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에서 공무원으로 살던 자말씨와 부인, 다섯 딸은 내전을 피해 고국을 탈출했다. 그리스와 말레이시아 등을 떠돌다가 지난 5월7일 제주에 왔다. 자말씨의 큰딸 살와가 제주시 한림읍의 바닷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제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래는 어디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아리온은 키타라(기타의 원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유랑민이었다. 아리온의 노랫소리는 천상의 음성처럼 아름다웠고 영혼을 적시는 그의 연주에 누구든 가던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이름은 널리 퍼졌고 사방에서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초청장을 보내왔다. 아리온이 시칠리아에 가서 연주를 했을 때 시칠리아인들은 보석과 비싼 선물을 주며 그가 시칠리아에 영원히 머물기를 간청했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를 배웅하는 수백명의 시칠리아인과 헤어져 아리온은 배에 올랐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선원들은 그를 죽여 그가 가진 금은보화를 강탈하려 했다. 아리온은 뱃머리에 올라 살아생전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검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깊은 바닷속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나타난 돌고래 무리가 물에 빠진 아리온을 등에 태우고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리온을 구해낸 고래들은 엄호하듯 그를 둘러싸고 헤엄쳐 그가 살던 코린트로 데려갔다. 아리온은 이후로도 아름다운 연주를 계속했고 그때마다 돌고래들이 해변을 찾아와 그의 노래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수천년 동안 유럽 화가들의 단골 소재가 되어온 아리온 이야기는 그저 전설일까? 고대 그리스의 은화에도 고래를 탄 아리온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분쟁 피해 2006년 그리스로 이주
2010년 예멘으로 돌아왔다가
내전 격화돼 다시 난민 처지
중학교 졸업 뒤 3년째 학교 못 가
살와(19)는 고래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삶이 가장 평온하고 행복하던 시절, 그는 바닷가에 살았다. 살와는 바다의 푸른빛을 사랑했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고래를 보는 것이 기적 같았다. 고래의 거대한 몸집과 부드러운 유선형의 몸매가 경이로웠다. 지금 그는 제주도에 있지만 아직 고래를 만나지 못했다. 여유롭게 바닷가에 나가보지도 못했다. 살와는 예멘에서 온 난민 소녀다. 지난 12일, 나는 제주도에서 그와 그의 가족을 만났다. 수줍은 미소에 속눈썹이 긴 여성이었다. 나는 그에게 예멘의 복잡한 정치 상황이나 예멘 난민의 처참한 현실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다만 나는 평범한 10대 청소년이 낯선 땅 한국에 와서 어떻게 지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와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오랫동안 바다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날 고래는 보이지 않았다.
자말씨와 그의 딸 살와가 임시 거처인 제주시 한림읍 한 아파트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제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섯 자매가 머무는 곳
찜통처럼 무더운 날씨였다. 그가 머무는 임시 거처는 제주시 외곽의 해안가 마을이었다. 도착할 때까지 나는 그가 있는 곳의 정확한 주소를 받지 못했다. 마을 입구까지 왔다고 전화를 거니 살와의 아버지가 마중을 나왔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의 부인과 다섯 자매가 나와서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살와는 다섯 자매의 맏이다. 한국말도 예멘말도 영어도 아닌 무언의 인사였지만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는 듯 팔짝팔짝 뛰는 넷째(11)와 막내(8)의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떠들썩한 환대였다. 아버지 자말(42)이 현관 옆 작은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두어 평 남짓한 작은 방에 이 집의 유일한 에어컨이 있기 때문이다. 일곱 식구가 함께 둘러앉자 방이 꽉 찼다. 방의 한쪽 벽면에는 ‘가갸거겨’가 적힌 한글 공부판과 시간과 요일을 묻고 답하는 한글 문장들이 커다란 전지 위에 적혀 있었다.
―한글 공부를 하나 봐요?
“한국 친구가 와서 한글 공부를 시켜줘요.”
예멘에서 농업국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아버지 자말이 영어로 통역을 했다.
―다 같이 배우는 거예요? 누가 제일 잘해요?
막내가 두리번거리다가 손가락으로 살와를 가리키며 수줍게 배시시 웃었다. 살와와 둘째(17), 셋째(15), 그의 엄마(42)는 머리를 가린 히잡 차림에 긴소매, 긴바지를 입었고, 넷째와 막내는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히잡은 몇살부터 쓰는 거예요?
“14살부터요. 어릴 때는 안 쓰고,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써요.”
―이렇게 더운 날 집 안에서도 히잡을 쓰고 있나요?
“집 안에 식구들끼리 있을 때는 안 쓰는데, 남자가 오면 써야 해요. 사촌이라 해도 남자가 오면 히잡을 쓰죠.”
―저만 왔으면 괜찮은데 이분 때문에 쓴 거군요.(웃음)
사진 촬영을 위해 동행한 강재훈 기자를 가리키며 눈을 찡긋하니, 어린 아가씨들이 입을 가리고 웃는다. 작은 벽걸이형 에어컨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시원한 바람은 나오지 않았다. 옆방에서 선풍기를 들고 왔다. 평범한 한국 가정의 살림집이었다. 방 한쪽엔 피아노가 있고 낮은 책꽂이에는 한국 그림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아, 여기 피아노도 있네요. 쳐 봤어요?
“아뇨….”
셋집을 통째로 빌려준 집주인에게 행여 폐를 끼칠까 살림살이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 같았다. 제주도에 도착해 두번째 묵는 거처이다. 지난 5월에 제주도에 와서 선량한 주민을 만나 그의 농장에서 한달여를 머물고 다시 그의 지인 소개로 이곳에 한달간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벌써 2주가 지났으니 남은 2주 동안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한다.
자말씨 숙소에 붙어 있는 한글 공부 자료. 제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살와’, 근심 없이 행복해지라는 이름
―보통 하루 일과가 어떻게 돼요?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하고 청소하고… 오후 2시부터 이민자센터에 가서 공부해요.”
제주도 이민자센터에서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4시간씩 진행하는 공부 모임이 있다는 걸 알고 며칠 전 아버지가 등록을 해줬다. 일본과 중국 친구들 넷과 살와네 자매 중 셋이 함께한다. 한국말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간식도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수업시간이 요즘 살와에겐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이민자센터 프로그램은 10대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넷째와 막내는 그 시간에도 갈 곳이 없다. 그들은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들이 어떤 교재로 어떻게 공부하는지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임시 거처에 사는 일곱 식구
“예멘은 전쟁 끝나면 돌아갈 곳
지난 5월 제주에 도착했을 때
‘이제 안전하겠구나’ 안도”
―동생들은 종일 뭐 하고 놀죠? 텔레비전은 있어요?
“텔레비전 없어요. 와이파이가 됐다가 안 됐다가 하는데, 와이파이가 될 때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도 보고요….”
살와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가느다란 소리로 답했다. 이들에게 핸드폰은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다. 와이파이가 운 좋게 연결될 때는 동생들이 좋아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게 하거나 예멘 뉴스 방송을 찾아서 본다. 제주도의 예멘 난민 문제가 한국 내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는 것도 살와는 예멘의 뉴스를 통해 알았다. 아이들이 걱정할까 봐 부모님은 그간 자세한 사정을 들려주지 않았다.
―살와란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무슨 뜻이에요?
“걱정 근심을 잊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뜻인데,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걱정 근심 잊고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예요?
“한국 친구들이랑 만나서 밖에 나갈 때요. ‘오름’이라는 곳에 가봤어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여기 바닷가도 가봤어요? 저 앞으로 조금만 나가면 바다인데.
“아뇨….”
―제주도 바다를 코앞에 두고 왜 안 가요? 5분만 걸으면 닿을 텐데.
“…….”
살와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들 가족을 도와주는 기독교인들이 와서 데리고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웬만해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혼자 동네를 산책하거나 동생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지도 않는다. 말도 글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 그들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이웃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일까?
―‘근심을 없애주는’ 살와에게 제일 큰 걱정거리는 뭐예요?
“학교요.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하는데….”
살와는 중학교 졸업 이후 3년째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남들이 한창 미래를 준비할 시간에 혼자만 허송세월하는 것이 못내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이렇게 살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살와는 가슴이 탄다. 정상적인 환경이었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나이지만, 지금 그의 입학을 허락하는 학교는 없다.
살와는 “세상의 선의를 믿는다”고 했다. 제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덴의 푸른 바다
살와는 간단한 영어 대화가 가능하지만, 긴 얘길 해야 할 때는 아버지에게 통역을 부탁하거나 핸드폰의 구글번역기를 통해서 내게 영어로 쓰인 문장을 보여주었다. 제주도에서 그를 만나고 올라온 뒤, 나는 아버지의 통역 없이 살와와 직접 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어 여러 차례 추가 질문을 전자우편으로 보냈고, 그때마다 살와는 아랍어로 쓰고 영어로 번역한 문장을 내게 보내주었다. 문장 사이사이, 하트나 스마일 이모티콘이 들어간 아기자기한 편지였다.
―한국 사람들은 예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예멘은 어떤 나라예요?
“한국하고는 많이 달라요. 지금은 내전 중이지만 언제든 전쟁이 끝나고 안전해지면 내가 돌아갈 곳이죠.”
―이렇게 고생을 시키는 나라인데, 그래도 돌아가고 싶어요?
“거기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태어난 고향이 있으니까요. 외지에서 오래 살더라도 어딜 가든 우리는 이방인이에요. 내 나라 같지는 않죠.”
딸들 공부시키려 한국행 결심
‘난민 반대’ 분위기 이해하지만
가족들에겐 전하지 않아
“낯선 이들에게 그럴 수 있어”
살와는 1999년 예멘의 수도인 사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나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공무원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23살에 결혼해서 첫딸인 살와를 낳았다. 예멘에서 가지고 나온 몇 장 안 되는 사진 가운데, 대여섯살 무렵의 그가 꽃술을 두른 말을 타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예멘은 큰 분쟁 없이 평화롭고 안정된 시절이었다.
2006년 정쟁으로 나라가 뒤숭숭해지면서 가족들은 그리스로 이주했다. 불안정하고 고단한 생활이었지만 살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게 그저 신나고 즐겁기만 했다. 그의 나이 일곱살이었다. 아버지는 아테네에 있는 유엔사무실을 찾아가 난민신청을 하고 6개월마다 아이디카드를 갱신해 가며 노동허가를 받아서 커튼 공장에서 막일꾼으로 일했다. 사무직으로 근무하던 아버지에겐 익숙지 않은 육체노동이었고 가족들을 벌어먹이기엔 아득한 생활이었지만 살와의 기억 속에 빈곤에 대한 기억은 특별히 남아 있지 않다. 난민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막내를 임신했고, 어머니는 입덧을 하며 고향을 몹시 그리워했다. 결국 2010년 난민신청을 포기하고 그의 가족은 다시 외가가 있는 예멘의 남쪽 항구도시 아덴으로 돌아왔다. 내전이 남쪽까지 번지면서 얼마 못 가 다시 북쪽 산악지대로 이주를 해야 했지만, 아덴 외갓집에 머무르던 2년 동안이 살와에겐 지금까지 삶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외갓집에선 누구하고 살았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가 넷 있었는데 둘은 결혼했고요, 이모 둘, 외삼촌과 같이 살았어요. 제일 슬펐던 일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예요. 내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미처 얘기도 못 했는데, 내 인생의 어두운 시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제게 알려주시지도 못한 채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죽는다는 건, 나의 전 세계가 흔들리고, 나의 선생이며 코치이며 든든한 이상형이 죽는다는 걸 뜻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외갓집은 학교에서 아주 가까웠고 바다에서도 가까웠어요. 외갓집 5층 발코니에서 학교가 빤히 보였죠. 바로 어제 일처럼 모든 풍경이 생생해요. 시장과 거리, 가게들과 생선장수, 골목골목 아주 특별하고 아름다운 추억들로 가득해요. 지금도 외가 식구들은 모두 거기 살고 있어요. 그때 이모들이 22살, 20살이었는데 막내이모하고 특히 친했어요.”
―세상의 막내이모는 모두 착한 것 같아요.(웃음)
“네. 이모는 제2의 엄마 같아요. 그런 이모를 가진 사람은 참 행복하죠. 이모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 다 즐거웠어요. 가끔 아침 7시에 바다에 같이 가서 장을 봐 오기도 했고요. 저녁이면 바다에서 갓 잡은 신선한 생선에 소금과 향신료를 뿌려서 구워 먹었어요. 그걸 마지막으로 먹은 게 벌써 5년 전인데 전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어디든 함께 다녔어요. 공원이며 시장이며 레스토랑이며 가게며…. 이모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있는 게 참 좋았어요. 늘 같이 놀고 음악도 같이 들었어요. 지붕 위에 올라가서 국수를 먹기도 하고, 날이 더울 때는 가끔 지붕 위에서 같이 잠들기도 했어요. 수시로 단전이 되었는데 그럴 땐 밤하늘의 별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죠. 그러면 외삼촌이 따뜻한 우유를 데워서 줬어요. 그 모든 날들이 정말 그리워요.”
아빠와 언니가 인터뷰하는 동안 살와의 동생이 빵을 만들고 있다. 제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전쟁에 승자가 어딨어요?
―전쟁을 직접 목격하진 않았나요?
“그리스에서 돌아왔을 때 아덴은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어요. 난 어렸고 특별히 전쟁을 실감하지 못했어요. 남부까지 위험해지면서 또 북부의 새로운 동네로 피난을 갔으니까 전쟁터를 직접 경험하진 않았죠.”
―왜 그렇게 싸우는 거죠?
“이기기 위해서요. 오로지 각 정파가 다른 정파를 이기기 위해서.”
―누가 이길까요?
“승자는 없어요. 서로가 서로를 죽이다가, 결국 다 같이 죽어갈 뿐이죠.”
―전쟁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계속 거기 있었다면 대학에 다니고 있었겠죠. 어쩜 조기졸업을 준비할 수도 있었을 거고. 학교에 못 다니면서 3년을 고스란히 잃어버렸어요.”
학교 얘기가 나오자 다시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전이 격화되면서 살와의 아버지는 2011년 말레이시아로 먼저 건너갔고 2년 뒤 그의 가족도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따라갔다.
―아버지가 없는 2년 동안 불안하지 않았어요?
“아니요. 아버지가 우리 곁을 지킬 거라는 걸 의심해본 적이 없어요.”
말레이시아로 옮겨가긴 했지만 아무것도 보장된 건 없었다. 말레이시아는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한 나라도 아니었고 난민법도 제정되어 있지 않았다. 체류 허가는 받았지만 합법적으로 노동허가를 받는다든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말레이시아에 2만명 가까운 예멘 난민이 나름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어서 9학년까지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나서 체류인 신분으로 살와가 정식 입학할 수 있는 학교는 없었다. 살와의 아버지가 한국행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도, 어떻게든 딸들에게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말레이시아와 달리 한국은 일찌감치 난민협약에 가입하고 난민법도 제정한 나라가 아닌가. 지난 5월 그의 가족들은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가 어떤 곳인지 알았어요?
“네, 그럼요.”
―여기 오기 전에 한국에 대해서 들은 게 있어요?
“말레이시아에서 친구들이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어요. <후아유>도 보고 <싸우자 귀신아>라는 드라마도 재밌게 봤어요.”
―제주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어요?
“말레이시아랑 많이 다르구나. 모든 게 훨씬 짜임새 있고 정교하고 지성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여기 내리는 순간, ‘아, 이제 우린 안전하구나’ 안도했죠.”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확신에 찬 대답이 당황스러웠다. 진짜로 살와는 한국에서 예멘 난민에 대해서 어떤 얘기들이 오가는지 모르는 걸까. 예멘 난민을 거부하는 국민청원에 70만명 넘는 이들이 참여하고 서울과 제주에서 난민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정말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일까? 어디부터 얘길 해야 할까, 머뭇거리는데 살와가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뒤늦게 보내온 살와의 편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 이해해요
좋은 사람들 많다는 걸 믿어요
새로운 기회가 올 거라 믿어요”
“한국 사람들은 정말 친절해요. 예멘 난민이나 무슬림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긴 하지만요. 이것 보세요. (손거울 사진 보여주며) 한국 친구가 제게 선물로 준 건데요. 내가 고래를 좋아하고 푸른색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딱 아는 것처럼 이런 선물을 줬어요. 우릴 행복하게 만드는 이런 예기치 않은 일들이 정말 좋아요.”
곁에 있던 살와의 아버지가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딸들이 걱정할까봐 미주알고주알 바깥 얘기를 전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점심 먹자’는 얘길 언제 하나 싶어 아까부터 살와의 어린 동생들이 방문 앞에서 힐끔힐끔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듣는 앞에서 지금 한국 현실이 어떤지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는 없었다. 점심 먹고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
살와가 한글로 쓴 자신의 이름. 제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살와와 동생들은 한 달 동안 머무는 방 안 곳곳에 한글 단어들을 붙여 놓고 공부한다. 제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좋은 사람이 더 많으니 괜찮아요
손님이 왔다고 특별히 신경을 쓴 것 같았다. 닭을 토막 쳐서 쪄내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기름에 튀긴 예멘빵을 내놓았다. “빵 이름이 뭐냐?”고 하니까 8살 막내가 “하미르”라고 알려주며, 서툰 발음으로 따라 하는 나를 보고 깔깔 웃는다. 좁은 방 안에 밥상을 깔고 다섯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흐뭇하고 가장 서러운 밥상이었다.
“밥 먹고 우리, 바다 보러 갈까요?”
껄끄러운 밥알을 넘기다 말고 내가 말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점심을 마치고 살와랑 그 아버지만 차에 태워 밖으로 나왔다. 부근 해수욕장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차를 돌려 조용한 해변 카페를 찾았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서 더 물을 수 없었던 얘길 아버지에게 물었다.
―지금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고 계세요?
“그간 번 돈이 다 떨어져서 예멘에서 송금을 받아서 생활했는데 이제 그것도 거의 바닥이 났어요. 지금은 여러 고마운 분들 도움으로 버티고 있는데 2주 뒤엔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요. 딸이 다섯이라 아무 데나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한숨)”
―구직활동은 하고 계세요?
“대부분 고깃배를 타고 일부는 농장에 있는데, 예멘 사람들은 대개 북부 산악지방에서 농사짓다 온 사람들이라 배 타는 게 익숙지 않아요. 무슨 일이든 할 생각으로 저도 배를 타기로 했는데, 그 배가 제주 해역을 벗어난다고 배에 태울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어요. 난민들이 제주도 벗어나면 안 된다고요.”
―호의를 갖고 있는 분도 많지만, 예멘 난민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요.
“이해합니다. 저희가 가는 곳마다 그런 시선에 부딪혀왔으니까요.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그러실 수 있죠. 예멘 안에서도 심지어 남부 살다 북부 가거나, 북부에서 다시 남부로 가면 거기 사람들이 이방인으로 취급했어요.”
나와 아버지가 나누는 얘기를 들으며 살와의 커다란 눈망울이 더 동그래졌다.
―이런 얘기 처음 들어요?
“네, 부모님이 얘기하지 않으셔서….”
―10년 뒤에, 살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길 바라요?
“제 오랜 꿈은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천연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를 차려서 사업을 하는 거였어요. 근데 지금은… 어디든 안전한 곳에 정착하는 게 젤 중요하죠. 얼른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가 집세 마련하는 걸 돕고 싶어요.”
그날 제주 바다는 눈이 시리게 푸르렀고 우리는 말이 끊길 때마다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 뒤 내게 보낸 전자우편에서 살와는 이렇게 썼다.
“지난번 만나고 난 뒤, 저희 난민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낯선 이방인들이 들어오니까 여기 계신 분들이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 이해가 돼요. 근데 난민들은 전쟁 때문에 살 수가 없어서 도망 나온 사람들이에요. 안 그래도 된다면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을 누가 떠나고 싶겠어요? 모든 부모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자기 자식이 내일까지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자식을 돌보는 거예요. 그게 어떤 건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전 믿어요. 남을 돕고 좋은 일을 하는 걸로 스스로 자존감을 느끼는 좋은 사람들. 그러니 삶은 여전히 멋진 거예요. 아직 동생들한텐 자세한 상황 얘길 하지 않았어요. 공연히 걱정하고 슬퍼할까 봐. 저도 이따금 절망적인 느낌이 들곤 하지만, 다시 일어설 거예요. 나 자신을 믿고 세상의 선의를 믿고 매일매일 새로운 기회가 올 거라고 믿을래요.”
내 핸드폰에 저장된 살와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제주도 푸른 바다 앞에 망연히 서 있던 19살 소녀의 뒷모습. 그는 언제 고래를 볼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는 건 망망한 대해와 흰 파도뿐이었지만, 어쩜 고래는 그날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와 물 밑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살와의 한국인 친구가 선물한 고래그림이 그려진 손거울. 제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살와가 직접 그린 가족
엄마(42) - “자연과 꽃을 사랑하고 모든 색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분이에요.”
살와(19) - “그림 그리기와 독서를 좋아하고, 푸른색과 검은색을 좋아해요. 동물 중에서도 특히 고래를 좋아해요.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게 꿈이에요.”
첫째 동생(17) -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최고의 동생이에요. 역시 푸른색을 좋아해요. 홈데코레이터가 꿈이에요.”
둘째 동생(15) - “검은색을 좋아하는,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어하는 동생이에요.”
셋째 동생(11) - “그림 그리기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동생이에요. 금색을 좋아하고 딸기를 좋아해요. 화가가 꿈이에요.”
막내 동생(8) -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정말 잘 그려요. 보라색을 좋아하고 블루베리와 딸기를 좋아해요. 선생님이 되고 싶어해요.”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