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는 창간 30돌 특별기획 ‘노동orz’를 통해 낮게 웅크린 노동자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 낮밤을 바꿔 일하는 제조업체 노동자와 감정·감시 노동의 이중고를 겪는 콜센터 노동자, 법·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들의 삶을 전해드렸습니다.
기술 발달로 배달대행 앱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일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위탁계약’을 맺은 탓에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분류됩니다. ‘노동orz’의 이번 장면은 두 바퀴에 몸을 의지해 아스팔트 위로 쫓기듯 내몰린 배달대행기사들입니다.
5G 기술이 적용된 드론 1218개가 평창 밤하늘에 오륜기를 그려낼 만큼 기술이 진화했기 때문일까. 이기재(46·이하 모두 가명)님은 두달 전 중국집에서 플랫폼 배달대행업체로 소속을 변경했다. ‘배달의 꽃’이었던 중국집 배달원 생활을 10년 넘도록 한 뒤였다. 20년 전 고향 대구에서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온 기재님은 숙식을 해결하려 서울 강남의 한 갈빗집에서 오토바이 핸들을 잡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배달은 구하기 쉬운 일 가운데 하나였다.
‘잘나가던 때’도 있었다. 기재님은 20대 중반 대구에서 자동차 판매 영업사원으로 돈깨나 벌었다고 한다. 고객의 비위를 맞춰가며 2년 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향수 가게를 차렸다. ‘사장님’이 되자 마음이 풀어졌다. 생업은 뒷전이었고 술집을 들락거렸다. 2년 만에 가게를 접었다. 기재님이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온 이유다.
‘누가 이런 놈이랑 결혼해줄까.’ 결혼은 팔자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살던 몇년 전, 맘에 맞는 여성을 만났다. 세 딸까지 다섯 가족이 됐다. 중국집에선 한달에 4번 쉬고 하루 12시간씩 배달해 월 230만원 정도를 손에 쥐었다. “가게 주인도 힘드니까….” 기재님은 야근수당 같은 건 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
어느 순간 배달대행업체가 우후죽순 생기더니, 주변 가게들이 배달원을 고용하는 대신 배달대행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배달원들이 하나둘 중국집을 떠나 배달대행업체로 향했다.
기재님이 버는 230만원으론 다섯 식구가 살기에 빠듯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7년 대도시 5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는 224만8413원이다. 1년 동안 중국집 배달이 끝난 뒤 3~4시간 동안 기자가 근무했던 ㄴ배달대행업체에서 투잡을 뛰었고, 지난 5월1일부턴 아예 배달대행업체로 전업했다.
기재님은 ㄴ업체에서 오전 11시부터 일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 12시간 일하지만, 기재님은 자정이건 새벽 1시까지건 콜이 있으면 일을 계속했다. 주 6일도 모자라 딱 반나절 쉬었다. 반나절은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밀린 잠을 잘 수 있는 정도다. 기재님은 “일하는 만큼 버니까” 그냥 일한다고 했다. 기재님은 네살배기 딸이 뒤집기와 배밀이를 하는 순간, 탁자를 붙잡고 일어선 순간, “아빠빠빠”라고 처음 말한 순간들을 함께하지 못했다.
하루 13~14시간씩 일하는 기재님은 ‘반좀비’ 상태다. 퇴근하면 멍하니 있다가 겨우 5~6시간 잔다. 기재님의 삶의 목표는 “돈, 돈, 돈 벌기, 딸 셋 잘 키우기”뿐이다. 아직 40대 중반이지만 치아가 안 좋아 점심은 빵으로 때운다. 체력이 떨어지면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공원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콜을 잡는다. 이렇게 ‘반좀비’ 생활을 하다 보니 중국집에서 일할 때보다 한달에 100만원가량 더 번다. 기재님은 “좀더 일찍 배달대행으로 넘어올걸 그랬다”고 했다. 기재님의 하루 평균 오토바이 주행거리는 300㎞가 넘는다.
장수경 기자가 지난달 2일 서울 마포구 빵가게에서 음식을 받아 배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6×12=72’ 배달 기사들은 보통 하루 12시간씩 주 6일을 일한다. 72시간. 법정 노동시간인 주 40시간의 두배에 가깝다. 그마저도 제시간에 퇴근하는 법이 없다. 콜 수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단순한 급여 체계는 배달대행업체 기사들의 몸을 하루 내내 아슬아슬한 두 바퀴 위로 밀어낸다.
기자가 배달 기사로 일한 ㄱ업체와 ㄴ업체 모두 근로 개시 시점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ㄱ업체에서는 ‘주 5일·6일’, ‘하루 10시간·12시간’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본부장은 기자에게 “다들 하루 12시간씩 주 6일 동안 일한다. 일하는 만큼 벌어 가니까”라며 은연중에 장시간 근무를 유도했다. ㄱ업체에서 기자를 제외하고 유일한 여성 기사였던 지우(33)님은 “언니, 주 6일 하지 마. 나는 꼭 해야 하는 줄 알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 입술 터진 게 몇주째 안 나아”라고 말했다. ㄴ업체는 파트타임을 제외하면 무조건 ‘하루 12시간, 주 6일’ 근무를 하도록 했다. 근로복지공단 조사(2016)를 보면, 배달 기사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0.6시간, 주 평균 근무일은 6.0일,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63시간에 달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해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주당 평균 노동시간(53.2시간)보다 10시간이나 많다.
중국집 배달 10년 경력 기재님
다섯식구 살기 빠듯해 13~14시간씩
주 7일 중 딱 반나절 ‘밀린 잠 휴식’
점심은 빵…늘 멍한 “반좀비” 자조
100만원 더 벌려 하루 주행 300㎞
퀵 15년 하다 넘어온 기동님
교회 가는 일요일은 쉬고 싶지만
업체 “콜 많아 안돼”…오후 출근케
3년 만에 처음으로 1주 장기 휴가
제주 친정 가버린 아내·아이들 만나
2015년 11월부터 ㄱ업체에서 일한 김기동(42)님은 지난 5월 초 3년 만에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장기 휴가’를 떠났다. 배달대행업체 기사들은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휴일수당은 물론 여름휴가도 없다. 기동님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2시간 주 6일 동안 일한다. 교회에 나가려고 일요일에 쉬고 싶었지만 회사는 휴일에 콜이 많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일요일엔 오후 2시 반부터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기동님은 퀵서비스를 15년 정도 하다가 ㄱ업체로 넘어왔다. 군에서 제대하고 처음으로 한 일이었다. 당시 서울 도심의 무역회사에서 김포공항으로 송장을 보내는 퀵서비스 업체 중 한곳에서 일했다. 마포구 서교동 인근에서 번성하던 퀵서비스 업체들은 인천국제공항이 생기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기동님의 일자리가 불안정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 오는 날 운행하다 사고가 났고 팔이 부러졌다. 몇달 동안 일을 할 수 없었다. 아내와 불화가 생겼고, 아내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딸과 다섯살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제주로 떠났다. 그 뒤 아이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는 기동님은 지난 5월 휴가를 받아 중학생이 된 딸과 초등학생이 된 아들을 만나러 제주로 갔다.
장수경 기자가 배달대행업체에서 빌려 탄 오토바이
■ “하아, 동화책 전집 30만원 주고 샀대” “남북 정상의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군사분계선에서 악수를 나눈 두 정상은….” 4월27일, 라디오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사무실 밖에서 통화를 마치고 들어온 광연(34)님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동화책 전집을 30만원 주고 샀대. 대체 콜을 몇개 잡아야 하는 거야.” 광연님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한살, 다섯살짜리 딸이 있다.
대학에서 세무경영을 전공한 광연님은 경기도 포천에서 유통회사에 다녔다. 회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이후 화곡동에 본사가 있는 인형뽑기기계 관리 회사에 입사했다. 입사한 지 7~8개월 지났을 때 회사는 월급제에서, 관리하는 인형뽑기기계 수익에 따른 성과급제로 바꾼다고 통보했다. 동료 세명과 함께 그만뒀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과일 가게에서 일하면서 투잡으로 배달대행에 뛰어든 게 5년 전쯤이다. 배달 일은 익숙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과일 배달을 했었다. 중학생 땐 면허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에 과일을 날랐다. 그 시절엔 가능한 일이었다.
광연님은 동네에 있던 ‘○○○콜’이라는 작은 배달대행업체에서 배달 기사로서 첫발을 뗐다. 배달 콜비가 다른 곳보다 500원 적었지만 의리상 그냥 다녔다. 비 오던 어느 날 왕복 2차선인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봉고차 한대가 내리막길에서 밀렸는지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하며 튀어나왔다. 전치 5주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고, 그사이 회사가 문 닫았다. 퇴원하고 이런저런 일을 찾다 ㄱ업체에 온 지 20개월이 됐다.
‘창천의 아들’인 광연님은 ㄱ업체의 전설이다. 그는 이제껏 3명밖에 없었다는 ‘하루 80개 배달’의 주인공이다. 광연님은 지난해 여름 12시간 동안 무려 83개를 쳤다. 그날 종일 먹은 거라곤 붕어빵 4개가 전부였다. 그것도 배달을 마치고 픽업 가는 길에 인도에서 팔던 붕어빵을 2000원어치 사서 비닐봉지를 핸들에 걸어놓고 운전하면서 먹었다. 그날은 콜이 딱딱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운이 따라줬지. 그런 날이 있어.”
어린이날인 5월5일 사무실에 나온 광연님은 “다음주에 놀이공원에 가자”고 전화로 딸을 달랬다. “하루 10만원 주는 데가 어디 있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힘들어. 돈 못 벌어서 장난감도 못 사주는 것보다 낫잖아.” 광연님은 큰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 갈 곳 잃은 청년들 만만치 않은 취업 전선에서 활로를 찾지 못한 청춘들도 ‘배달의 기수’로 진로를 돌렸다. ㄱ업체에 들어오기 전까지 민준(32)님과 준헌(26)님은 주방에서 칼을 잡았었다. 민준님은 군에서 취사병으로 처음 주방 일을 배웠다. 2년이 지난 뒤 요리는 꿈이 됐다. 민준님은 제대하자마자 송파구의 한 일식집에 취직했다. 회 뜨는 걸 처음 배웠다. 1년 정도 일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치킨집을 차렸다. 처음 2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대박 났다. 내 인생 이렇게 풀리는구나 싶었어요.” 대박 날 줄 알았던 가게는 주변에 치킨집이 늘면서 매출이 뚝뚝 떨어졌다. 민준님은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치킨집 직원들 월급을 줬다고 한다. 그렇게 버티길 1년, 결국 창업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30대 초반 나이에, 대학을 나오지 않은 민준님에게 ‘취업’은 넘기 힘든 허들이었다. “나이가 많다.” “아무래도 고졸은 좀….” 면접을 보는 족족 떨어졌다. 구직 사이트를 보다가 ‘월 500만~600만원 수익 보장’이라는 광고를 보고 무작정 ㄱ업체에 왔다. 광고만큼은 못 벌어도 주방에서 일하는 것보다 많이 번다. 민준님은 음식을 픽업할 때면 업장의 메뉴판을 유심히 살핀다. “언제까지 배달할지 모르겠지만 평생 하고 싶진 않아요. 돈 모아서 내 가게를 내고 싶어요.”
‘창천의 아들’ 광연님
초등 때부터 부모님 가게 과일 배달
‘하루 80개 배달’ 전설의 3인 중 한명
그날 종일 먹은 건 붕어빵 4개뿐
“딸 동화 전집이 30만원이래” 한숨
불안한 시간 그저 견딜 뿐
배달 절반이 취업전선 밀린 20대
‘고수익’ 허울에 위험지대 내몰려
독립영화 제작비 벌려던 선명님도
옷가게 접고 뛰어든 민수님도 결국…
대학에서 조리학을 전공한 준헌님은 호텔에서 일했다. 잠을 하루 3~4시간밖에 못 잘 정도로 바빴지만 일은 즐거웠다. 그런데 직장 동료이자, 함께 근사한 식당을 차리는 미래를 꿈꿨던 여자친구가 폐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폐섬유증을 앓다 떠난 뒤 주방에 들어가는 게 두려워졌다. 꿈을 잃었다는 준헌님은 5년간 일해서 1억원을 모으는 새로운 ‘꿈’을 정했다. 1억 모아서 뭘 할지는 아직 모른다고 했다.
배달대행업체는 민준님, 준헌님처럼 불안한 청년의 미래를 먹고 자란다. 근로복지공단이 2016년 조사한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배달대행업체 기사의 32%가 만 24살 미만이다. 만 29살 미만은 47.7%로 절반에 가깝다. ‘고수익’을 내건 광고를 보고 뛰어든 청춘들은 안전의 사각지대에 내몰린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배달대행업체는 건당 수수료가 높고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어 10·20대 청년들이 몰린다. 하지만 장기 근속의 가능성이 낮고 사고의 위험성도 높으며 노동권 사각지대에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가 지난달 2일 서울 마포구 빵가게에서 음식을 받아 배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떠나고 싶은 사람들 이들 모두는 불안한 시간을 그저 견뎌낼 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두 바퀴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했다. ㄱ업체에 온 지 두달 된 창교(44)님의 집은 경기도 부천이다. 출퇴근하기엔 다소 멀어도 마포 일대 지리가 익숙해 ㄱ업체로 왔다. 창교님은 지난 3월까지 서울의 한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 6년 동안 배달을 했다. 회사는 지난 3월 초 서울 지역 10여개 지점을 한번에 폐쇄했다. 창교님이 일하던 지점도 포함됐다. 일자리를 잃은 창교님은 함께 일하던 동료의 추천으로 ㄱ업체에 왔다.
창교님은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했다. 일본어를 좋아해 일본인 관광가이드를 하려고 준비했다. 일본으로 넘어가 2년 동안 신문 배달, 식당 일을 하며 생활 일본어를 익혔다. 행사장에 설치하는 부스 자재를 빌려주는 일본의 유명 회사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한국지사에 운 좋게 취업했다. 학력 대신 일본어 실력으로만 직원을 뽑은 덕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수지가 안 맞는다’며 3년 만에 한국에서 철수했다. 창교님은 실업자가 됐다. 일자리를 구하는 도중 생활비나 벌 요량으로 시작한 햄버거 배달이 6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 “나이는 먹고 돈은 계속 벌어야 하니까…. 오토바이 핸들잡이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정말 몰랐지.” 라면을 먹으며 창교님이 한숨을 쉬었다.
지난 4월 창교님은 ㄱ업체에서 180만원 정도를 벌었다. 햄버거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며 받은 월급과 비슷하다. 대신 햄버거 가게는 주휴수당도 있고 4대 보험에도 가입됐다. “햄버거 가게는 주문 들어온 것만 배달하니까 덜 위험해. 여긴 돈은 될 것 같긴 한데 콜을 잡아야 하니까…. 신호 위반은 예삿일이고.” 기자는 배달 기사 일을 그만둔 뒤 창교님이 다른 햄버거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독립영화 감독인 박선명님은 8월 크랭크인 예정인 영화제작비 때문에 핸들을 잡았다. 저예산 영화라 제작사를 잡지 못했다. 제작비 2000만원이 필요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고, 일도 자유로운 편이라고 해 배달대행을 시작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배달대행을 시작해보니 자율적인 시간 운용은 불가능했다.
선명님은 주 5일 하루 12시간씩 꼬박꼬박 일했다. 그러다 비 오는 어느 일요일에 직진 차선에서 갑자기 좌회전 차선을 가로질러 유턴하는 차량에 오토바이 앞바퀴를 들이받혔다. 발목을 접질려 병원에 가야겠다고 관제(사무실)에 연락했지만 “주문이 밀려 안 된다”는 답을 들었다. 아픈 발목을 절뚝이며 12시간 근무를 마쳤고, 일주일 뒤 회사를 그만뒀다. 선명님은 “주변에서 다치는 걸 자주 본데다 나도 사고를 당하니 더는 일하기가 무서워졌다”고 말했다.
선명님이 일을 그만두기 3주 전, 이민수(39)님이 일하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해 무릎을 두차례나 수술했다. 옷 가게를 접고 생활비를 벌 요량으로 ㄱ업체에 왔던 민수님은 “결국엔 돈도 못 벌고 몸만 다치고 떠나야 했다”고 한숨을 지었다. 생활에 치여, 목돈이 필요해서, 가족을 위해, 배달대행업체를 떠나지 못하는 기사들은 결국 제 몸이 다친 뒤에야 배달업 현장을 떠나곤 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6년에 낸 보고서 ‘배달대행 배달원의 종사 실태 및 산재보험 적용 강화 방안 연구’를 보면, 음식 배달대행 기사의 월 순소득액은 229만5000원이다. ‘용산의 아들’ 준헌님은 “30개 치기가 어렵지, 한번 넘으면 쑥쑥 는다”고 초보 기사인 기자를 독려했다. 하지만 이 정도 소득이 일주일에 ‘72시간’ 두 바퀴에 매여 아스팔트 위에 도사린 사고를 피해 다니는 대가로 만족스러운 수준인 걸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 아들’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