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의 사진을 봅니다. 1987년, 2008년, 2016년,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 광장에 나선 이들의 사진입니다. 사진이 포착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들여다봅니다. 이미 민주주의를 달성했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민주주의는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87년 6월항쟁 30돌을 앞두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민주주의에는 기성품이 없다는 것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김경덕씨가 지난달 12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김제동씨 사회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그는 “평생 새누리당만 찍어서 죄송하다”는 연설로 스타가 됐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민정당 시절엔 돈 봉투도 돌렸어요”
“새누리(당)에 엎어져 살았습니더. 잠도 안자고, (선거)운동했다니까예.”
지난달 12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김제동씨 사회로 열린 광장콘서트 ‘만민공동회’ 무대에 올라 “대통령한테 속고, 정치인한테 속았심더”라고 외쳐 ‘속고 아줌마’로 유명해진 김경덕(60)씨를 지난 11일 부산 강서구 가덕도에서 만났다. 김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새마을청소년회’에 들어간 뒤 40년 가까이 “끝없이 새누리당에 도움”을 주며 살아왔다고 했다. 월 2000원의 당비를 10년간 꼬박꼬박 냈고 선거철마다 선거운동원으로 동네를 뛰어다녔다. “(1987년) 민정당(민주정의당) 시절엔 돈 봉투도 왔다 갔다 했음니더. 이왕 일을 봐주는데 한표라도 더 얻어줘야 안되겠나 싶어서 딴 사람한테 (내 돈 봉투까지) 줬습니더. 그때 돈 2만원이면 컸어예.” 당에서 몇만 원이라도 나오면 김씨는 자기 돈을 보태 경로당에 먹을 것을 사다 날랐다. 한겨울에도 다른 후보가 뿌리는 돈 봉투를 잡겠다고 방파제나 남의 집 옥상에서 몇 시간씩 숨어있기도 했다.
육영수가 평생의 롤모델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는 더 애틋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좋아했지만 특히 육영수씨가 김씨의 ‘롤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육) 여사님이 소록도에 가서 나병(한센인) 환자들 손을 잡았다고 하더라고예. 그때 ‘나도 저런 사람이 될 거다’ 진짜 생각했어예. ‘내가 부자가 아니더라도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뭐든가 봉사를 할거다’ 그렇게 생각해서 너무 존경했어예.” 1974년 육영수가 사망했을 땐 엄마가 돌아가신 것처럼 엉엉 울었다. 18살 처녀였던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며칠 동안 먹고 사는 일도 내팽개쳤다. 그 딸에 대한 믿음은 그래서 각별했다. “오직 나라하고 결혼한댔다 안했습니꺼. 그걸 철석같이 믿었으예. 걸리는 자식이 없으니까 지 가정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에 올인할 수 있겠다, 그 생각으로 찍었지예.” 김씨는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박근혜 찍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토지 수용으로 강제이주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믿음이 배신으로 바뀐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불합리한 이주 경험이다. 가덕도 장항마을 토박이로 살아온 김씨는 부산신항 개발로 토지가 수용돼 이주해야 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섬사람들이 집을 잃고 쫓겨나듯 마을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촌에 살다보니까 법을 몰라서 불이익을 당하고예. 밖에 있는 사람들은 투기 목적으로 하니까 법을 잘 알잖아예, 그런 사람들은 다 받아가고.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더.”
니 자식이 수장돼 있다고 생각하믄...
김씨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또 다른 일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참사다. 일평생 섬 사람으로 살았기에 안타까움이 더 컸다. “짐만 많이 안 실었어도 디비질 일이 없었고, 바람이 그렇게 불었으면 배를 안 띄워야지. 와 저그가 배를 띄웠노. (죽은 단원고 학생들이) 진짜 제 자식 같습니더.” 김씨는 유가족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광화문에서 단식할 때도 사흘간 동참했다. 누가 세월호 인양비용이 많이 든다고 투덜되면 그는 대변인을 자처한다. “‘니 자식이 수장돼 있다고 생각하자, 그런 니 배 안껀지겠나’ ‘이 세계 다 준다고 해도 니 자식하고 바꾸겠나’ 하지예. 그럼 입도 뻥끗 못해예.” 사고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처신에도 김씨는 크게 실망했다. “조끼를 입었는데 찾기가 어려운가 묻는데, 저 사람이 뭘 아는기가 싶었지예.”
“바보 대통령을 찍은 거징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배신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바보 대통령을 찍은 거지예. 자기는 (청와대) 관저 생활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이 다 일한 거 아닙니꺼. 그러니까 (최순실이)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주물럭 거린 거지예.” 대통령 가까이에 있는 곳에서 촛불을 켜야겠다는 마음으로 지난달 12일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6개월 계약직으로 청소일을 하는 그는 늦지 않으려고 금요일에 퇴근하자마자 택시비 3만원을 주고 부산역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해 길거리에서 잠시 눈을 부쳤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그는 난생 처음 봤다. 그렇게 즐겁게 시위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비좁은 길도 서로 비켜주며 가족처럼 어울리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김씨는 그날도 밤을 샜다. 늦은 시간에 혹시 경찰과 시위대 간에 사소한 다툼이라도 생길까봐 걱정돼서였다. “다칠 판이면 이 늙은이가 다치는 게 낫지예. 늙은 것이 죽더라도 우리나라가 잘 돼야 우리 아들 세대는 힘들지만 우리 손주라도 좀 편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지예.”
지난 11일 김경덕씨가 부산 가덕도 자신의 집 마당에서 ’박근혜를 구속하라’는 손팻말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마음은 항상 광화문 광장에 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정은주 기자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일
김씨는 2박3일의 ‘촛불 여행’을 마치고 가덕도로 돌아왔다. ‘박근혜는 하야하라’라는 손팻말을 꼭 쥔 채였다. 갓 돌을 넘긴 쌍둥이 손주들에게 그 손팻말을 보여주며 역사적인 날을 얘기해주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는 못 배우고 섬에만 살다가 여러 피해를 보면서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이 생겼다고예. 할머니가 살아온 그 세대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너희들을 위해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고예.” 그 후로도 김씨는 네 차례 더 촛불 여행을 다녀왔다.
그러나 지난 9일 국회가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가결했을 때 김씨는 기쁨보다 서글픔이 밀려왔다. 어쩌다가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됐나 한스럽고, 먼저 탄핵당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이) 바른 대통령이라는 건 아는데 새누리(당)에 미쳐 있으니께 내 마음을 뚫고 못 들어오는 기라예. (내가) 처음부터 사람을 좀 더 잘 볼 줄 알았으면 그나마 한나라당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 긴데, 정말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 같아예.”
“마음은 항상 거기에 가 있으예”
김씨는 야당의 무능도 답답해 했다. “야당이 싸워줘야 할 일을 우리 국민이 싸워갔고 저그가 끼어드는 거 아닙니꺼. 탄핵 저그가 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저가 한 거 아닙니더. 국민 대신 일하라고 보내놨는데 일한 거 뭐 있습니꺼.” 그래서 김씨의 마음은 지금도 불안하다. 금방이라도 역풍이 불어닥칠 것만 같다. “대통령이 정말 탄핵될 때까지라도 같이 소리를 높여주고 싶어예. 초 하나라도 더 켜서 밝혀주고 싶어예. 진짜 마음은 항상 거기(광화문 광장)에 가 있으예.”
부산 가덕도/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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