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맞서 싸울 때 왕징웨이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지도부에 있으면서도 최전선에 앞장서다 잡혀가 옥살이를 했다. 신해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자리 욕심을 내지 않았다. 당시 아시아 지식인들은 종종 약육강식을 주장하는 사회진화론에 빠지곤 했는데, 왕징웨이는 그러한 사상적 오류도 범하지 않았다. 한때는 이렇듯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현실정치에 발을 담그며 볼썽사나워졌다. 중국 정부의 실력자였지만 안으로 권력다툼에서 장제스에게 밀렸다. 밖으로 일본이 쳐들어오는데도 미적댄다고 미움을 받았다. 1935년에는 당장 일본에 맞서 싸우자는 자객의 총에 쓰러지기도 했다.
김태권 만들고 이은경 찍다
치료를 마치고 왕징웨이가 돌아왔을 때는 중일전쟁이 한창이었다. 일본과 싸우기 전에 중국의 힘부터 기르자던 왕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상황이 아니었다. 왕은 친일파 취급을 받았고, 갈 곳이 없어지자 정말로 일본에 붙었다. 난징 괴뢰정부를 수립한 날이 1940년 3월30일. 자기 딴에는 깊은 고민의 결과였단다. 그러나 남들 보기에는 흔해빠진 변절. 1944년에 숨졌다. 해코지가 두려워 시멘트로 무덤을 발랐지만 소용없었다. 장제스는 난징을 수복한 뒤 왕의 무덤을 폭탄으로 날려버렸으니.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