달아 동대문 도매 옷값도 내려갔다. 봉제 노동이 사양산업이라는 것을 이들도 모두 알고 있다.
49살인 이정기씨는 공장 전체에서 막내다. 이씨는 “31년 차인데도 내가 가장 어리다. 옷은 디자인, 봉제, 원단 등이 얽혀 있는데 우리 세대가 봉제일을 그만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면 패션산업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봉제업 사업주들이 만든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 관계자도 인력 노후화를 걱정했다. 이 관계자는 “저임금에 노동시간이 길다는 점이 비슷한데도 젊은 사람들이 미용사 쪽으로는 몰리는데 봉제 쪽으로는 전혀 유입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창신동 봉제공장은 대체로 동대문 도매시장의 주문을 받아 옷을 만든다. 최근엔 일감이 줄어들면서 영세공장이 가내수공업 형태로 전환되는 추세다. 창신동 하청 공장에서 옷감을 받아 부부 또는 친척 2~3명이 모여 재하청 공장을 꾸리는 식이다. 이씨는 “예전엔 한 공장에 20명이 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샌 5명도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전태일재단·서울노동권익센터와 민주노총 등은 올해 11월27일을 목표로 봉제 노동자·사업주 등을 아우르는 봉제노조 설립을 추진 중이다. 11월27일은 전태일 열사 분신 2주 뒤 청계피복노조가 설립된 날이다. 민주노총 화학섬유노조 관계자는 “서울시 봉제공장들이 사실상 대부분 10인 미만의 영세 사업장인데다 사업주도 노동자라서 책임을 사업주에게 전가하긴 어렵다”며 “서울시와 사업주 조합, 봉제지회가 함께 3자 연대기구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장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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