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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나는 역사다] 4월 그날, 민주화 위해 피 흘린 14살 소녀

등록 2017-04-18 19:16수정 2017-05-02 15:58

진영숙(1946~1960)
1960년 4월19일, 유서 쓰고 시위 나서

일러스트 오금택
일러스트 오금택
한성여중 2학년이었다.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피복상을 하던 홀어머니와 살았다. 김주열 학생의 죽음을 신문으로 접하고는 엎드려 울며 “공산당이 나쁘다더니 공산당 같은 짓을 한다”고 개탄했다고 어머니는 기억한다. 1960년 4월19일, 집에 와 어머니를 찾았다. 학교 친구 오륙십 명과 함께였다. 어머니가 안 계신 것을 보고 쪽지를 적어 둔 채 집을 나섰다. 유서였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몸 건강히 계세요.” 진영숙은 그날 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많이 죽었다. 가장 많이 죽은 사람은 신문팔이나 구두닦이처럼 불우한 아이들이었다.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처음 외친 사람은 어머니들이었다. 모두 함께 피 흘리며 이룩한 혁명이었다.

이듬해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정권은 4·19를 “학생운동”이나 “의거”라 불렀다.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들도 1972년에 가서야 유신을 일으켰다. 민주주의 혁명이 다시 일어나면 어쩌나 두려웠기 때문. 서중석 선생의 말처럼 “4월혁명 이념을 완전히 말살하는 데 박정희 정부로서도 무려 1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혁명의 기억은 그처럼 뜨거웠다.

김태권 만화가

일러스트 오금택
일러스트 오금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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