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1555~1600)
1600년 11월6일, 할복 대신 처형을 택하다
영주치고는 경력이 특이했다. 무사 집안이 아니라 상인 출신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장수가 된 것이다. 종교도 당시 일본 사람치고 독특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기독교 무사. 이웃 지역의 영주 가토 기요마사와는 앙숙이었다. 가토는 무사 출신에 독실한 불교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둘이 함께 침략군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는 전쟁 중에도 사이가 나빴다. 둘이 서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피난 중인 조선 조정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는 이 소문을 거꾸로 이용해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을 함정에 빠트린 일도 있다. 고니시는 개인감정이나 신념보다 공을 세우는 일이 우선이었던 것 같다. 전쟁에 부정적이었고 강화협상을 주도하면서도, 선봉에 나서 잔인한 일을 도맡았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는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겠다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맞섰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패배하는 쪽에 섰다. (이때도 가토는 고니시와 반대편이었다.) 할복을 제안받지만 거부한다. 자살하지 말라는 기독교 교리 때문이라나. ‘그렇게 독실한 사람이 임진왜란 때는 왜?’ 한국 사람 보기에는 얄궂은 느낌. 처형당한 날이 1600년 11월6일이었다.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 만들고 이은경 찍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