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경제 모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경유착과 노동배제는 유통기한이 지난 지 오래다. 국가 자원을 총동원해 재벌을 키웠고, 이들을 앞세워 한국경제가 성장한 건 사실이지만 그 시스템이 동맥경화에 걸린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각종 세제와 환율 혜택으로 현금이 재벌에 쌓이고 있지만, 이미 공룡이 된 재벌은 더이상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골목상권으로 진출하는 등 서민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당연하게도 일자리도 줄고 있다. 새로운 경제 활력과 고용 창출을 위해서라도 재벌 위주 경제를 탈피해야 한다. 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한 노동배제는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고 소비를 위축시켜 내수시장을 침체시킨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해법을 막고 있는 게 정경유착이라는 낡은 틀이다. ‘1987~2017 광장의 노래’ 2부 1회 ‘우리안의 박정희들’에서는 정경유착과 함께 그 이면으로서 노동배제 정책의 탄생 과정을 탐구한다.
2016년 12월6일.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차 청문회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벌 총수 9명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들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통해 비선실세 최순실의 미르·케이스포츠재단에 수백억원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탐욕스런 경제권력이 흘레붙은 ‘지배블록’의 적나라한 단면. 4·19 혁명이 요구한 ‘부정축재자 처벌’이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해 무산된 뒤, 이들이 구축한 지배블록은 단 한번도 깨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동경에서 귀국한 것은 (1961년) 6월26일 저녁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귀국 소식을 미리 듣곤 당시 비행장이 있었던 여의도에 삼성의 차를 몇 대 준비시켰다. 아버지가 어디를 가서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서 여의도에 준비해둔 차로 따라가보니 아버지가 지프차를 타고 혁명 정부의 군인들과 같이 간 곳은 엉뚱하게도 당시 치안국 부근의 서울 호텔이었다. 경찰서나 혹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 아니어서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면서 퍽 당황스러웠다.”(<묻어둔 이야기, 이맹희 회고록>)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4·19 혁명 직후 시작된 ‘부정축재자 처벌’을 완성지어, 국민적 지지를 얻고자 했다. 절대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 국민들은 법 위에 군림하던 자본가들의 탈세와 부정축재에 분노하고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월28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정재호·이정림 등 대자본가 10여명을 체포·구금했다. 탈세와 부정축재 등 혐의였다. 그러나 세간에 ‘1등 재벌은 건드리지 못한다’는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삼성 이병철 사장이 일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이병철의 동업자 조홍제 부사장을 그 대신 체포했다. 이 회장은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뒤, 6월26일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이병철을 연행한 지프차가 향한 곳은 다른 부정축재자들이 구금돼 있던 서대문형무소·마포형무소가 아니라 서울 명동의 한 호텔이었다. 이병철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병철은 부정축재자 전원 석방을 요구한다.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 협력이 그 대가였다. 이튿날 구금돼 있던 재벌 경제인 12명은 모두 석방된다.
석방된 부정축재자 12명은 그해 8월16일 군부 정권과의 창구 노릇을 맡을 ‘한국경제인협회’를 꾸린다. 초대 회장은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는 “아버지는 생전에 당신의 묘석에 다른 단체는 다 쓰지 않더라도 이 단체의 회장을 지낸 것은 새기도록 미리 밝혀두었을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부정축재혐의자 12명이 석방을 대가로 조직한 한국경제인협회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0월 부정축재처리법을 개정한다. 추징금의 수위를 낮추고, 대규모 공장 건립을 위해 정부가 금융지원에 나서며, 공장이 설립된 뒤엔 정부에 헌납한 지분을 되사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정축재자들은 강력한 처벌 대신 정부의 집중적인 금융지원을 받으며 국가기간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독점적 기회를 제공받았던 것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밀월관계가 형성된 결정적 순간이다.
역사는 이들의 ‘힘겨루기’에서 이긴 쪽은 재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군사정부는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반공’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유지·강화’를 국시로 내걸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회의록(1961년 10월23일)을 보면, 박정희를 포함한 군사정부의 태도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일전에도 일본 실업가들이 왔다 갔지만 (경제인들만 만나고) 정부에는 찾아오지 않았음. 그들이 능력있다고 보는 관점과 정부가 평가한 것과는 차이가 있음”, “정치적인 것보다 경제적인 발전에 정진해야”, “국민의 혁명정부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한 방법임”. 결과적으로 이날 회의에서 최고회의는 재적위원 8명 가운데 7명의 찬성(기권 1)으로 ‘부정축재처리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국내외 권력 기반이 안정되지 않았던 상황, 칼자루를 쥔 쪽은 군사정부가 아닌 자본이었던 셈이다. 실제 이병철 회장 등은 1961년 10월초 주한미국대사를 만나, 부정축재처리법 개정의 내용은 본인들이 제안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성은 이 시기 조흥은행·상업은행 등 보유하고 있던 시중은행을 반납하는 시련을 겪지만, 얼마 뒤 동방생명보험(삼성생명의 전신), 동양화재해상보험, 동남증권을 인수(1963년)하는 등 재벌 그룹으로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구축한다. 1963년 당시 삼성그룹의 계열사는 제일제당, 제일모직, 삼성물산, 안국화재, 동방생명보험 등이었다.
“당시 경제기획원에 차관 문제를 취급하는 양대 과가 있었어. 민간차관과, 공공차관과. 난 양대 과장을 다 했는데. 특히 민간차관과라는 건 아주 골치가 몹시 아픈 과였어. 당시 이걸(차관) 정부에서 승인받느냐, 안 받느냐가 그 회사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였으니까. 요즘은 업계에서 스스로 몇 억불짜리도 막 하는데, 그런 자신이 언제 생겼겠어요. 그건 당시에 정부가 불어넣어 줬어요. 그러지 않고 지났으면 요즘도 그저 쫄쫄하게 그렇게 살 거야.”(김흥기 전 재무부 차관 구술,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자료관)
군정이 이어지면서 정치는 안정돼 갔지만 경제 상황은 달랐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국외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1962년 통화 개혁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면서 국내 자본 형성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1962~66년 연평균 경제성장률 7.1% 달성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군사정권으로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경제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불안한 국내 정세 탓에 외국 자본은 국내 직접투자를 꺼렸다. 정부가 들여올 수 있는 공공 차관에도 한계가 있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차관의 기본은 민간 차관이었다. 군정은 또다시 경제인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병철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을 앞둔 정부의 움직임을 답답해했다. “정부는 기본방향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나의 주장은 외자 유치를 통한 공업화였다. 국내에는 자본의 축적이 없고 기술도 없으므로 선진국에서 차관이나 투자의 형식으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야 했다.”(<호암자전>, 나남) 이병철의 주장은 현실이 됐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소요되는 자금 4억2600만달러 가운데 절반이 넘는 2억3480만달러가 민간 차관 몫으로 배정됐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외자도입촉진법을 개정하고, 1962년엔 ‘장기결제방식에 의한 자본재도입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는 등 재벌들의 ‘경제 외교’를 지원·통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다. 당시는 경제인들의 해외여행조차 경제기획원의 추천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외자 유치의 승인과 심사권을 손에 쥔 정부와, 실제 차관 교섭 및 설비 투자를 맡은 재벌은 ‘2인3각’ 게임을 시작했다.
외자 도입을 통한 울산공업단지 건설이 차츰 모양을 갖춰가던 1964년 8월 이병철은 일본 미쓰이물산과 한국비료 건설을 위한 차관 계약을 맺는다. 4190만달러 규모, 연이율 5.5%에 ‘2년 거치 8년 상환’이 조건으로, 제1호 민간 차관 계약이었다. 당시 한해 물가상승률이 20%에 이르렀다는 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기도 전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민관 역량이 총동원된 ‘특혜성 차관’인 셈이다.
한국비료의 규모는 연간 생산량 36만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한국비료를 설립하고 공장 건설에 착수한 1965년 당시 삼성의 계열사는 제일제당, 제일모직, 삼성물산, 동양방송 등 9개사로 늘었다. 내·외자 도입에 의한 사업 확장은 이병철의 전매특허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직후 대자본가의 형성 과정을 분석한 ‘1950년대 자본 축적과 국가’(상지대 공제욱 교수) 논문을 보면, 이병철은 막대한 원조자금을 융자받는 특혜성 자금 지원을 통해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설립한 것으로 분석된다. 대부분 재벌이 일제가 건설·운용하던 귀속재산을 불하받는 방식 등으로 자본을 축적한 것과는 다른 경로다.
“처음부터 우리가 밀수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밀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박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돈을 만든 다음 3분의 1은 정치자금으로, 3분의 1은 부족한 공장 건설 대금으로, 3분의 1은 한국비료의 운영자금으로 하자는 안까지 내놓았다.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불과 3년여. 아직도 군사정부 시절의 기강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시기에 정부의 묵인이나 적극적인 협조 없이 대단위의 밀수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묻어둔 이야기, 이맹희 회고록>)
한국비료의 건립은 이병철의 오랜 꿈이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관심 사업이기도 했다. 1967년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대비해 조국 근대화의 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업적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1964년 5월께 이병철을 청와대로 불러 비료 공장 설립을 요청한다. “이 사장, 정부가 하는 일을 도와줄 생각은 없습니까?” 이병철은 흔쾌히 수락한다. 대규모 비료 공장 설립은 이병철 자신도 몇차례 시도했다 좌절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맹희는 회고록에서 “농촌 인구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농민들을 위한 값싼 비료를 공급할 비료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선거대책이었다. 박 대통령은 비료 공장을 1967년 대통령 선거 전에 꼭 완성시킬 것을 요구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한국비료 건설에 예상을 넘어선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면서 삼성그룹 전체의 자금난이 심해졌다. 박정희는 비료 공장 건립 허가 등을 근거로 정치자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침 차관을 제공한 일본 미쓰이물산이 삼성 쪽에 10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자금줄에 목말랐던 이해 공동체에 다가온 ‘뜻밖의 유혹’이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맹희의 회고록이 거의 유일하다. 이맹희 회고록에 따르면, 삼성은 미쓰이물산의 리베이트 제안을 받은 뒤 그 사실을 박정희에게 알렸다. 그러자 박정희는 “그러면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제의했다. 당시 외환관리법은 신고되지 않은 외환은 일체 국내로 반입시킬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100만달러어치 물품을 밀수로 들여와, 국내에서 현금화해 부풀리고, 이를 나눠 갖자는 제안인 셈이다.
이병철의 장남과 차남, 이맹희와 이창희가 밀수의 실무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그들은 암시장에서 유통 가능한 품목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양변기·냉장고·에어컨·전화기·스테인리스판, 그리고 사카린의 원료인 OTSA 등이었다. 이들은 장래 삼성의 사업 과정에 필요한 정밀 기계류도 밀반입했다고 한다.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은 1966년 9월 중순부터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국내 1위 재벌이 밀수라니….’ 분노한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9월22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무소속 김두한 의원은 “이건 국민들이 주는 사카린이니 골고루 맛을 보라”며 국무위원들한테 인분을 뿌렸다. 같은 날 검찰에 출두한 이창희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된다.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사업 경영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1966년 9월의 소동에 대해 <호암자전>과 <묻어둔 이야기>는 모두 “(한국비료) 정치자금 등을 둘러싼 권력 내부의 파워게임의 결과”라고 적고 있다. 군사정권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쪽이,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사카린 밀수 사건’을 언론에 제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고록 내용은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한겨레>는 회고록을 뒷받침하는 주한미국대사관의 기밀 보고서를 확보했다. 보고서를 보면, 한국비료 국가 헌납 1년 뒤인 1967년 9월11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로버트 메이어 상무담당관 등과 만난 이맹희는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은 한국 정부의 제안에 따라 진행된 일이며, 삼성은 중앙정보부 등의 협박에 못 이겨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국무부 라인을 통해 미국 정부에도 보고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채동결, 그게 ‘8·3조치’인데 그거 우리나라만이 가능한 얘기야. 자기 기업 한다고 말이야, 전부 빚을 써놓고 못하겠다고 동결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빚 준 사람은 돈 못 받고, 그 빚 받은 사람은 다 살아났지.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그 혜택을 보고 다 살아난 거야. 당시 우리나라 연 인플레율이 15~20%. 어떤 때는 30% 가까이 가는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실물로 감아쥐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 너무 무리한 투자를 해갖고 사채동결이라는 그런 결과가 나온 거야.”(김흥기 전 재무부 차관 구술,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자료관)
한국비료 국가 헌납과 이병철 2선 후퇴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사업 다각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간다. 전주제지(1965년), 중앙개발(1966년), 고려흥진(1966년) 등을 잇따라 설립·인수하며 사업 영역을 넓힌다. 1966~70년 사이 삼성그룹은 7개 업체를 새로 설립하고 1곳을 인수한다. 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12곳을 설립하고 1곳을 인수한다.
무리한 사업 확장은 부채 폭증으로 돌아왔다. 1963년 83% 수준이었던 삼성그룹의 자기자본 대비 부채비율은 1965년 190%로, 1967년 245%, 1970년 465%로 급등했다. ‘삼성의 다각화 과정과 지배구조에 관한 연구’(김영욱) 논문을 보면, 당시 삼성은 연이율 50~60%에 이르는 사채를 끌어다 쓸 정도로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국내 자금시장은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주한일본대사관이 1968년 상반기까지 서울 사채시장을 조사해 작성한 보고서에는, 개성 출신 사업가로 구성된 개성파(대한시멘트), 함경도파(고려원양어선), 서울평안도파(신일기업), 경상도파(효성물산), 신흥파(한진상사) 등 몇몇 재벌기업인들이 사채시장을 주무르는 ‘큰손’들로 평가돼 있다. 재벌 기업들도 이들 사채업자들의 위세에 눌리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1960년대 초반 경쟁적으로 유치한 외자의 상환부담도 닥치기 시작했다. ‘돈줄’이 말라붙은 셈이다.
삼성을 포함한 각 기업의 재무구조가 부실해지자 이번에도 정부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한국경제인협회에서 이름을 바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지속적인 사채 정리 요구에 따른 조처였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3 긴급경제조치’를 통해 당시 기업이 신고한 3500억원 규모 사채를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조건으로 동결시키고, 이율도 월 1.35%로 제한했다. 2000억원대 정책금융 지원을 통해 채무 대환 조처도 이뤄진다. 더구나 대주주 개인자금을 기업에 사채로 제공한 경우, 위장 사채 여부를 조사하지도 않고 출자 전환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이승윤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자료관과의 인터뷰에서 “잔뜩 빚지고 어 이거 때문에 금융이 마비가 된다. 금융공황이 온다. 그러니까 이건 탕감해줘야 된다. 이건 잘못된 습관을 길러주는 거다. 그런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맘대로 꾸는 사람이야 적겠지만, 차입금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 생각이 만연돼 있다”며 ‘8·3조치’가 불러온 도덕적 해이를 회고했다.
덕분에 삼성은 재무상태 악화에서 벗어나 다시 사업 다각화에 골몰한다. 1973년 제일기획·호텔신라 설립에 이어 1974년엔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한다. 1973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에 발맞춘 것이다. 그러나 삼성의 중화학공업화 행보는 상당히 신중하게 진행된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 “오일쇼크의 영향은 너무나 컸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계속 계획을 그대로 추진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조선소) 착공을 2~3년 더 연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이 강해서 국가적 차원에서 결국 (조선소를) 인수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적었다.
“구 사장(구인회 금성사 회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산업을 하려고 하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꼭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를 던졌는데 반응은 예상치 못하게 터져나왔다. 구 회장은 벌컥 화를 내면서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즉, 이익을 보이니까 사돈이 하고 있는 사업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때까지 퍽 친하게 지내셨던 두분은 이 일로 아주 서먹서먹해졌다.(<묻어둔 이야기, 이맹희 회고록>)
2016년 말 현재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25%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 공룡기업 삼성전자의 기원은 1969년부터다. 이병철은 권력의 요구에 따라 마지못해 뛰어든 중화학산업과 달리 전자산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사업성을 검토해본 결과 전자산업이야말로 우리나라의 경제단계에 꼭 알맞은 산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이맹희는 이병철이 교류해온 일본 경제인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했다. 이병철이 흉금을 터놓고 지냈던 인물은 일본전기(NEC), 도에이, 미쓰이, 산요 등 일본 전자업계 경영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일본전기의 고바야시 사장은 “삼성은 자동차보다는 전자를 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하게 권유했다고 한다. 전자산업으로의 진출을 결정한 삼성은 1969년 1월 삼성전자를 설립하고, 삼성산요전기(1969년 12월), 삼성엔이시(삼성NEC, 1970년 1월), 삼성일렉트릭스(1971년 9월)를 잇따라 설립한다. 정부는 삼성전자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67년 전자공업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한다. 이어 ‘전자공업 육성 8개년 계획’을 마련해 전자업계에 대한 과감한 금융·세제 지원에 나선다. 식품·섬유 등 소비재 위주의 사업구조에 머물렀던 삼성이 후발주자로 뛰어들 무렵, 전자산업은 국가의 주력 수출전략산업으로 떠오른 것이다.
문제는 기존 전자업계와의 알력이었다. 특히 10여년 전(1958년) 전자업계에 진출했던 금성사의 구인회는 이병철의 사돈이었다. 금성사를 비롯한 전자공업협동조합 59개 회원사는 과당경쟁에 따른 내수산업의 붕괴를 우려하며 강력 반발했다. 제품이 생산·출고된 뒤에는 대리점들 사이에 주먹다짐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구인회는 장남인 구자경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쪽(삼성)에서 꼭 그래 하겠다면 서운한 일이지만 우짜겠노. 한가지 섭섭한 점이 있다면 금성사가 지금 어려운 형편에 있는 점을 노려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고 덤비는 것 같은 기라. 그러나 나는 내 할 일만 할란다.”
기득권을 주장하는 업계의 반발을 무마하는 과정에서도 이병철은 박정희의 손을 빌렸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 “그들을 설득하다 못해 부득이 대통령에게 직접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설명하여 이것은 국가적 사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더니, 즉시로 전자산업 전반에 관한 개방 지시가 내려 삼성전자공업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고 적었다.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업계의 반발을 무마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중화학공업화가 마무리되는 1970년 중반 이후 삼성그룹의 사업 다각화는 마무리된다. 전자·금융·식품·섬유 등 13개 갈래로 뻗어나간 사업 영역 내부적으로 수직 계열화를 시도하며 자기 완결성을 갖춰나가기 시작한다. 삼성뿐만 아니라, 각 재벌들도 ‘박정희의 시대’를 관통하며 성장과 분화를 마무리하고 철옹성을 구축한다.
1960~70년대를 관통하며 지배블록을 형성한 독재정권과 재벌경제, 이들 가운데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 앞서 소개한 주한미국대사관의 기밀 보고서 한 대목은 많은 사실을 시사한다. “이맹희는 그의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굽실거리기를 거부한 대가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에 매달 정기적으로 정치자금을 상납하는 가운데,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하게 되는 진퇴양난까지 겪게 됐다는 것이다. 이맹희는 이병철에게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한국 정부의 부패 스캔들을 폭로하는 방안까지 건의했다고 말했다. 이맹희는 박정희 정부는 몇년 안에 무너질 것이며, 삼성물산은 그 뒤에라도 재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유산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사망선고를 선고받은 지금, 이재용의 삼성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경제적 욕망을 상징하고 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