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스물세 살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해 숨졌다. 2월, 이한열은 시를 썼다. “우리 아이가 익사했다/ 뜨거운 정열과 불타는 의지가 물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는 대학 3학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다 그만/ 짐승의 발톱에 물려 죽었다.” 한 살 많은 박종철을 ‘우리 아이’라 부르며 애통해했다.
최루탄은 매웠다. “내 이름의 ‘열’자는 매울 열(烈), 최루탄과 나는 끊을 수 없는 관계”라며 이한열은 농담을 했단다. 또 “김주열의 ‘열’자와 같다”는 말도 했다. 김주열은 1960년 3월15일에 최루탄에 맞고 숨진 학생, 그의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이 4월혁명을 일으켰다. 1987년 6월9일, 이한열은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이튿날 6월10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6월항쟁의 시작이었다.
스물두 살 이한열은 7월5일에 숨을 거둔다. 이름 끝자는 열사(烈士)의 ‘열’자가 되었다. 어머니 배은심씨는 아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여러분은 3년이 지났지만 나는 30년째다.” 올해 5월17일, 5·18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어머니는 세월호 유족과 만났다. “힘내 달라, 우리 아이들 얼굴 기억하면서 그렇게 살자.”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