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주최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시민 촛불' 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근처에서 경찰과 대치 하고 있다.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9일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_박근혜 시민 촛불' 집회에는 최대 3만여명(경찰 추산 1만2000명)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 하야’, ‘거국내각 구성’ 등을 요구했다. 시위에 처음 나오는 중고등학생부터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 박근혜 대통령을 찍었다는 장년층까지, 다양한 시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을까?
■ “정유라 부정입학 가장 화나” 이날 집회에는 분노의 목소리보다 절망의 목소리가 컸다. 부인, 초등학생 딸과 함께 집회에 나온 이상래(48)씨는 “일단은 집회에 참여해야 할 것 같아서 나왔다. 대학교 졸업 이후 처음이다. 황당하고 화가 많이 난다. 밀실에서 측근들과 마음대로 휘두르라고 국민이 준 권력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의혹을 집회에 나온 이유로 꼽는 이들도 많았다. 성남에서 온 고교생 윤종화(16)군은 “최씨의 딸은 말 같지도 않은 리포트로 학점을 땄다. 우리는 아무리 공부해도 그가 들어간 대학에 못 갈 텐데 공부하는 의미가 없다는 허탈감이 들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체가 발견됐다. 불의가 법이 되면, 투쟁은 의무다”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에 사는 40대 양아무개씨도 “집회라는 데 처음 나와 봤다.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사태가 가장 많이 화가 난다. 부모들이 맞벌이하면서 열심히 벌어 아이들 가르쳐도 취직조차 안 되는데, 최씨는 학칙까지 개정해 딸을 이대라는 좋은 학교에 부정하게 입학시켰다”고 말했다.
■ “박근혜 뽑아 자식에 미안” ‘박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컸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나온 정다운(34)씨는 “오죽했으면 애들까지 데리고 나왔겠느냐. 분노와 실망을 넘어 참담하기까지 한 감정들을 마음에 담아둘 수가 없어서 나왔다. 국가가 비선 실세 통치 아래 있었다. 정책과 인사, 문화콘텐츠까지 모든 게 조정받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범죄의 선봉에 섰다. 하야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파주에서 자녀들과 함께 온 이지수(40)씨는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을 뽑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잘해줄 거라 믿고 뽑았는데, 이번 일로 모든 믿음이 깨졌다. 청와대 비서진만 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직접 연관돼 있다. 하야해야 할 시점이다. 일산 엄마들 카페 회원이 20만명이 넘는데 모두 집회에 나오고 싶어했고, 단 한 명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에서 아들 부부, 초등학생 손녀와 집회에 나온 이은미(60)씨는 “나는 박근혜 대통령 응원하는 사람이었는데 후회를 넘어 배신감을 느낀다. 아이들한테 정말 미안하다. 꼬박꼬박 세금 내고 있는데, 그 세금으로 비선 실세라는 분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썼다는 것 아니냐. 이렇게 국민을 기만할 수가 있냐”고 말했다. 이씨는 ‘박근혜 퇴진’이라고 쓰인 손팻말을 흔들었다.
■ 경찰 “시위대에 감사” 집회에 대응하는 경찰 태도는 한껏 달라졌다. 경찰은 집회 다음날인 30일 ‘시위대에 감사드린다’는 요지의 보도자료를 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29일 집회에 대한 경찰의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에서 “어제 행진 중 신고된 코스를 벗어나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하면서 일반 시민 등 참가 인원이 증가하였고, 이를 차단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와 경찰 간에 몸싸움도 있었다”면서도 “시민들께서 경찰의 안내에 따라주시고 이성적으로 협조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드린다. 향후에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준법 집회시위 문화가 정착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경찰은 보도자료에서 홍완선 종로경찰서장이 전날 시위대를 향해 “나라를 걱정하는 만큼 집회시위에서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달라”고 방송했던 사실도 언급했다. ‘불법 집회’ 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감사드린다’는 보도자료를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던 지난해 11월 14일 민중 총궐기 직후엔 “도심 불법 폭력시위 주동자 등을 전원 사법처리하고, 엄중한 책임을 물을 방침”이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낸 바 있다. 경찰 관계자는 “지금 청와대가 시위 대응 지침을 명확히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집회 관리 책임을 진 서울청장 입장에서는 강경대응했다가 사고라도 나면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부담이 있다. 집회에 애매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날 시위현장에서 경찰 저지선은 시위대에 무력하게 뚫렸다. 현장에 있던 한 경찰관은 <한겨레>에 “우리도 사람인데 당연하지 않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다음달 5일과 12일에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경찰 대응이 주목된다.
김지훈 박수진 고한솔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