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15일 ‘서울의 봄’은 절정을 이룬 듯했다. 서울역 앞에 운집해 신군부 성토대회를 연 대학생 10만여명은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던 행진을 멈추고 자진해산하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79년 10월 26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됐다. 이른바 10·26 사태로 인해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 유신헌법 공포로 구축했던 장기 독재정권이 막을 내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오른쪽)이 1979년 10월26일 저녁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를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아울러 유신독재 체제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0·26 사태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부터 이듬해인 1980년 5월 16일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 기간을 가리키는 이른바 ‘서울의 봄’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하고, 신군부가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국의 민주화는 10여 년이나 미뤄지게 되었다.
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 12·12사태
12.12 군사반란사태의 모의 장소로 알려진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단 소속 전차와 장갑차 부대가 새벽 경복궁을 철수해 새로 창설된 제1경비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당시 신군부였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 반란을 일으킨다. 1979년 12월 12일 발생한 이른바 12·12사태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육군 참모총장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대통령 자리를 승계한 최규하의 승인 없이 감행된 쿠데타였다. 이로 인해 전두환은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 실세로 올랐다.
대학가에서는 개강한 이후인 3월이 되어서야 신군부의 군사 반란이 알려지게 된다. 봄이 오면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요구 움직임이 본격화한다. 1980년 4월 서울의 대학교수들은 학원 민주화 성명을 발표하고, 학생 운동도 다시 활발해지게 되었다.
학생 총궐기와 ‘서울역 회군’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13일 밤과 14일에 이어 15일에도 3일째의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38년 전인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으로 서울시내 30개 대학에서 무려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한동안은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한 가운데 ‘서울의 봄’이 유지되고 있었다. 시위는 5월 내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날은 연 사흘째 계속된 시위로 분위기가 절정에 올랐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이어갔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이자 안전 문제가 우려됐다. 서울대를 비롯한 16명의 서울 소재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은 격론 끝에 해산을 결정한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만약 서울역에 탱크가 들어온다면 대규모 유혈사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서울역 회군’이라 부른다. 이 ‘서울역 회군’ 선택을 끝으로, 잔혹한 봄이 시작됐다.
언론사 검열
대학생들이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그날, 신군부는 여론을 왜곡할 목적으로 언론사에 검열 지침을 내려 보냈다. 주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학생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식의 기사는 모두 불가 원칙 .
-시위 현장에 나왔던 일부 학생들이 교통정리까지 했다는 것 등은 불가 .
-학생시위 기사 중 군인 코멘트 불가.
-박 신민당 대변인의 신 총리 담화 논평 중 “그러나 사태의 악화에 대한 책임은 총리가 보다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를 보이지 않은 것이 유감 ”, “과도정부가 좀 더 일찍 신민당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면 오늘과 같은 시국 악화는 초래하지 않았을 것 ” 등은 불가 .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언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던 상황에서 총학생회장단이 학생 시위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기는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전두환은 학생 시위의 실상이 대중에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보도지침 사건으로 김태흥씨 등이 구속된 데 대해 항의 농성을벌이고 있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회원들. <한겨레> 자료 사진.
당시 한국기자협회와 강제해직 기자 위원회 등은 ‘검열 거부’를 결의하는 연석회의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총과 칼, 군홧발을 앞세워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던 신군부에 맞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신군부의 5·17 쿠데타
잠잠한 듯 보이던 군부 내부에서는 개헌을 시도하려는 구군부와 유신독재의 기조를 유지하려는 신군부 사이의 세력 갈등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신군부인 전두환은 대학생들의 ‘서울역 회군’ 이틀 뒤인 5월 17일, 사회 혼란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감행한다. 신군부는 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계엄의 전국 확대’와 ‘국회 해산’ 등을 선포한다.
아울러 학생 지도자를 비롯해 김대중과 문익환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를 체포했다. 이들에게는 내란 음모 혐의가 씌워졌다. 당시 전두환은 이와 관련해 담화문을 발표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남한에서 공산화하려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대학 불안을 조장함으로써 남침을 위한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중략)”
전두환은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북한 공산주의자와 이에 동조하는 남한의 불순분자들의 난동으로 규정했다.
80년 5월24일 심야 비상국무회의 중앙청. 사진 제공 <경향신문>. <한겨레>자료 사진.
하지만 당시 미국, 일본 등 외신은 관련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하며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특히 미국 정부는 5월 18일과 19일 두 차례 공식 서명을 냈다.
“우리는 계엄령이 한국 전역으로 확대 실시되고, 대학이 폐쇄되고, 여러 정치 지도자와 학생 지도자들이 체포된 데 대해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한다. 정치 자유화를 향한 진전은 법 절차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 정부가 취한 행동이 한국의 문제를 악화시킬 것을 우려한다.(중략)”
미국 정부는 성명서에서 전두환 정권의 계엄령 선포와 정치적 탄압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5월 18일, 광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인 1980년 5월27일 광주상공에서 군 고위 간부들을 태운 헬리콥터가 비행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향한 신군부의 야욕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1980년 5월 18일,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광주 일대에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각 대학에는 계엄군이 배치됐다. 이에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우려한 학생 운동 세력이 투쟁에 나섰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민을 폭행하는 계엄군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그러자 신군부는 시위에 특전사 공수부대원을 투입했다. 이들은 학생과 시민을 가릴 것 없이 무차별 폭력을 가해 잔혹하게 진압했다. 시위에 나선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이 잇달았다.
광주 전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은 광주시민들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군인들은 시위대를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군인들의 무자비한 학살로 광주 시민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결국, 한국의 민주화는 6·10항쟁이 일어난 1987년 6월까지 늦춰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화운동- 성공과 좌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촛불혁명의 뿌리를 찾아서> 김종철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