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김병로(1887~1964)는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우리나라 사법부의 기틀을 다진 이로 존경받는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안에 있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흉상 너머로 대법정 입구가 보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요즘 ‘가인’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서 ‘가인’을 치면 ‘가인(손가인)-가수’가 먼저 뜬 지 오래지만, 법조계에서 가인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을 말한다.
가인은 대체로 사법부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불려 나오는 경향이 있다. “가인이라면 지금 어떻게 했겠느냐.”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는 ‘사법 농단’의 한 귀퉁이가 드러난 지난 1월 어느 고위 법관도 가인을 언급했다. 재판은 오염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라며, 더더욱 ‘지고의 법정’인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청와대 민정수석 따위의 요청에 영향을 받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며, 터무니 없는 의심을 제기하는 일부 언론이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며 분기탱천하는 와중에 가인을 호명했다.
지난 5월25일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가 공개된 뒤 더 큰 파문이 일고 있는 요즘 가인은 ‘법조계 호명 순위’ 10위 안에는 너끈히 들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가인이라면 작금의 이 ‘사법 농단’ 사태를 보며 뭐라고 할까 궁금해졌다.
‘청와대, 너희들 관심 큰 사건이 뭔지 알아. 우리가 한번 뽑아봤는데, 이 목록 맞지? 대표적으로 원세훈 사건 말인데, 그거 정통성을 위협하는 너희들 아킬레스건이잖아. 그 사건 우리가 재판에서 잘 봐줄 수 있어. 신경 쓰이는 다른 사건들도 우리가 재판 잘해서 도와줄게. 그러니까 우리 CJ(대법원장)가 꼭 하고 싶어 하는 상고법원, 만들 수 있게 해줘.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는 법 아니겠어? 그리고 자꾸 훼방 놓는 법무부에는 인심 좀 쓰지. 영장 발부 기준을 확 낮춰주는 거지 뭐. 까짓 기본권이 대수겠어. 상고법원 반대하는 청와대 실세나 국회 법사위원들은 우리 쪽 고위직들이 일 대 일로 만날 거야. 밥 사고 술 사고 그러면 다 넘어오게 돼 있어. 그런데 너희들이 만약 우리 요구를 안 들어주면? 그럼 우리한테는 영장 심사도 있고, 재판도 있잖아. 우리 뒤끝 매워. 그러니 잘 해보자고.’
대략 이런 취지의 문건 수백 개를 법관이라는 사람들이 만들어 보고하거나 보고받고, 실행에 옮기고… 가인이 이런 후배들을 보고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대법원 1층 대법정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흉상. <한겨레> 자료사진
그래서, 누렇게 빛이 바랜 <가인 김병로 평전>을 다시 들춰봤다. 정치학자인 김학준 교수가 30년 전인 1988년에 펴낸 이 책에는 여러 사람의 기록과 기억 속 가인의 ‘육성’이 생생하다.
그는 1948년 8월16일 제헌국회 본회의에 출석해 취임 인사를 했다. 앞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만일에 다른 방면으로부터 간접이나 직접으로 강제를 받는다든지 어떠한 정실이 거기(재판)에 첨부된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리 소신을 갖고 나간다 하더라도 거기(재판)에 지장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사법 기관으로 하여금 유감없는 소신과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8.16 제헌국회 본회의, 취임 인사)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사법부를 손아귀에 넣고 싶어 했다. 재판 결과가 자기 생각과 다를 때면 사법부 들으라고 노골적으로 역정을 냈고, 때때로 으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법권을 민주주의의 장식물쯤으로 인식하고 있던 이승만에게 가인은 정면으로 맞섰다. 피난 시절인 1952년 부산에서 재선 욕심에 불타던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파 의원들을 감금해가며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자 그는 분노했다.
“폭군적인 집권자가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 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른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사법부의 독립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 10월12일 열린 제1회 법관 훈련 회동에서 가인은 ‘법관의 도(道)’를 강의했다.
“법관된 자로서는 어떠한 정실에 끌려서는 안 되겠다. 어떠한 사건에 있어서든지 친분과 감정 등을 초월하여 이성에 입각한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하겠다.” 그러면서 그는 법관의 몸가짐 제1번 항목으로 “세상 사람으로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꼽았다. 그러고는 “법관이 일반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법관으로서는 최대의 명예 손상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명예 실추는 법관 전체의 명예 실추가 되는 것입니다. 법관은 양심과 이성을 생명처럼 알아야 하며 이를 굳게 지킴으로써 법관된 책임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3월20일 열린 ‘1954년도 법관 훈련 회동’에서도 그는 법관의 자세를 거듭 강조했다.
“현실을 직시할 때, 세상의 모든 권력과 금력과 인연 등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우리들을 유혹하며 우리들을 정궤(正軌)에서 일탈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내 힘이 모자라서 이와 같은 유혹물들에게 유혹을 당하게 된다면 인생으로서의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법관된 존엄성으로 비추어 보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세상 사람이 다 부정의에 빠져간다 할지라도 우리 법관만큼은 정의를 최후까지 사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종신 집권을 꿈꾸던 이승만과 사법권 독립을 철칙으로 알던 가인은 물과 기름 같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2월20일 정기국회에 보낸 치사에서 사법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삼권분립 중에서 사법부의 형편이 말이 아니니, 경찰이나 검찰에서 소상히 조사해서 법원에 넘기면 법원에서는 그냥 백방(白放-죄 없음이 밝혀져 놓아줌)하며 범행과 상관이 없는 판결을 한다. 여러 해를 두고 본 결과를 치면 사법부의 재판관되는 사람들은 세계에 없는 행세를 한다. 법이 제대로 시행되도록 어떤 방편으로든지 재판장의 권한에 한정이 있어야 되겠다.”
국회가 반발하고, 대한변협이 성명을 내는 등 여론이 들끓었다.
가인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재판에도 간혹 과오가 있을지 모른다. 최근 밀수 사건의 피의자에 대한 석방이나 보석 허가가 여론화된 것으로 안다. 대법원으로서도 밀수범에 대해서는 엄중 처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양심껏 재판하는 일선 법관들에게 이를 시달하거나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해서 법을 운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지도 길지도 않은 인용문이지만, 가인의 마음가짐이 또렷이 보인다. 그는 그 엄혹한 시절에도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대법원장에 재임한 9년 3개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간섭과 압력을 뿌리치며 사법권 독립의 기틀을 다졌다.” 지금껏 ‘헌법의 수호자’, ‘법관의 표상’으로 존경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한 마디 한 마디엔 세월을 뛰어넘는 울림이 있다.
2014년 1월13일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이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의 50주기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데 여기 가인을 존경한다는 사람이 또 있다.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문건에 ‘CJ’(Chief Justice)라는 약어로 등장하는 인물, 유명한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처럼 모든 곳에 깃들어 있지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분’이다.
“모든 법조인의 사표로서 그리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온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가인 선생과 같은 분이 우리 곁에 계셨다는 것은, 사법부 나아가 우리나라 전체가 크게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특히 9년여의 재임기간 동안 정치권력 등 외부의 압력과 간섭에 단호히 대처하면서 사법부의 존엄과 권위 그리고 독립을 확고히 한 것은 선생의 큰 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재판 독립의 원칙은, 원칙과 대의를 저버리지 않고 사법부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일신의 안일을 내던지신 선생의 결연한 의지와 곧은 기개가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2014년 1월13일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이 가인 김병로 선생 50주기 추념식에서 읽은 추념사의 일부다. “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해서 법을 운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가르친 대선배를 기리는 자리에서도 그는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엄청난 사태를 예비하고 있었을까. 그해 6월부터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를 ‘돌격대’로 앞장세워 상고법원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행정처의 문건들이 양산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토록 절절한 존경의 염을 표했던 것일까.
강희철 선임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