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6월16일 일본 니가타현에서 일어난 규모 7.5 지진 때 액상화 현상으로 지반이 약해지면서 아파트가 건물째 넘어졌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일본 와세다대 하마다 마사노리 교수 재인용) 제공
“함경도에 (1597년) 8월26일부터 28일까지 연속적으로 여덟 번이나 지진이 있어 담벽이 모두 흔들리고 새와 짐승들도 다 놀랐으며 이로 인해 병들어 누워 일어나지 못한 이도 있었다. 인차외보 동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붉은 빛의 흙탕물이 솟아오르다가 며칠 만에 그쳤다.”(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기상청이 발간한 <한반도 역사지진 기록>에 나와 있는 기록입니다. 이 책에는 <삼국사기> <고려사절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에 서기 2년부터 1904년까지 기록된 지진에 관한 서술이 담겨 있습니다. 지진 2161건의 기록 가운데 ‘액상화 현상’(지진으로 땅이 늪처럼 변하는 현상)으로 추정되는 서술도 여러 차례 나옵니다. 15일 규모 5.4의 포항지진은 한반도에서 다시 한번 액상화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논에서 물이 솟아오르고, 모래(샌더볼케이노)와 진흙(머드볼케이노)이 화산처럼 뿜어나왔다는 기사가 잇따랐습니다. 내가 사는 인근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면 우리 지역에서 액상화 현상이 일어날 염려는 없는 건지 궁금증이 커졌습니다. ‘더(The) 친절한 기자들’이 액상화의 정체를 알아보고 액상화 위험 지역을 탐색해봤습니다.
■ 액상화는 땅이 늪으로 변하는 현상
액상화는 한마디로 땅이 늪처럼 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손문 부산대 지질환경과학과 교수는 “지반이 연약한 곳 특히 모래질(사질토) 암석이 많은 곳에서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면 모래 사이에 수압이 증가한다. 모래 사이에 물이 들어가면서 순간적으로 고체 상태의 암석이 물처럼 액상으로 변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손 교수는 또 “포항은 한반도가 1700만년 전 땅이 바다에 가라앉아 1000만년 전까지 물속에 있었던 지역이다. 포항 지반에는 완전히 고체화가 안된 상태의 해성퇴적층이 200m 두께로 쌓여 있어 15일 지진으로 액상화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도 했습니다. 손 교수 연구팀은 포항 진앙 주변 2㎞ 반경에서 흙탕물이 분출된 흔적 100여곳을 발견했습니다.
최재순 서경대 도시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도 “액상화는 지진으로 진동이 생기면 물이 빠지지 않고 고여 흙이 마치 액체처럼 행동해 건물 등이 흔들리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최 교수는 액상화를 지하철 사고에 비유했습니다. 화재가 발생해 연기가 발생하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빠져나가야 하는데, 문이 안 열리면 탈출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지하철 열차칸이 크게 흔들리다 결국 전복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끔찍한 비유지만 액상화는 실제로 참혹한 피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일본 고베 지진 액상화로 큰 피해 발생
1995년 일본의 고베에서 일어난 규모 7.2의 효고현 난부지진은 엄청난 인명피해와 항구를 포함한 사회시설의 막대한 피해를 낳았습니다. 특히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매립된 지역에 개발된 구조물에서 피해가 급증했습니다. 지금도 액상화 피해의 전형으로 얘기되는 사례입니다.
액상화(Liquefaction)이라는 말은 1953년 일본 학자가 ‘지진 발생 때 포화사질토에 일어나는 변형을 포함한 여러 가지 현상을 일컫는 말’로 처음 사용했습니다만, 실제 액상화 현상이 관찰된 것은 1964년 일본에서 일어난 규모 7.5의 니가타지진과 같은해 미국 알래스카에서 일어난 규모 9.2의 굿프라이데이지진이었습니다. 두 지역에서는 기초 지반이 붕괴해 교량이 넘어지고 아파트가 통째로 쓰러지는가 하면 맨홀 등 땅속 구조물이 솟아오르는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도 진앙과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 연립주택이 기울고 도로가 푹 꺼지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액상화 현상 때문인 것으로 진단됐습니다. 멕시코에서는 1985년 9월19일 규모 8.1의 지진이 서해안에서 발생했는데요, 320㎞나 떨어진 멕시코시에서 1만여명이 사망하고 3만여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 역시 호수를 메워 만든 멕시코시 지하의 연약층에서 지진파가 증폭돼 액상화 현상이 빚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학계의 분석입니다.
■ 우리 지역은 액상화 염려는 없을까요?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지반액상화 현상이 발생하기 쉬운 3가지 요인으로 느슨한 사질토 지반, 얕은 지하수, 큰 지진동를 꼽았습니다. 액상화는 해안이나 하구 부근, 간척지, 매립지 등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이곳에는 지반 강도가 약한 0.03~0.5㎜의 모래가 주성분인 사질토 지반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하수위가 지표면에서 10m 이내로 지하수위가 얕아질수록 액상화가 일어나기 쉽다고 연구원은 밝히고 있습니다. 포항지진의 경우 진앙 주변 지역에 얕은 지하수가 발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 필요조건인 지진동의 경우 같은 진도 4~5 이상이라도 흔들리는 시간이 길어질 경우 피해가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포항지진 때 지진동이 경주 때와 달리 저주파 성분이 많았고 그만큼 전파 속도도 느렸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규모 5.4의 지진임에도 진앙지에서 2.6㎞ 떨어진 한국가스공사 흥해관리소에서 측정된 최대지반가속도는 576갈(gal) 곧 약 0.58g에 이르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안전을 강화한 원전의 기준이 0.3g(규모 7 지진에 해당)인 것을 보면 가속도가 엄청나게 증폭됐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지반이 어떤 곳인지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질학자나 토목공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정 지역의 액상화 가능성 여부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최재순 교수 연구팀이 경남 양산에서 규모 6.5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를 가정해 액상화 발생 위험도를 작성해보니, 진앙에서 가까운 부산은 물론 멀리 떨어진 서울과 수도권의 상당 구역도 위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새만금·시화호·안동호 등 전국 12개 매립지와 자연·인공호수의 액상화 가능 지수(LPI)를 분석해보니, 간척지역인 새만금과 시화호부근은 진앙지가 먼 양산이나 오대산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지수가 매우 높게 나왔습니다. 연구팀이 국가지반정보 통합데이터베이스센터의 시추공 자료를 토대로 우리나라 전역의 액상화 위험도를 분석한 지도를 보면, 서울·부산 등 대도시와 해안가를 중심으로 액상화로 인한 지진 피해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서울 강남지역의 52개 시추공 데이터를 분석해 평가한 액상화 가능 지수를 보면 지수가 5~15로 위험도가 높은 지역이 14곳, 매우 높은 곳(지수 15 이상)이 12곳에 이르렀습니다. 전체 지역의 절반을 넘습니다. 심지어 액상화 가능 지수가 43.0에 이르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지진이 발생한 포항지역은 지반이 한반도에서 가장 약한 축에 속하는 퇴적암층이고, 부산 해안가나 인천 송도·청라국제도시 등은 매립지에 세워진 도시라는 점에서 액상화에 취약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이런 지역이라 해도 액상화 위험이 클지와 실제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을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내진설계가 돼 있다는 것과 실제 내진 성능을 발휘할지가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말입니다. 최재순 교수는 “적어도 2000년대 이후에 조성된 도시들은 액상화 현상에 대비한 구조적 보강을 충분히 했을 것이기에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최 교수는 “현재 단계의 액상화 위험도 분석은 지진 전파를 예측하는 감쇠식의 부정확성 등으로 인해 한계가 많다”며 “국내 부지 특성에 맞는 감쇠식을 연구 개발해 정밀하게 재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