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우리는 정말 알고 있을까?’ 이 질문이 시작이었습니다. 2009년 기자 네 명이 가장 낮은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들은 <한겨레21> ‘노동OTL’ 연속 보도로 엎드려 좌절하는(OTL) 노동자의 초상을 전했습니다.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다시 같은 질문을 되뇌어봅니다. ‘4차 산업혁명’ ‘초연결사회’ 등 거창한 혁신의 시대에 노동자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열심히 일해도 사는 게 팍팍하다는 노동자들은 어쩌면 더 작아진 것은 아닐까요?
깃발과 구호, 통계와 정책으로 살필 수 없는 날것의 모순을 <한겨레> 기자가 온몸으로 물었습니다. 더 낮게 웅크려(orz) 왜소해진 우리, 노동자의 삶을 ‘노동orz’가 정밀화로 그려냅니다. 첫번째 장면은 경기·인천 지역의 제조업 현장입니다.
‘탓 탓 탓… 탓 탓 탓… 탓 탓 탓….’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기계는 시트지가 들어있는 마스크팩 봉투에 에센스를 채워 넣고 밀봉해 컨베이어 벨트 위에 ‘탓’하고 떨어뜨린다. 1초가 안 되는 시간마다 마스크팩 세 개가 차례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작업대 위로 떨어진다. 1분마다 70여개의 마스크팩이 시차를 두고 작업대 위로 쏟아지는 셈이다. 작업대 앞에 앉아 제품이 제대로 밀봉됐는지, 유통기한은 선명히 찍혔는지, 정품 보증 스티커는 제 자리에 붙었는지 검사하는 게 내 일이었다. 기계를 보조해 불량품을 솎아내는 일이다.
지난 2월과 3월 경기도·인천 지역을 떠돌며 화장품 제조업과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업체 주야맞교대 노동자로 살았다. 주야맞교대는 두 개 조가 하루 12시간씩 번갈아 일한다. 주간조는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일하는데 보통 잔업을 더해 오후 8시30분에 공장을 나섰다. 야간조는 오후8시30분 일을 시작해 잔업을 포함하면 다음날 오전 8시에 퇴근한다. 2주일마다 낮과 밤을 통째로 맞바꾸는 셈이다.
인천 지역에서 주야맞교대 일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 구인·구직 사이트에 ‘주야2교대’를 검색하니 300여건의 구인공고가 떴고 그중 하나를 골랐다. ‘상여100%, 주야2교대, 마스크팩 포장 사원 모집.’ 해당 파견업체 전화를 건 뒤 1시간30분 만에 면접을 보러 갔고 18분 만에 면접이 끝났다. 7530원의 최저시급을 받는 일자리였지만 지원자는 많았다. 머뭇거릴 틈 없이 모든 과정은 속전속결이었다. 2시간이 못 돼 화장품 업체 파견 노동자가 되었다. 파견 노동자로 한 달 가까이 출근 도장을 찍은 화장품 업체는 마스크팩과 기초 화장품을 만드는 중견기업이었다. 인천에서 ‘화장품 공장’의 ‘검사·포장 업무’는 특별한 기술 없는 여성 노동자가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자리였다.
야간조로 처음 출근한 지난 3월5일 저녁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에 올라섰다. 누군가는 저녁 퇴근길의 피로를 달래며 동료와 직장 상사 뒷담화를 나눴고, 누군가는 전화로 저녁 약속 장소를 확인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인천 1호선의 한 지하철역 5번 출구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네온사인 불빛이 수놓은 밤 아래 통근버스가 정차했다. “좀 잤어?”, “오늘 진짜 한숨도 못 잤어요.” 대학생 정아(25·이하 모두 가명)와 잡담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달린 텔레비전엔 저녁 7시15분부터 방영하는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버스는 인천 시내를 이곳저곳 훑고는 어둠이 내리앉은 공단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 9일 저녁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반월공단에서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한 야간근무자들이 공장으로 향하고 있다. 안산/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멱살 잡고 끌고가는 컨베이어 벨트 주·야간 노동자가 바통 터치하는 교대시간이 되면 7평(23㎡) 남짓한 탈의실이 작업복을 벗고 입는 ‘언니(동료를 부르는 일반적 호칭)’들로 북적였다. 까만 줄무늬가 그려진 파란색 ‘제전복’을 입고 위생캡에 마스크, 안전화까지 착용하면 준비 완료다. 탈의실을 지나 작업장으로 들어서면 조장 언니 주도로 5분여의 조회시간이 이어졌다. 기계 소음을 뚫고 지시사항을 전달하느라 조장 언니의 목소리는 항상 쇳소리처럼 날카롭고 높았다. 오전이든 오후든 8시30분 정각이 되면 기계는 ‘철컹’하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20여대의 기계 중 9호기 혹은 11호기를 보조하는 게 내 일이었다.
2월27일 첫 출근날, 11호기 앞에 앉았다. 검사는 눈으로만 하지 않는다. 마스크팩을 그러모은 뒤 이리저리 돌려보고 내용물이 터져 나오지 않는지 몸의 무게를 실어 팔뚝으로 ‘뿌직’ 소리가 날 때까지 눌러야 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10여개의 마스크팩을 포개어 한꺼번에 검사하는데, 라벨은 제자리에 붙었는지(라벨불량), 마스크팩이 제대로 밀봉됐는지(실링불량) 등 10여가지 항목을 10여초 안에 검사해야 했다. 불량은 따로 빼두고 양품은 350개들이 상자에 2열로 차곡차곡 쌓았다. 같은 동작을 2500여번 반복해 3만여개 마스크팩을 검사하면 하루가 끝났다.
두 손에 든 10여개의 마스크팩의 검사를 마치지 못했는데 컨베이어 벨트 위로 마스크팩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검사를 기다리던 제품들이 산더미를 이루다 작업대 밖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마스크팩을 주워담는 순간에도 마스크팩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작업대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밀린 제품을 한쪽 박스에 몰래 치워뒀다. 기계를 만지던 언니의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다. 작업복 상의가 땀으로 흥건해졌다.
기계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손에 든 마스크팩의 검사도 다 끝내지 못했는데 기계는 독촉하듯 새 마스크팩을 컨베이어 벨트 위로 토해냈다. 자세 고칠 틈도, 간지러운 코를 긁을 틈도 없다. 들리지 않게 누굴 향한지 모를 저주를 내뱉었다. “망해라, 다 망해라.”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라고 느낀 순간이다. 몇 번이고 기계가 멈춘 듯 기계 소음이 잦아드는 착각에 시달렸다.
이날 함께 첫 출근한 40대 파견 노동자 두 명이 점심을 먹고선 사라졌다. “숨도 못 쉬겠어. 검사할 건 또 좀 많아? 오래 다닌 사람들도 겨우 따라가던데.” 이튿날 친구 손을 잡고 온 20대로 보이는 여성 두 명도 자취를 감췄다. 생리가 터진 것 같은데 화장실에 가겠다는 말을 차마 못했다는 23살 여성도 다음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3일은 일해야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위법하지만 암묵적인 룰’도 이들을 붙잡진 못했다. 일주일 새 그만둔 이들을 세어보다가 그만뒀다. 빈자리가 표날 새 없이 금방 채워졌기 때문이다.
고한솔 기자의 근무 이력과 월급명세표. *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12시간 주야 맞교대…철야 땐 속절없이 고개가 꼬꾸라졌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9호기 기계의 속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4개월여 일한 한 언니가 1~10호기의 속도는 모두 ‘25’에 맞춰져 있다고 했지만 ‘전설’같은 이야기를 전할 뿐이었다. 기계를 만지는 대부분의 언니들은 속도를 조절하는 버튼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최고 속도와 최저 속도, 평균 속도는 베일에 싸여있었다. 그래서 기계는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일한 지 반년이 넘은 언니와 기자와 같은 초보자는 모두 같은 속도로 일했다. 기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11호기에서 일하던 3월2일, 기계를 점검하기 위해서 컨베이어 벨트를 멈춘 상태였다. 컨베이어 벨트를 들어올려 오른쪽으로 잡아끌던 차 컨베이어 벨트가 되돌아나가는 부분에 오른손 중지와 약지가 끼고 말았다. ‘악’ 내뱉은 비명이 주변 기계음에 파묻혔다. 약지 손톱 밑 살점이 3㎝ 정도 들려 피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계를 봐주던 언니가 붕대를 반 롤이나 칭칭 감아 간이 깁스를 만들어줬다. “나도 똑같이 다친 적 있어. 낫는 데 3주 정도 걸리더라.” 손가락이 버벅대니 작업 속도는 느려졌고 처리 못 한 제품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산을 이뤘다. 보다 못한 언니가 말했다. “속도를 5 정도 낮춰 줄게.” 기계에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이 있고 작업자가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조장 언니를 비롯해 일한 지 반년이 넘은 언니 몇몇만이 기계의 속도 조절법을 알고 있었다.
일이 손에 익은 뒤엔 때때로 지루함이 찾아왔다. 시행착오를 거쳐 불필요한 움직임을 덜어내면 머리가 아닌 손으로 일하는 시점이 찾아온다. 기계가 나이며, 내가 기계가 되는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건 그 자체가 고통이다. 희진(22)이는 왼손에 손목시계를 찬 기자에게 의아한 듯 물었다. “언니, 시계 왜 차요? 시간 보면 오히려 짜증나지 않아요?” 물론 그런 지루함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익숙해졌다 싶을 때 기계 속도는 ‘더 빠르게’ 조정됐다. 전숙희(45) 언니가 말했다. “내가 일은 곧잘 하잖아. 그러니까 아예 최고 속도로 높이더라고. 원래 세 타임은 빡세게 뛰면 팔이 안 올라가거든? 그날은 한 타임만 했는데도 팔이 움직이질 않더라고.”
12일 새벽 1시 ‘점심’을 먹고 탈의실에 쪼그려 앉아 한숨 돌리던 차다. 오른쪽 손목에 3㎜ 높이로 솟아오른 물혹을 발견했다. 손목을 구부리니 손목 한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왔다. 아침 9시 퇴근하자마자 병원을 찾았다. 공단 근처엔 기계에 절단되거나 짓눌린 손만 전문으로 진료하는 ‘수부 전문 병원’이 있었다. 대기실에서 꾸벅꾸벅 졸다 진료실로 들어갔다. 결정종이라는데 관절에 무리가 가면 생긴다 했다. 어깨와 팔, 손목, 손가락 등 상체를 쉴 새 없이 움직이다 보니 마스크팩을 쥔 채 포개고 접고 돌리던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퉁퉁 부었다. 지문 인식으로 잠금상태를 해제했던 핸드폰은 어느새 내 엄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물혹은 일을 그만둔 뒤에도 한 달 가까이 없어지지 않았다.
생산직 노동자(설문 응답자 109명) 중 근골격계 증상이 적어도 1주일 이상 지속된 사람의 비율은 90%에 이른다(남동공단권리찾기사업단 노동자119, 2016년). 근골격계 질환이란 신체 부위를 반복적으로 부적절하게 사용해서 생기는 ‘골병’이다. 어깨, 허리, 팔·다리 신경·근육 등에 나타난다. 파김치가 돼 점심을 먹을 때다. 팔이 부들부들 떨려서 밥을 푸지 못하고 버벅댔다. 배식대에서 국을 퍼주던 조장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국 푸는 속도보다 밥 푸는 속도가 더 느리네.”
2주 주간근무 뒤 2주 야간근무
낮에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작업장선 핸드폰 금지 ‘세상과 단절’
0시30분에 점심을 먹자 ‘속 더부룩’
2시간마다 10분씩 쉬는 시간엔
탈의실 휴식을 위해 줄달음쳐야 했다
속절없이 꾸벅 3월6일 새벽 2시30분 첫 하품이 나왔다. 야간조로 접어든 첫날이었다. 전날인 5일 저녁 8시30분에 일을 시작해 어느새 자정을 넘겼다. 마스크팩을 들여다보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평소 수면 패턴에 비춰봤을 때 영화라도 봐야 깨어있을 수 있는 시각이다. 퇴근은 아직 6시간 가까이 남았다.
야간근무 경험이 있는 언니들은 4일 밤을 꼬박 새우고 5일 오후 눈을 붙이고 왔다. 전날 밤을 새우는 데 실패한 기자는 출근 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 4시30분 빚 독촉하듯 밀린 잠이 달려들었다. 저항할 새 없이 고개가 고꾸라졌다. 안 되겠다 싶어 일어선 채 작업했더니 이번엔 허리가 고꾸라졌다. 새벽 5시30분께 일어선 채 가수 트와이스의 ‘우아하게’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기계 소음에 파묻혀 노랫소리가 산산이 조각났다. 순간, 오른손이 손가락이 끼었던 그 지점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성에 섬뜩한 악몽처럼 그날의 고통이 떠올라 눈이 번쩍 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서운 악몽이 그저 달콤한 꿈으로 변하며 꾸벅. 속절없이 꾸벅. 철강노동자를 대상으로 사고가 날 뻔했던 경험이나 사고로 실제 다친 경험의 횟수를 물어보니 교대근무자들이 주간고정보다 2배 정도 횟수가 많았다(전국금속노동조합 등, 2013년).
생활 패턴은 출·퇴근 시간을 중심으로 180도 바뀐다. 아침은 저녁이 되고, 저녁은 아침이 된다. 야간조로 일한 2주 동안 평일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 깊게 잠들 수도 없었다. 낮에 자는 4시간과 밤에 자는 4시간은 다르다. 숙면이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는 실선이라면, 토막잠은 지난 출근과 다가올 출근을 구분하는 흐릿한 점선과 같았다. 퇴근길 동료들은 “내일 봐”라고 했다가 ‘아차차’ 웃고는 “이따 봐”라고 말하곤 했다.
잠만 부족한 게 아니었다. 대화도 부족했다. 인천 공단 지역 출퇴근을 위해 경기 부천시 친구의 집에 얹혀살았다. 야간조로 일하고 퇴근하면 집은 항상 텅 비어있었다. 한낮의 원룸은 고요했다.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봤자 일에 바쁜지 답은 한참 뒤에 왔다. 평일 저녁 약속은 당연히 모두 취소됐다. 미뤄둔 약속 세 건은 일요일로 몰아 해치웠다. 주변 사람들과의 타임라인이 포개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포기하게 했다.
‘안희정, 이거 실화냐.’ 3월5일 자정 넘어 잠시 쉬는 시간, 쌓여있는 카톡을 차례로 확인하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지만,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다시 작업장으로 향했다. 작업장 안에선 핸드폰을 쓸 수 없었고 탈의실에선 인터넷이 터지지 않았다. 공장에 들어서는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 퇴근할 때까지 반나절은 바깥세상과 단절되는 셈이다. 그날 공장 안에서는 누구도 ‘안희정’이라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의혹이 폭로됐다는 사실은 아침 지하철 퇴근길에서 알게 됐다.
기계는 밤에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 작업장에 설치된 기계는 10억대를 호가한다 했다. 멈춰 있는 기계는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비싼 기계일수록 ‘본전’을 뽑기 위해서 공장을 하루 24시간 365일 돌려야 한다. 하루 12시간씩 20대의 기계를 돌리는 것보다 24시간 10대의 기계를 돌리는 게 더 ‘싸게’ 먹힌다. 50%가 가산된 야간근로수당을 주더라도 사람을 부리는 비용이 더 적다. 한 푼이 급한 노동자 입장에서도 야간수당은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기계와 노동자의 서글픈 ‘윈윈’이다.
3월2일 기계를 점검하던 중 컨베이어 벨트에 손이 끼어 오른손 약지 살점이 3㎝ 정도 들리는 부상을 입었다. 동료 언니가 “상처가 덧날 수 있다”며 붕대 반 롤을 감아 간이 깁스를 만들어줬다. 고한솔 기자
하루 2500번 반복 동작…한순간 손가락이 기계 틈새에 ‘악!’
점심시간 0시30분 “누워만 있었어.” 언니들이 자주 한 말이다. 잠은 오지 않는데 어떻게든 잠들려고 애썼다는 뜻이다. 최소연(35) 언니는 귀마개와 안대에 의지했다. 아래층에 점집이 들어와 귀마개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 했다. 또 다른 파견 노동자 우예지(25)는 창문에 암막커튼까지 달아놨지만, 깊은 잠을 자진 못 한다. 한 방에 사는 룸메이트가 “언니, 자?” 묻는 말에 “어, 자고 있어”라고 답할 정도라고 웃었다. 최지숙(43) 언니는 잠자리에 들기 전 신김치를 안주 삼은 소주 반병에 기댄다. 주야맞교대를 하고 있는 금속노동자 10명 중 6명은 불면증 등을 겪는다는 통계가 나온 바 있다.(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2011년 수면장애 실태조사 보고서).
3월8일 박민주(45) 언니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수요일마다 학교를 일찍 마치고 오후 1시께 집에 돌아온다. “엄마 붙잡고 종알종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늘어놔 잠을 한숨도 못잤다”며 웃었다.
낮밤이 뒤바뀐 몸은 가장 ‘약한 고리’를 통해 고통을 호소했다. 12시간 야간근무 중 점심시간은 한밤중인 0시30분. 쉬어야 할 소화기관은 짜장밥, 제육볶음 등 짜고 기름진 ‘한 끼’를 맞았다. 전숙희 언니는 반찬을 떠오다 말고 식판을 들고 정수기로 직행한 뒤 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마시기 일쑤였다. 10년째 주야맞교대로 일했다는 또 다른 언니는 늘 사물함에 사이다를 넣어두고 지냈다. 한달 가까이 그 언니가 몸에 딱 맞는 청바지를 입고 온 걸 본 적 없다. 박민주(45) 언니는 아예 점심을 거르고 탈의실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만성 소화불량은 이들의 일상이었다.
민주 언니는 “야간하더니 피부가 또 뒤집어졌다”며 화장 대신 연고를 치덕치덕 바르고 출근하기도 했다. 경기 안산시에서 만난 정규직 노동자 신지애(38) 언니는 야간 노동을 하기 시작하고 6개월 동안 생리불순에 시달렸다고 했다. “내가 올빼미 스타일이거든. 그런데 밤에 쉬면서 깨어있는 거랑 일하면서 깨어있는 건 다르더라.” 언니는 야간으로 오래 일할 거면 초등학교 근처에선 살지 말라고 조언했다. 하교 시간 창밖으로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잠을 깬 경험 때문이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뒤 탈의실은 ‘지뢰찾기’ 게임장이 됐다. 사실상 유일한 휴식 공간인 탈의실에 드러눕는 사람들이 늘어나 피해 다녀야 한 탓이다. 집에서 가져온 요가매트·무릎담요 등을 깔아놓고 15분~20분 쪽잠을 청했다. 사물함 좀 열어야 한다며 누군가 말을 건네곤 해 쪽잠도 자는 둥 마는 등이었다. 누워있던 지숙 언니가 천장을 바라보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야간 하다보면 월~화, 화~수 이렇게 걸쳐서 살잖아. 그래서 야간 하면 더 빨리 늙나 봐.” 농담에 메아리는 없었다. 지숙 언니도 딱히 대꾸를 기대하진 않은 듯했다.
3월12일 새벽 야간근무조 근무중 쉬는 시간 탈의실에 오른손목에 물혹이 은 것을 발견했다. 물혹은 ‘위장취업’을 마친 뒤로 한달여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고한솔 기자
‘잔업·특근 의무 아님’ 공고는 말뿐
무단결근 땐 30여만원이 날아가
식은땀 흘리면서도 죽어라 공장일
“기계 속도 최대 올린대…죽어나겠네”
뫼비우스띠 같은 그곳을 떠났지만
‘타타타’ 컨베이어 소리가 꿈속에까지
달리기로 시작하는 쉬는 시간 두 시간에 한 번씩은 단거리 달리기를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탈의실로 향하는 문에 ‘병목현상’이 생겼다. 야간 기준 통근버스를 타고 저녁 8시에 회사 도착하면 저녁 8시30분~10시30분(1타임), 10시40분~12시30분(2타임), 점심시간, 새벽 1시30분~3시30분(3타임), 3시40분~5시30분(4타임), 5시40분~8시(5타임)로 일과가 나뉜다. 2시간마다 10분 정도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 꼴이다.
3월12일, 새 작업복이 지급됐다. 하얀색 제전복이 하늘색 상·하의 제전복으로 바뀌었고 작업장 밖 복도나 식당 등에서 입어야 할 쥐색 유니폼이 한 벌 더 지급됐다. 탈의실 밖으로 나가려면 제전복만 벗는 게 원칙이었는데, 이제 제전복을 벗고 쥐색 유니폼을 덧입어야 했다. 화장실을 가거나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려면 일단 탈의실을 벗어나야 하는데 제전복을 벗고 유니폼을 입는데 3분, 화장실 다녀오는데 3분, 다시 유니폼을 벗고 제전복으로 갈아입는 데 3분이 걸렸다. 특히 흡연자들은 불만이 컸다. 담배라도 한 대 태우려면 두 개층 위 옥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은 담배를 태우면서도 힐끗힐끗 시계를 살폈다.
그래도 이곳 사정은 나은 편이었다. 2월 출근했던 경기도 안산의 인쇄회로기판(PCB·피시비) 공장은 점심시간 1시간을 쪼개 휴식 시간을 마련했다. 1시간이 오전 쉬는 시간 10분, 점심시간 40분, 오후 쉬는 시간 10분으로 나뉜 셈이다. 저녁 시간은 30분이었는데 허겁지겁 밥 먹고 ‘식후땡’으로 담배 한 대 태우면 귀신같이 작업장으로 복귀할 시간이 됐다. 지애 언니는 점심시간이 1시간에서 40분으로 줄어든 1년 전 직접 노동법까지 들춰봤다고 했다. “‘8시간 일하면 1시간 이상의 휴식을 부여해야 한다’고 쓰여 있는데, 뭐라 할 말이 없더라고.” ‘최소’를 규정해둔 법 규정은 현장에 가면 늘 ‘최대’가 됐다.
‘선택’의 탈을 쓴 잔업·특근 “잔업?” 짧은 두 글자는 때로 “잔업하자” 네 글자가 됐다. 조장 언니는 매일 어깨를 툭툭 치며 잔업 여부를 확인했다. 하늘 같은 조장 언니가 “잔업하지 않을래?”도 아니고 “잔업하자” 권하는데 “아니요”라 말하긴 어려웠다. 구인공고에 ‘잔업·특근 의무 아님’ 문구가 적혀 있지만, 급한 일이 있을 때 하루·이틀 빠질지언정 자유롭게 선택할 순 없었다. 내가 빠진 몫을 결국 다른 누군가가 떠맡아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칼퇴근’ 시간인 새벽 5시30분에는 통근버스를 운행하지 않는단 점도 잔업을 해야 할 이유가 됐다. 버스정류장까지 10분을 걸어가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면 지하철역에 도착하는데, 여기만 40~50분이 걸렸다.
잔업·특근을 거부하기 힘든 이유는 또 있다. 하루 8시간 기본근무만 하면 한 달 209시간을 일해 157만3770원을 손에 쥐게 된다. 2017년 4인 가구의 최저생계비(중위소득 60%)인 268만원의 절반을 조금 넘는 돈이다. 잔업 2시간30분을 더해 새벽 잔업 기준 3만120원(7530원×150%×2.5시간+7530원×50%×0.5시간)을 더 벌 것인가, 새벽 칼퇴근 뒤 버스를 갈아 타는 수고를 더해 컴컴한 집에 조금 일찍 들어갈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해야 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어떤 선택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결근도 마찬가지다. 말없이 결근하면 하루치 임금은 물론, 근로기준법, 취업규칙 등에 의해 주휴수당, 만근수당, 상여금이 깎이기 때문에 눈앞에서 30여만원이 순식간에 날아간다. 누군가에겐 한달치 월세고, 누군가에겐 자녀 학원비일 돈이다. 언니들이 식은 땀을 흘려가면서 죽어라 공장에 나오는 이유다. 어쩌다 잔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칼퇴근’을 해야 했던 9일 한 언니가 말했다. “이럴 때 쉬어야지, 언제 쉬겠어?” 그렇게 말한 언니는 정작 잔업·특근이 많은 회사를 찾아 떠났다.
내가 소속된 파견업체는 구인공고에 수식 하나를 제시했다. ‘(여) 기본급 157만3770원+상여100%+만근수당+연차수당+잔업(150%)+특근(150%)+심야(50%)’ 이 모든 항목을 더했을 때 300만원의 월급을 받아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잔업 포함해 하루 10.5시간씩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주말 특근을 ‘풀’로 뛰어 한 달 303시간(3월 기준)을 일해야 도달할 수 있는 액수였다.
기자는 2월27일부터 3월18일까지 일하면서 나흘을 제외하곤 ‘풀 잔업’을 뛰었고 주말 특근을 한번 했다. 모두 162만5235원의 급여를 받았다. 이틀치 주휴수당과 야간 식대 9일치가 포함된 금액이다.
지난 3월 인천의 한 화장품 제조공장에 다닐 당시 찍었던 출퇴근 기록 카드. 고한솔 기자
멈추지 않는 무한 루프 3월16일 야간 출근 마지막 날 언니들은 저마다 컵라면을 들고 왔다. 희숙(45) 언니가 말했다. “오늘 야간 끝나는 날이잖아? 기념으로 컵라면 한 번 먹어줘야지.” 뜨거운 국물이라도 마셔야 속이 풀리는데 저녁 배식 때 만들어놓은 국이 항상 미지근했다. 언니들은 참치캔도 싸와서 컵라면에 부었다. 야간근무가 마무리되는 것을 자축하는 파티치곤 소박한 메뉴였다. 테이블 여기저기서 후루룩 소리가 들렸다.
언니들은 이전에 스쳐 지나간 공장들을 언급하며 “그래도 여기가 낫다”고 위로했다. “그래도 우리는 앉아서 일하잖아. 기계 만지는 언니들 봐, 내내 서 있잖아.” “저번에 일한 공장은 완전 다 쓰러져가는 데였어요. 그래도 여긴 깨끗해서 괜찮은 거 같아요.” “야, 자동차 부품 회사 다니는 언니는 혼자서 기계 열 대를 봐. 점심도 교대로 먹으러 간다.” 언니들은 이전에 스쳐 지나간 공장들을 언급했다. 서로 되내는 경험담들은 결국 언니들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지난 9일 오후 인천시 남동구 남동공단 한 공장 앞에 버려진 쓰레기 옆에 큰 캐리어가 함께 버려져있다. 이름표도 찾아볼 수 없다. 인천/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낮밤이 뒤바뀐 지 2주일이 가까워질수록 하품이 쏟아지는 시각이 늦춰졌다. 수면의 질도 점차 나아졌다. 몸이 시간대에 적응을 하는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주부터 다시 아침 8시 30분부터 일한다. 야간·주간의 무한 루프다. 3조2교대로 1년 가까이 일했다는 민주 언니가 단시간에 생체시계를 180도 돌려놓는 팁을 전수해줬다. “토요일 아침에 퇴근해서 한숨도 자지 마. 어떻게든 버텨서 밤에 자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면 돼.” 토요일 밤 잠이 들 때까지 금요일 오후부터 30시간 넘게 뜬눈으로 지새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언니들 사이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다음 주부터 기계 속도를 최고로 올린대. 물량 뽑아내야 해서 그런 가봐요. 또 죽어나겠네.”
한 달을 목표로 한 위장취업을 마무리할 시점, 언니들과 짧은 인사를 마치고 공장을 나섰다. 익숙한 이별인 듯, “좋은데 가면 알려줘” 실없는 농담을 던질 뿐 언니들은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 파견업체엔 문자를 보냈다. “사정이 생겨 다음 주부터 출근을 못할 것 같습니다. 전화가 안 돼 일단 문자 먼저 드립니다.” 30분 뒤 답장이 왔다. “담당 조장이나 반장에게 받으신 피복을 반납하셔야 됩니다. 미반납시 급여에서 공제됩니다.” 왜 그만두는지, 더 일할 수는 없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취직도, 퇴사도 속전속결이었다.
‘탓 탓 탓… 탓 탓 탓….’ 그날 밤 꿈이 익숙한 소리로 찾아왔다. 차례로 떨어지던 마스크팩이 작업대로 밖으로 쏟아졌다. 그래도 컨베이어 벨트는 개의치 않고 작동했다. 꿈에서도 멈추지 않던 그 컨베이어 벨트는 주·야간으로 교차하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를 닮았다. 기자는 위장취업을 끝냈고 이제 그 무한대의 시간에서 뛰어내렸다. “월급 받으면 아귀찜을 먹자”던 언니들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지금은 언니들한테 한밤일까, 한낮일까. 문자라도 보내볼까, 핸드폰으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한겨레 창간 30돌 특별기획
노동 orz _ 기자가 뛰어든 세상
순식간이었다.
벨트를 들어 올리다 손가락이 끼어 살점이 덜렁거렸다.
‘놀라울만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고작 손가락이길 다행이지… 병원에 실려간 것도 아니잖아’
섭섭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계는 계속 돌고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일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