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에 남북전쟁이 터지자 미국 사회는 노예제도의 존폐를 둘러싸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사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랬다. 존 브라운은 노예제 폐지를 위해 폭력도 불사하던 과격파였다. 흑인 노예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브라운이 백인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1854년부터 남부와 북부 가운데 캔자스 지방은 전쟁터 같았다. 개척지로 살러 오는 주민들이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싸웠기 때문이다. ‘피 흘리는 캔자스’라 불릴 정도였다. 노예제 지지파가 폭력을 저지를 때마다 존 브라운은 폭력으로 되갚았다. 노예제 옹호자 다섯 명을 큰 칼로 토막 쳐 살해한 1856년 5월의 ‘포타와토미 학살’에도 브라운은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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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16일, 브라운과 친구들은 하퍼스페리의 무기고를 습격한다. 장총 10만 정을 탈취하여 남부 노예들한테 나누어준다는 계획이었다. 사흘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브라운이 체포된 날이 10월18일이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정치 지도자들은 ‘역풍’이 불까 두려워 그를 모르는 척했다. 연말에 브라운은 처형당한다. 그는 자유의 투사였을까, 사람 잡는 광신자였을까? 아직도 평가는 엇갈린다.
글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