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자를 연구목적으로 기증하겠다는 황우석 인터넷 카페 동호인이 1천명을 넘은 것을 기념해 6일 오전 서울대학교 수의대학에서 난자 기증의사 전달식이 열렸다. 이날 참가자들이 자기 이름을 적은 무궁화 꽃을 황 교수 집무실 책상에 올려놓은 뒤, 황 교수가 빨리 돌아오길 바라며 만든 진달래 꽃길을 따라 걷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황우석 교수 연구실로 가는 계단과 복도 바닥을 따라 깔린 진달래 꽃길은 디엔에이 분자구조처럼 가지런했다. 가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갈 사람은, 바로 그 연구실의 주인일 터이다. 그 꽃을 늘어놓은 이들은 자신의 심정처럼 시인 김소월의 심정도 그러했으리라 믿었을지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김소월 시가 누구에게 바치는 애가인지 알지 못한다. 국어 교과서 싯구 아래 빨간 펜으로 밑줄 긋고 ‘조국’ ‘민족’이라고 썼던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그건 학력고사용 해석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 해석은 적어도 객관식은 아니다. 시를 현실의 무대 위에 퍼포먼스로 재현한 ‘아이 러브 황우석’ 회원들의 해석이 사지선다의 특정 번호에 가지런이 몰려 있지 않기를, 우리 문학교육의 실패가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기를 빈다.
과학적 진실은 과학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말이 힘을 얻어가는 모양새다. 황 교수 연구의 진실성 평가는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나서서는 안 될 일이며, 과학계가 시간을 두고 차분히 과학적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얘기다. 오로지 과학적 가치가, 과학적 방법론으로, 과학자에 의해, 사회적 가치로 꽃피워야 한다는 ‘과학주의’는 과학계 내부에서조차 치열한 논쟁거리이지만, 무엇보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일부) 과학계의 태도는 좀처럼 과학스럽게 가지런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차분히’라는 과학자적 태도는 “배아줄기세포의 진실성 논란이 이 연구의 진행을 ‘무려’ 6개월이나 지체하게 했다”는 과학자 자신들의 주장 앞에서 머쓱해진다. ‘6개월’이라는 시간 계산이 어떤 과학적 데이터를 분석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하루를 평생으로 알면서 6개월 동안 182차례나 세대를 물려가는 하루살이의 시간 관념에 가깝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천천히’라니. 나노초를 계산하든 몇만 광년을 논하든, 과학의 이름으로 측정되는 시간은 가치배제적으로 가지런해야 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 자신을 부정하는 이런 역설의 화법은 그 자체로 과학적이지 않다. 시라면 몰라도.
처음에는 이런 비과학적인 수사가 과학계에서만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더니, 뒤이어 언론들도 덩달아 마이크에 대고 ‘과학에 의한, 과학을 위한, 과학의, 과학’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거의 찬양 일변도이기는 했어도, 그동안 ‘세계 최초’와 ‘경제적 가치’ 따위의 열쇳말로 과학을 수없이 ‘검색’해온 과거 행적에 비춰보면 생뚱맞은 노릇이다. 황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논문도 언론의 ‘인기 검색어’ 1순위에 올랐기에 오늘의 영과 욕과, 다시 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과학’은 금칙어라고 한다. 어찌 감히 언론이 과학을 검증하겠느냐며 머리를 조아린다. 자신들만의 전문성을 주장하는 이 나라의 수많은 영역과 분야 가운데 왜 유독 과학만 언론의 검증에서 열외이어야 하는지, 그렇다면 과학에게는 나팔수 노릇만 하겠다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아예 과학과는 담 쌓고 살겠다는 건지, 더는 설명이 없다. 이거야, 과학담당 기자들에게는 생존권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어쨌든 겸손이 나쁠 거야 없다. 하지만, 언론은 겸손도 폭력적으로, 언론스럽게 겸손하다. “겸손하라. 안 그러면 ‘피디수첩’처럼 죽어!”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두려운 무력시위를 맞닥뜨린 느낌이다. 다같이 벌거벗는 목욕탕은 사회적 평등이 구현되는 공간이라기에 들어갔더니 옆에 있는 벌거숭이가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을 내비치며 근육 자랑을 하고 있는 꼴이다. “차카게 살아. 안 그러면 죽어!” 난, 분수 모르고 나대다 ‘문신남’이 사우나 문을 밖에서 걸어잠그는 바람에 질식사한 ‘피디수첩’이 참으로 애석하다. 그 죽임의 손들이 무섭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 가증스럽다. 사칭하고, 얼르고, 협박하고, 거래하고, 심지어 훔치는 일은, 고백하건대 이 바닥의 무용담거리다. 피디수첩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을 그들이 회개 한번 하지 않고 취재윤리를 설파하고 있으니, 이건 도무지 시도 과학도 아니다. 물론 저널리즘은 더욱 아니다. 그저 부조리극이다. 부조리극에서도 교훈 한 가지쯤 얻는 게 바른 언론인의 자세라면, 새삼, 그리고 거듭, 취재윤리를 강조하는 언론들 덕분에 나도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잠입 취재’는 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게 생겼다.
지난 8일치 조간신문들의 1면에는 텁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황 교수가 초췌한 모습으로 침상에 누운 사진이 일제히 실렸다. 보름쯤 전 돌연 세상과 연락을 끊고 한동안 ‘소문’과 ‘전언’으로만 떠돌던 그가,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유일한 희망이던 그가, 오히려 병자가 되어 병원으로 ‘잠입’했다. 의학적 소견상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그래서 입원 사실도 확인해줄 수 없다는, 그렇더라도 병실은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정 그렇게 국민이 원한다면 사진 기자 한 명만 들어가 촬영할 수 있다는 병원 쪽의 철저한 보안 속에, 지면으로나마, 그러나 대대적으로, 사생활 보호 윤리에 아랑곳 않는 그 언론들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 교수는 아직 말이 없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지인을 통해 “과학계를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개탄스럽다”고 말했다는 게 최근 알려진 그의 발언의 전부다. 그러나 그가 세상과 연락을 끊고 있던 사이 사회는 과학계를 매도하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는 걸, 과학계를 매도하려고 했다는 의심만 사도 15년 전통의 피디 저널리즘쯤은 그만 막을 내려야 하는 분위기였다는 걸, 세상과 연락을 끊고 지내서인지 그는 알지 못한 것 같다. 정작 그가 그토록 아끼고 애틋해하는 과학계에서 황 교수 논문을 자체 검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건강한 배아줄기세포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과학에 문외한인 나도 이 정도는 안다. 침대가 과학일지언정, 묵언수행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묵묵히 연구만 하고 세상에 검증해 보여주지 않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 황 교수가 병상에서 떨쳐 일어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자체로 여성의 몸인 난자를 대하듯 애틋하게, 진달래꽃을 사뿐히 사뿐히 즈려 밟고 연구실로 돌아가, 자신의 연구는 진실했고 과학은 위대하다는 것을 보란 듯이 세상에 검증해 보여주기를, 하루를 일생처럼 느끼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나 같은 비과학적 언론인도 사지선다의 한 번호로 가지런히 매겨져 있다는 것을, 황 교수는 알아주기를 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필진] <살인의 추억>과 <피디수첩> 지난 주말 밤 한 방송사에서 영화 <살인의 추억>을 방송했습니다.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화를 볼 때 궁금한 게 몇 개 있었는데, 그 뒤 우연찮게 인터넷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습니다. 영화 막바지에서 송강호와 김상경이 향숙이의 죽을 당시를 본 백광호를 찾아가 박해일 사진을 보여주며 “니가 본 게……, 이 얼굴이야?“라고 묻자, 백광호가 “불이…얼마나 뜨거운지 알아? 불이 얼마나 뜨거운데!”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왠 뜬금없는 대사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 보니, 어떤 분이 해석해 놓은 게 있더군요. 백광호가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어머니한테 말하려다 이를 안 아버지가 백광호를 아궁이속으로 던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백광호 얼굴에 난 화상 자국도 그 때문이라고 하네요. 여하튼 백광호는 사실을 얘기하려 할 때 어릴 적 불에 덴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는 해석이었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밤에 길 가던 여자를 덮치려고 논에서 뛰어나오는 범인을 연기한 사람도 박해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범인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박해일이 범인이 맞을 것으로 비쳐지지만 미국에 보낸 DNA 분석결과 범인이 아니라고 통보를 받게 되죠.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왔던 김상경의 희망을 저버린 채… 영화 포스터에는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라는 짤막한 한 마디가 적혀 있습니다. 이 영화의 포스터처럼 미치도록 진실을 알고 싶게 만든 사건이 최근 일어났습니다.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을 놓고 벌였던 황우석 교수팀과 피디수첩간의 진실게임이 그것입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피디수첩팀이 취재한 내용이 진실이라면? 피디수첩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사람들이 얼마나 야속하겠습니까. 만약, 황 교수팀이 진실이라면? 피디수첩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사람들의 눈초리가 얼마나 신경 쓰이겠습니까? 이 정도로 덮어주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과학계에 맡겨 검증을 하던 또 다른 방법을 택하던 이 기회에 진실을 털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실이 아닌 쪽은 피해를 준 쪽에 깊이 사과하고 이 사태를 치유해야 될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사업가가 된 송강호가 옛날 사건 현장을 우연히 보다 한 꼬마를 만나죠. 꼬마는 “이전에도 아저씨처럼 그렇게 사건현장을 본 사람이 있었다”고 하고, 송강호가 “그 사람 어떻게 생겼니?”라고 묻자, 꼬마는 “그냥 평범하게 생겼어요”라고 말합니다. 살인이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암시를 해놓은 것이겠지요. 어느 한 쪽에 대한 감정적 일방적 비난은 우리 스스로를 정신적 살인자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필진]한 물리학자가 바라본 황우석 논란 몇 달 전 SCI급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발표하는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끝날 무렵에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했다. “그 계산 결과를 내가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죠?”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남의 계산 결과를 의심하는 것이 상당히 무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질문은 사실 학계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만약 내가 거기다 대고 “이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인데...” 라고 대답한다면,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더라도 아마 질문자에게 충분한 해명이 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제 계산 노트 보여 드리죠.” 라는 한마디로 상황은 끝났다. 물리학을 전공한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었다. 흔히 교과서라고 불리는 출판서적들은 물론 유명 학술지의 ‘검증된’ 논문조차도 자기가 직접 확인해 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과학이 발전해 온 역사를 보더라도 이런 의심과 회의야 말로 과학의 성공을 보장해 준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심과 회의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권위와 상식에 대한 도전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도전받는 권위는 이런 갖가지 도전을 이겨냄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해 낸다. 그래서 귄위에 대한 도전과 의심, 공격과 방어는 매우 자연스러운 과학 활동의 일부분이다. 천하의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과학자로 남았다. 스스로가 생애 최대의 실수라고 인정했던 우주상수는 근래에 와서야 그 중요성이 다른 이유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최고의 물리학자라는 스티븐 호킹도 블랙홀에서의 정보 상실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무수한 공격을 받았지만 아무도 그런 의심과 도전을 ‘흠집내기’라는 식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이론을 일부 수정하기에 이른다. 실험과학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비교적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실험 결과를 놓고서도 저건 잘못된 실험이라는 주장들이 언제나 제기된다. 그 결과가 어느 학술지에 얼마나 비중있게 실렸나 하는 사실 자체는 과학적인 근거와 관련해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과학자가 자신의 양심과 과학적 근거에 비추어 납득되지 않으면 의문을 제기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그들의 본능에 가깝다. 과학자들은 수년에 걸쳐 그렇게,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믿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받기 때문이다. 과학이 지금까지 성공한 학문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과학적 방법론이 그 활동의 모든 과정에서 철저하게 관철되기 때문이다. 최근 황우석 교수팀의 인간 배아줄기 세포와 관련된 논란을 보면서 한 가지 매우 안타까운 점은 그 어디에서도 문제해결을 위한 과학적 방법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이언스나 네이쳐라는 학술지가 연구결과 혹은 진실의 최종 잣대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과학자들에게는 그저 이름있는 학술지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단지 거기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그 논문을 믿는 과학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논란의 초기에 황우석 팀에서 ‘사이언스에 실렸으니 검증이 다 되었는데...’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어도 과학자의 상식으로 봤을 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대한민국 최고의 과학자 집단에서 했다는 사실, 과학계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과 의심과 회의를 흠집내기로 몰아가는 태도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일반인들의 여론과는 달리 젊은 과학자들이 모이는 인터넷 게시판들(scieng나 kids, 혹은 bric)에서는 황우석 팀의 이런 대응방식에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말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를 위해 취재과정에서의 최소한의 윤리를 어겨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논란을 해결하는 과정이 비과학적이거나 심지어 반(反)과학적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젊은 과학자들은 바로 이 점 때문에 국민 대다수의 여론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왜 황우석 팀은 이 사건을 ‘과학적’으로 해결하지 않는가. ▶[관련게시판] 바로가기
▶[관련그림] 바로보기 온 국민을 며칠간이나 혼란에 빠뜨린 이번 사건은 전 세계는 물론 인류 전체의 과학 발전에 중대한 획을 그은 위대한 성과에 관한 것임에 반해 그 대응방식에서 ‘과학’ 혹은 ‘과학적 방법론’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더군다나 해당 연구집단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반면 같은 과학자 집단으로부터는 큰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 매우 이례적이다. 혹자는 <피디수첩>이라는 비전문가가 세계적인 과학적 업적을 검증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이 또한 그리 과학적인 주장이 못된다. 과학적인가 아닌가는 그 주체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주체가 벌이는 행위가 얼마나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 과학자들은 다소 어설픈 <피디수첩> 제작진들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과학자 집단으로서의 황우석 팀이 이번 기회에 과학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한 수 지도’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황우석 팀은 오히려 스스로 합의한 방법론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전혀 과학적이지가 않다. 기존의 방법이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제시하면 된다. 황우석 팀의 뒤이은 언행은 이 땅의 많은 과학자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줄기세포를 다시 시연해 보이겠다는 말은 예컨대 화살을 과녁의 퍼펙트 골드에 한 번 더 꽂아 넣어 보겠다는 말인데, 누구도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과녁에 꽂혀 있는 화살의 지문검사만 하면 그냥 끝날 일이다.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보이는 것으로 검증을 대신한다고 하는 말도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앞으로 나올 연구 결과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의 진위여부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건 과학의 문제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황우석 팀은 과학적인 방법론의 정도를 걷기보다는 언론플레이만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같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매우 서글픈 일이다. 젊은 과학자들이 찾아낸 사이언스 논문의 동일한 세포사진도 황우석 팀의 주장과는 달리 이미 사이언스에서 검토 중인 게 아니라, 논란이 있고 나서야 황우석 팀에서 정정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고, <피디수첩> 때문에 세계최초를 빼앗겼다는 일본의 그 논문은 취재 들어가기 전인 5월말에 벌써 제출된 상태였다. 연구팀의 핵심 관계자들이 과학의 정도를 걷는 대신 연이어 거짓된 주장들을 언론에 계속 내놓는 한 과학자 사회에서의 학자로서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문제의 배아줄기 세포가 진짜라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그러나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과학적인 믿음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야만 한다. 국익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매몰차 보일지 몰라도 과학자들은 매사에 의심하고 회의를 품고 0.1%의 의혹에도 문제제기하도록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저자 중 한 명이 논문의 진위에 의혹을 제기한 점, 문제의 배아줄기세포 DNA를 공정한 제3자(사이언스를 포함해서)가 검증했다는 사실이 전혀 없다는 점, 후속 연구와 이 문제는 전혀 별개라는 점은 생명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다 알 수 있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본능적으로 의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다. 그리고 이처럼 그다지 심오하지도 않은 뻔한 사실들을 놓고서 ‘과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기가, 또 받아들여지기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면, 나는 아마 과학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게다. 황우석 교수는, 나 또한 존경해 마지않는, 대한민국 최고 과학자 제1호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가 이끄는 연구팀에 의해 대한민국의 과학이 실종되어 버리는 지금의 상황이 나는 너무나 안타깝다. 팀내 안규리 교수는 이번 일로 후배 과학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많은 염려를 하셨지만, 정작 젊은 과학자들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선배 과학자들의 태도와, 의심하고 문제제기하는 과학자로서의 본능과 양심을 사회적으로 거세당한 참담함에 괴로워하고 있다. 이를 짓밟고 성취한 국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학입국을 꿈꾸는 대한민국을 정말 가치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과학도로 첫발을 내디딜 때 가슴에 품은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진리는 나의 빛이니(VERI TAS LUX MEA)!"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필진]<피디수첩>의 비윤리성에 대한 성찰 들어가며 PD수첩에 대한 방송 취재윤리 위반에 대해 MBC가 사과를 하고나서 그 파장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도 'PD수첩 방영 후 논란, 한국사회의 내셔널리즘과 노동중독'이라는 글을 쓴 상태라 그 심정은 참으로 무겁고 참담하기까지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이제는 정말 MBC PD수첩 방영에 대한 내용을 진지하게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더 암담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정말 PD수첩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지난 PD수첩 방영 직후에도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매국노와 난치병 치료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으로밖에 비추지 않았지만, 아마 이제는 아직도 정신못차렸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상황이 바뀌었으니 그에 대한 변명을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PD수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과제와 교훈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PD저널리즘 프로의 문제점과 한계 그동안 우리는 여러 방송사에서 시사고발프로로 일컬어지는 소위, PD가 직접 보도를 하는 PD저널리즘 프로를 접하고 있다. KBS '추적 60분', '시사투나잇', SBS '그것이 알고싶다', '세븐데이즈' 등이 PD수첩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대표적인 PD저널리즘 프로라 할 수 있다. 이미 국민일보 12월 5일 인터넷판에도 문제제기한 것처럼 이러한 프로들은 이미 선정적 소재와 몰래카메라 등의 위장 취재, 사생활침해, 인권침해 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는 - 우리가 지금까지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 사실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이 PD저널리즘 프로에 대해 접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위장 취재, 사생활 침해, 인권 침해 등 문제들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문제에 대한 고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문제의 성질이 달랐다. 사회적 정서가 PD수첩 내용에 대해 이미 엄청난 항의를 가져오고 있던 터라, 취재윤리 문제까지도 도마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취재윤리 문제가 절대 하찮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취재윤리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PD수첩의 이번 취재윤리 위반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아마 이번 문제로 MBC는 창사 이후 최대의 타격과 함께 현재의 흐름대로라면 최문순 사장 퇴진 등 더 큰 문제로 비화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MBC는 그에 대해서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년간 문제삼지 않았던 공공연한 취재윤리 위반을 이번 PD수첩이 그렇게 공격을 받는 것은 어쩌면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한 방영을 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윤리'에 대한 사회의 성찰 이번 사태를 보면서 사실 우리 사회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윤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였지 않나라는 것이다. PD수첩 방영에 대한 황우석 교수 연구의 문제는 생명'윤리'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었고, PD수첩 취재에 대한 방법에 대한 문제는 취재'윤리'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었으며, 지난 'PD수첩 방영 후 논란, 한국사회의 내셔널리즘과 노동중독'의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의 자본과 성과를 위해서는 과정의 문제는 눈감아줄 수 있다는 자본'윤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이 사회가 결과만을 중시한 채,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하찮게 여겼냐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련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지 않으면 그 결과는 본질적 성찰을 얻기 어렵지 않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MBC 취재윤리 위반만을 비판 하는 것도 그동안 계속적으로 문제가 된 PD저널리즘 프로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도움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고발을 하기 어려운 언론의 목적까지 훼손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이는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해 난자매매나 연구원 난자 사용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줄기세포 연구 자체를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히려 이번 PD수첩 방영 후 MBC앞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PD가족들의 사진까지 올리는 것도 서슴치 않는 네티즌들은 이른바 '매국노'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왜 그리 생명'윤리'에 대해 걱정을 했는지를 역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취재'윤리' 문제에서 얻었으면 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양비론이 아니다. '윤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노동중독 사회의 흐름과 연결고리로 보지 않는다면, 지금 나타나는 어떠한 비판과 비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황우석 교수가 연구에 참여하기 어려운 심적 부담과 함께, 더 이상 여론이 강하면 사회 고발하기 어려운 방송가의 눈치만 커지게 될 것이다. 그 둘은 우리 모두 원치 않는다. 재차, 이제는 차분한 길을 걷자 이미 지난 글의 마무리로 '이제는 차분한 길을 걷자'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차분한 길을 걷자고 하고 싶다. 소모적인 현상비판이 아닌 우리 사회에 대한 본질적 접근 없이는 이번 PD수첩과 황우석 교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PD수첩의 난자매매와 연구원 난자 사용 문제는 충분히 문제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국익에 갇혀 생명'윤리'를 하찮게 여기고 있는 사회 풍토에서 상당한 사회적 환기를 일으킬 수 있는 방송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DNA 검증 등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을 비전문가가 검증하는 대단히 큰 오류와 자아독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PD수첩은 그 문제에 대해 과학계가 나서서 자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만 했어야 했다. 그에 대해서는 9시 뉴스 전 내보냈던 사과가 충분치 않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역시나 PD저널리즘 프로를 하고 있는 타 언론사의 반응이었다. 4일 MBC의 사과방송을 봤을 때 느낌이 씁슬하였다는 표현을 한다면, 5일 PD저널리즘 방송을 하고 있는 다른 방송사 언론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자기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PD수첩만 문제였다'는 반응을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역겹다는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다. 거기에 PD수첩에서도 그런 적 없다고 말한, "죽이러 왔다"라는 상식적일 수 없는 표현까지도 진실 확인여부 없이 내보내는 일부 신문들의 지면을 볼 때면 암울하기까지하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PD수첩이 제기한 문제는 덮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과학계 등 전문가가 이에 대한 명확한 검증이 있지 않는다면 지금의 줄기세포 연구 초기 단계를 지나고나서는 더욱 문제가 심각해질 수 밖에 없다. 앞으로 임상실험 후 상용화가 되기 위해 30년이 걸린다고 봤을 때 이제 줄기세포 연구가 걸어온 길과 PD수첩의 문제제기는 빙신의 일각이라 할 것이다. 과학계의 검증과 자기성찰이 없다면 해외에서는 끊임없이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의심을 할 수밖에 없고, 연구 자체를 떠나 한국 사회는 '윤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회라는 오명만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또한 이는 우리 사회의 학계에 전반적으로 퍼진 것과 같이 다른 교수의 결과물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 되어버린 암묵적 동의만을 키울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5일 민주노동당이 성명을 낸 것과 같이, PD수첩의 취재윤리 문제는 비판받아야 하지만, 여러 의혹에 대해서는 과학계가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PD수첩 방영은 그 방송에서 이야기하고자했던 목적과 취재방법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의 '윤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성찰할 수 있던 계기가 된 것 같아 반성과 과제를 동시에 던져준 사건이었다. 이 글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또 PD수첩에 대해 비판하더라도, 그저 MBC만이 책임을 지고 끝낼 문제가 아닌 것은 바로 이러한 성찰 과제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비과학적인 수사가 과학계에서만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더니, 뒤이어 언론들도 덩달아 마이크에 대고 ‘과학에 의한, 과학을 위한, 과학의, 과학’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거의 찬양 일변도이기는 했어도, 그동안 ‘세계 최초’와 ‘경제적 가치’ 따위의 열쇳말로 과학을 수없이 ‘검색’해온 과거 행적에 비춰보면 생뚱맞은 노릇이다. 황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논문도 언론의 ‘인기 검색어’ 1순위에 올랐기에 오늘의 영과 욕과, 다시 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과학’은 금칙어라고 한다. 어찌 감히 언론이 과학을 검증하겠느냐며 머리를 조아린다. 자신들만의 전문성을 주장하는 이 나라의 수많은 영역과 분야 가운데 왜 유독 과학만 언론의 검증에서 열외이어야 하는지, 그렇다면 과학에게는 나팔수 노릇만 하겠다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아예 과학과는 담 쌓고 살겠다는 건지, 더는 설명이 없다. 이거야, 과학담당 기자들에게는 생존권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어쨌든 겸손이 나쁠 거야 없다. 하지만, 언론은 겸손도 폭력적으로, 언론스럽게 겸손하다. “겸손하라. 안 그러면 ‘피디수첩’처럼 죽어!”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두려운 무력시위를 맞닥뜨린 느낌이다. 다같이 벌거벗는 목욕탕은 사회적 평등이 구현되는 공간이라기에 들어갔더니 옆에 있는 벌거숭이가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을 내비치며 근육 자랑을 하고 있는 꼴이다. “차카게 살아. 안 그러면 죽어!” 난, 분수 모르고 나대다 ‘문신남’이 사우나 문을 밖에서 걸어잠그는 바람에 질식사한 ‘피디수첩’이 참으로 애석하다. 그 죽임의 손들이 무섭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 가증스럽다. 사칭하고, 얼르고, 협박하고, 거래하고, 심지어 훔치는 일은, 고백하건대 이 바닥의 무용담거리다. 피디수첩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을 그들이 회개 한번 하지 않고 취재윤리를 설파하고 있으니, 이건 도무지 시도 과학도 아니다. 물론 저널리즘은 더욱 아니다. 그저 부조리극이다. 부조리극에서도 교훈 한 가지쯤 얻는 게 바른 언론인의 자세라면, 새삼, 그리고 거듭, 취재윤리를 강조하는 언론들 덕분에 나도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잠입 취재’는 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게 생겼다.
황 교수 서울대병원 입원 수면장애와 극심한 피로, 스트레스로 인한 탈진으로 건강이 악화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 황우석 교수가 7일 오전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서울=연합뉴스)
지난 8일치 조간신문들의 1면에는 텁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황 교수가 초췌한 모습으로 침상에 누운 사진이 일제히 실렸다. 보름쯤 전 돌연 세상과 연락을 끊고 한동안 ‘소문’과 ‘전언’으로만 떠돌던 그가,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유일한 희망이던 그가, 오히려 병자가 되어 병원으로 ‘잠입’했다. 의학적 소견상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그래서 입원 사실도 확인해줄 수 없다는, 그렇더라도 병실은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정 그렇게 국민이 원한다면 사진 기자 한 명만 들어가 촬영할 수 있다는 병원 쪽의 철저한 보안 속에, 지면으로나마, 그러나 대대적으로, 사생활 보호 윤리에 아랑곳 않는 그 언론들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 교수는 아직 말이 없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지인을 통해 “과학계를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개탄스럽다”고 말했다는 게 최근 알려진 그의 발언의 전부다. 그러나 그가 세상과 연락을 끊고 있던 사이 사회는 과학계를 매도하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는 걸, 과학계를 매도하려고 했다는 의심만 사도 15년 전통의 피디 저널리즘쯤은 그만 막을 내려야 하는 분위기였다는 걸, 세상과 연락을 끊고 지내서인지 그는 알지 못한 것 같다. 정작 그가 그토록 아끼고 애틋해하는 과학계에서 황 교수 논문을 자체 검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건강한 배아줄기세포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과학에 문외한인 나도 이 정도는 안다. 침대가 과학일지언정, 묵언수행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묵묵히 연구만 하고 세상에 검증해 보여주지 않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 황 교수가 병상에서 떨쳐 일어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자체로 여성의 몸인 난자를 대하듯 애틋하게, 진달래꽃을 사뿐히 사뿐히 즈려 밟고 연구실로 돌아가, 자신의 연구는 진실했고 과학은 위대하다는 것을 보란 듯이 세상에 검증해 보여주기를, 하루를 일생처럼 느끼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나 같은 비과학적 언론인도 사지선다의 한 번호로 가지런히 매겨져 있다는 것을, 황 교수는 알아주기를 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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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살인의 추억>과 <피디수첩> 지난 주말 밤 한 방송사에서 영화 <살인의 추억>을 방송했습니다.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화를 볼 때 궁금한 게 몇 개 있었는데, 그 뒤 우연찮게 인터넷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습니다. 영화 막바지에서 송강호와 김상경이 향숙이의 죽을 당시를 본 백광호를 찾아가 박해일 사진을 보여주며 “니가 본 게……, 이 얼굴이야?“라고 묻자, 백광호가 “불이…얼마나 뜨거운지 알아? 불이 얼마나 뜨거운데!”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왠 뜬금없는 대사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 보니, 어떤 분이 해석해 놓은 게 있더군요. 백광호가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어머니한테 말하려다 이를 안 아버지가 백광호를 아궁이속으로 던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백광호 얼굴에 난 화상 자국도 그 때문이라고 하네요. 여하튼 백광호는 사실을 얘기하려 할 때 어릴 적 불에 덴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는 해석이었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밤에 길 가던 여자를 덮치려고 논에서 뛰어나오는 범인을 연기한 사람도 박해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범인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박해일이 범인이 맞을 것으로 비쳐지지만 미국에 보낸 DNA 분석결과 범인이 아니라고 통보를 받게 되죠.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왔던 김상경의 희망을 저버린 채… 영화 포스터에는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라는 짤막한 한 마디가 적혀 있습니다. 이 영화의 포스터처럼 미치도록 진실을 알고 싶게 만든 사건이 최근 일어났습니다.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을 놓고 벌였던 황우석 교수팀과 피디수첩간의 진실게임이 그것입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피디수첩팀이 취재한 내용이 진실이라면? 피디수첩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사람들이 얼마나 야속하겠습니까. 만약, 황 교수팀이 진실이라면? 피디수첩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사람들의 눈초리가 얼마나 신경 쓰이겠습니까? 이 정도로 덮어주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과학계에 맡겨 검증을 하던 또 다른 방법을 택하던 이 기회에 진실을 털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실이 아닌 쪽은 피해를 준 쪽에 깊이 사과하고 이 사태를 치유해야 될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사업가가 된 송강호가 옛날 사건 현장을 우연히 보다 한 꼬마를 만나죠. 꼬마는 “이전에도 아저씨처럼 그렇게 사건현장을 본 사람이 있었다”고 하고, 송강호가 “그 사람 어떻게 생겼니?”라고 묻자, 꼬마는 “그냥 평범하게 생겼어요”라고 말합니다. 살인이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암시를 해놓은 것이겠지요. 어느 한 쪽에 대한 감정적 일방적 비난은 우리 스스로를 정신적 살인자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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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한 물리학자가 바라본 황우석 논란 몇 달 전 SCI급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발표하는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끝날 무렵에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했다. “그 계산 결과를 내가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죠?”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남의 계산 결과를 의심하는 것이 상당히 무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질문은 사실 학계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만약 내가 거기다 대고 “이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인데...” 라고 대답한다면,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더라도 아마 질문자에게 충분한 해명이 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제 계산 노트 보여 드리죠.” 라는 한마디로 상황은 끝났다. 물리학을 전공한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었다. 흔히 교과서라고 불리는 출판서적들은 물론 유명 학술지의 ‘검증된’ 논문조차도 자기가 직접 확인해 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과학이 발전해 온 역사를 보더라도 이런 의심과 회의야 말로 과학의 성공을 보장해 준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심과 회의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권위와 상식에 대한 도전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도전받는 권위는 이런 갖가지 도전을 이겨냄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해 낸다. 그래서 귄위에 대한 도전과 의심, 공격과 방어는 매우 자연스러운 과학 활동의 일부분이다. 천하의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과학자로 남았다. 스스로가 생애 최대의 실수라고 인정했던 우주상수는 근래에 와서야 그 중요성이 다른 이유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최고의 물리학자라는 스티븐 호킹도 블랙홀에서의 정보 상실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무수한 공격을 받았지만 아무도 그런 의심과 도전을 ‘흠집내기’라는 식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이론을 일부 수정하기에 이른다. 실험과학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비교적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실험 결과를 놓고서도 저건 잘못된 실험이라는 주장들이 언제나 제기된다. 그 결과가 어느 학술지에 얼마나 비중있게 실렸나 하는 사실 자체는 과학적인 근거와 관련해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과학자가 자신의 양심과 과학적 근거에 비추어 납득되지 않으면 의문을 제기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그들의 본능에 가깝다. 과학자들은 수년에 걸쳐 그렇게,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믿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받기 때문이다. 과학이 지금까지 성공한 학문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과학적 방법론이 그 활동의 모든 과정에서 철저하게 관철되기 때문이다. 최근 황우석 교수팀의 인간 배아줄기 세포와 관련된 논란을 보면서 한 가지 매우 안타까운 점은 그 어디에서도 문제해결을 위한 과학적 방법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이언스나 네이쳐라는 학술지가 연구결과 혹은 진실의 최종 잣대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과학자들에게는 그저 이름있는 학술지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단지 거기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그 논문을 믿는 과학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논란의 초기에 황우석 팀에서 ‘사이언스에 실렸으니 검증이 다 되었는데...’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어도 과학자의 상식으로 봤을 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대한민국 최고의 과학자 집단에서 했다는 사실, 과학계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과 의심과 회의를 흠집내기로 몰아가는 태도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일반인들의 여론과는 달리 젊은 과학자들이 모이는 인터넷 게시판들(scieng나 kids, 혹은 bric)에서는 황우석 팀의 이런 대응방식에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말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를 위해 취재과정에서의 최소한의 윤리를 어겨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논란을 해결하는 과정이 비과학적이거나 심지어 반(反)과학적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젊은 과학자들은 바로 이 점 때문에 국민 대다수의 여론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왜 황우석 팀은 이 사건을 ‘과학적’으로 해결하지 않는가. ▶[관련게시판] 바로가기
▶[관련그림] 바로보기 온 국민을 며칠간이나 혼란에 빠뜨린 이번 사건은 전 세계는 물론 인류 전체의 과학 발전에 중대한 획을 그은 위대한 성과에 관한 것임에 반해 그 대응방식에서 ‘과학’ 혹은 ‘과학적 방법론’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더군다나 해당 연구집단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반면 같은 과학자 집단으로부터는 큰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 매우 이례적이다. 혹자는 <피디수첩>이라는 비전문가가 세계적인 과학적 업적을 검증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이 또한 그리 과학적인 주장이 못된다. 과학적인가 아닌가는 그 주체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주체가 벌이는 행위가 얼마나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 과학자들은 다소 어설픈 <피디수첩> 제작진들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과학자 집단으로서의 황우석 팀이 이번 기회에 과학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한 수 지도’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황우석 팀은 오히려 스스로 합의한 방법론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전혀 과학적이지가 않다. 기존의 방법이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제시하면 된다. 황우석 팀의 뒤이은 언행은 이 땅의 많은 과학자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줄기세포를 다시 시연해 보이겠다는 말은 예컨대 화살을 과녁의 퍼펙트 골드에 한 번 더 꽂아 넣어 보겠다는 말인데, 누구도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과녁에 꽂혀 있는 화살의 지문검사만 하면 그냥 끝날 일이다.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보이는 것으로 검증을 대신한다고 하는 말도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앞으로 나올 연구 결과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의 진위여부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건 과학의 문제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황우석 팀은 과학적인 방법론의 정도를 걷기보다는 언론플레이만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같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매우 서글픈 일이다. 젊은 과학자들이 찾아낸 사이언스 논문의 동일한 세포사진도 황우석 팀의 주장과는 달리 이미 사이언스에서 검토 중인 게 아니라, 논란이 있고 나서야 황우석 팀에서 정정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고, <피디수첩> 때문에 세계최초를 빼앗겼다는 일본의 그 논문은 취재 들어가기 전인 5월말에 벌써 제출된 상태였다. 연구팀의 핵심 관계자들이 과학의 정도를 걷는 대신 연이어 거짓된 주장들을 언론에 계속 내놓는 한 과학자 사회에서의 학자로서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문제의 배아줄기 세포가 진짜라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그러나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과학적인 믿음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야만 한다. 국익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매몰차 보일지 몰라도 과학자들은 매사에 의심하고 회의를 품고 0.1%의 의혹에도 문제제기하도록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저자 중 한 명이 논문의 진위에 의혹을 제기한 점, 문제의 배아줄기세포 DNA를 공정한 제3자(사이언스를 포함해서)가 검증했다는 사실이 전혀 없다는 점, 후속 연구와 이 문제는 전혀 별개라는 점은 생명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다 알 수 있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본능적으로 의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다. 그리고 이처럼 그다지 심오하지도 않은 뻔한 사실들을 놓고서 ‘과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기가, 또 받아들여지기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면, 나는 아마 과학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게다. 황우석 교수는, 나 또한 존경해 마지않는, 대한민국 최고 과학자 제1호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가 이끄는 연구팀에 의해 대한민국의 과학이 실종되어 버리는 지금의 상황이 나는 너무나 안타깝다. 팀내 안규리 교수는 이번 일로 후배 과학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많은 염려를 하셨지만, 정작 젊은 과학자들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선배 과학자들의 태도와, 의심하고 문제제기하는 과학자로서의 본능과 양심을 사회적으로 거세당한 참담함에 괴로워하고 있다. 이를 짓밟고 성취한 국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학입국을 꿈꾸는 대한민국을 정말 가치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과학도로 첫발을 내디딜 때 가슴에 품은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진리는 나의 빛이니(VERI TAS LUX MEA)!"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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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피디수첩>의 비윤리성에 대한 성찰 들어가며 PD수첩에 대한 방송 취재윤리 위반에 대해 MBC가 사과를 하고나서 그 파장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도 'PD수첩 방영 후 논란, 한국사회의 내셔널리즘과 노동중독'이라는 글을 쓴 상태라 그 심정은 참으로 무겁고 참담하기까지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이제는 정말 MBC PD수첩 방영에 대한 내용을 진지하게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더 암담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정말 PD수첩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지난 PD수첩 방영 직후에도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매국노와 난치병 치료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으로밖에 비추지 않았지만, 아마 이제는 아직도 정신못차렸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상황이 바뀌었으니 그에 대한 변명을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PD수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과제와 교훈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PD저널리즘 프로의 문제점과 한계 그동안 우리는 여러 방송사에서 시사고발프로로 일컬어지는 소위, PD가 직접 보도를 하는 PD저널리즘 프로를 접하고 있다. KBS '추적 60분', '시사투나잇', SBS '그것이 알고싶다', '세븐데이즈' 등이 PD수첩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대표적인 PD저널리즘 프로라 할 수 있다. 이미 국민일보 12월 5일 인터넷판에도 문제제기한 것처럼 이러한 프로들은 이미 선정적 소재와 몰래카메라 등의 위장 취재, 사생활침해, 인권침해 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는 - 우리가 지금까지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 사실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이 PD저널리즘 프로에 대해 접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위장 취재, 사생활 침해, 인권 침해 등 문제들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문제에 대한 고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문제의 성질이 달랐다. 사회적 정서가 PD수첩 내용에 대해 이미 엄청난 항의를 가져오고 있던 터라, 취재윤리 문제까지도 도마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취재윤리 문제가 절대 하찮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취재윤리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PD수첩의 이번 취재윤리 위반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아마 이번 문제로 MBC는 창사 이후 최대의 타격과 함께 현재의 흐름대로라면 최문순 사장 퇴진 등 더 큰 문제로 비화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MBC는 그에 대해서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년간 문제삼지 않았던 공공연한 취재윤리 위반을 이번 PD수첩이 그렇게 공격을 받는 것은 어쩌면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한 방영을 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윤리'에 대한 사회의 성찰 이번 사태를 보면서 사실 우리 사회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윤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였지 않나라는 것이다. PD수첩 방영에 대한 황우석 교수 연구의 문제는 생명'윤리'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었고, PD수첩 취재에 대한 방법에 대한 문제는 취재'윤리'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었으며, 지난 'PD수첩 방영 후 논란, 한국사회의 내셔널리즘과 노동중독'의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의 자본과 성과를 위해서는 과정의 문제는 눈감아줄 수 있다는 자본'윤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이 사회가 결과만을 중시한 채,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하찮게 여겼냐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련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지 않으면 그 결과는 본질적 성찰을 얻기 어렵지 않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MBC 취재윤리 위반만을 비판 하는 것도 그동안 계속적으로 문제가 된 PD저널리즘 프로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도움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고발을 하기 어려운 언론의 목적까지 훼손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이는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해 난자매매나 연구원 난자 사용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줄기세포 연구 자체를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히려 이번 PD수첩 방영 후 MBC앞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PD가족들의 사진까지 올리는 것도 서슴치 않는 네티즌들은 이른바 '매국노'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왜 그리 생명'윤리'에 대해 걱정을 했는지를 역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취재'윤리' 문제에서 얻었으면 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양비론이 아니다. '윤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노동중독 사회의 흐름과 연결고리로 보지 않는다면, 지금 나타나는 어떠한 비판과 비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황우석 교수가 연구에 참여하기 어려운 심적 부담과 함께, 더 이상 여론이 강하면 사회 고발하기 어려운 방송가의 눈치만 커지게 될 것이다. 그 둘은 우리 모두 원치 않는다. 재차, 이제는 차분한 길을 걷자 이미 지난 글의 마무리로 '이제는 차분한 길을 걷자'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차분한 길을 걷자고 하고 싶다. 소모적인 현상비판이 아닌 우리 사회에 대한 본질적 접근 없이는 이번 PD수첩과 황우석 교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PD수첩의 난자매매와 연구원 난자 사용 문제는 충분히 문제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국익에 갇혀 생명'윤리'를 하찮게 여기고 있는 사회 풍토에서 상당한 사회적 환기를 일으킬 수 있는 방송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DNA 검증 등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을 비전문가가 검증하는 대단히 큰 오류와 자아독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PD수첩은 그 문제에 대해 과학계가 나서서 자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만 했어야 했다. 그에 대해서는 9시 뉴스 전 내보냈던 사과가 충분치 않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역시나 PD저널리즘 프로를 하고 있는 타 언론사의 반응이었다. 4일 MBC의 사과방송을 봤을 때 느낌이 씁슬하였다는 표현을 한다면, 5일 PD저널리즘 방송을 하고 있는 다른 방송사 언론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자기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PD수첩만 문제였다'는 반응을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역겹다는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다. 거기에 PD수첩에서도 그런 적 없다고 말한, "죽이러 왔다"라는 상식적일 수 없는 표현까지도 진실 확인여부 없이 내보내는 일부 신문들의 지면을 볼 때면 암울하기까지하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PD수첩이 제기한 문제는 덮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과학계 등 전문가가 이에 대한 명확한 검증이 있지 않는다면 지금의 줄기세포 연구 초기 단계를 지나고나서는 더욱 문제가 심각해질 수 밖에 없다. 앞으로 임상실험 후 상용화가 되기 위해 30년이 걸린다고 봤을 때 이제 줄기세포 연구가 걸어온 길과 PD수첩의 문제제기는 빙신의 일각이라 할 것이다. 과학계의 검증과 자기성찰이 없다면 해외에서는 끊임없이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의심을 할 수밖에 없고, 연구 자체를 떠나 한국 사회는 '윤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회라는 오명만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또한 이는 우리 사회의 학계에 전반적으로 퍼진 것과 같이 다른 교수의 결과물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 되어버린 암묵적 동의만을 키울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5일 민주노동당이 성명을 낸 것과 같이, PD수첩의 취재윤리 문제는 비판받아야 하지만, 여러 의혹에 대해서는 과학계가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PD수첩 방영은 그 방송에서 이야기하고자했던 목적과 취재방법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의 '윤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성찰할 수 있던 계기가 된 것 같아 반성과 과제를 동시에 던져준 사건이었다. 이 글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또 PD수첩에 대해 비판하더라도, 그저 MBC만이 책임을 지고 끝낼 문제가 아닌 것은 바로 이러한 성찰 과제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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