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 (1929~2011)
1970년 11월13일, 아들 전태일이 세상을 떠나다
소작농이던 아버지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다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이때 이소선은 네살. 가족은 고향을 떠나 다른 마을에 가서 살았다. 이때 고생한 경험 때문에 이소선은 ‘사람 차별’을 싫어하게 되었단다(오도엽). 결혼한 다음에도 가난에 시달렸다. 가난 때문에 가족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 맏아들 전태일이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을 때 비로소 안심했으리라.
그런데 전태일의 관심은 혼자 잘사는 것이 아니었다. 동료 노동자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다. 노동법 법전을 혼자 읽고,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다. 돈을 모아 ‘윤리적 기업’을 만들 궁리도 했단다. 그의 정의감은 어머니 이소선의 영향이라는 말이 있다(조영래).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태일은 삶을 바쳤다, 세상은 그의 죽음을 더 기억하지만.
전태일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날이 1970년 11월13일. 한국 사회가 노동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소선은 죽어가는 아들에게 말했다.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일을 끝까지 하겠다.” 그리고 40년 동안 노동운동을 했다. 잡혀간 일이 250번을 넘는다고(하종강). 노동자 모두의 어머니가 된 이소선, 2011년에 아들의 곁으로 떠났다.
김태권 만화가
<한겨레> 자료사진
일러스트 오금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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