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 구내식당 들머리에서 점심식사를 하려는 국회 직원과 관계자들이 줄을 서서 빈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일명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첫날인 28일, 대한민국이 몸을 낮췄다. 고급식당에는 손님이 줄고 관청 구내식당은 북적였다. 행사는 축소되거나 취소됐다. 한편에선 새로운 문화 정착에 대한 기대감도 엿보였다.
■ 북적인 관가 구내식당 이날 점심시간 충북도 구내식당에는 297명이 몰렸다. 평소 수요일 평균 250여명이 이용했던 것에 견줘 많게는 50명가량 증가한 것이다. 배명희 구내식당 운영 주무관은 “앞으로 이용객이 늘 것에 대비해 평소보다 식사를 좀 더 많이 준비하려 한다”고 말했다. 정부세종청사에 있는 국토교통부의 한 직원은 “앞으로 구내식당을 자주 이용할 생각이다. 당분간 밥, 술 약속은 직무연관성과 상관없이 안 잡고 있다. 김영란법 위반 여부가 모호해 무조건 조심한다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관공서 주변 일부 식당들은 썰렁한 분위기였다. 서울 종로구 관공서 주변에 있는 ㅈ음식점은 이날 아예 점심 영업을 접었다. 이 식당은 간판도 달지 않고 예약 손님만 받는데, 예약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식당 운영자는 “어제까지도 점심 예약이 있었는데 28일 이후 예약이 확연히 줄었다. 우리 식당은 공무원들이 주요 고객층이라 영향이 크다. 닭·오리백숙이 주메뉴라 3만원에 맞추기 어려워 메뉴를 바꿔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고급 음식점 중에는 3만원짜리 메뉴를 만든 곳도 있었다.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 건물에 들어서 있는 연회장 ‘뱅커스클럽’은 법 시행 첫날에 맞춰 3만원짜리 메뉴 9가지를 새로 내놨다. 애피타이저부터 메인요리, 후식까지 이어지던 코스요리를 메인요리 중심으로 간소화했다. 국내 유명 한우브랜드인 ‘횡성한우’도 몸값을 낮췄다. 강원 횡성축협 한우프라자는 이날 2만4000원짜리 새 메뉴를 선보였다. 새 메뉴는 등심 100g과 얇게 손질한 횡성한우에 야채를 다져 넣은 한우 스테이크(65g) 1개로 구성됐다. 후식으로 2000원짜리 된장찌개와 밥 한 공기, 3000원짜리 소주 1병을 시켜도 식사 비용은 2만9000원이어서 법에서 정한 식사비 한계인 3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축협 쪽은 설명했다. 하지만 가족단위 등 일반손님이 많던 식당이나 중저가 식당들은 별 영향이 없는 분위기였다.
■ 지역축제 등 행사 축소 줄줄 지역축제나 기자간담회 같은 행사도 줄지어 축소되거나 취소됐다. 오는 30일 개막하는 횡성한우 축제를 담당한 축제위원회는 기관장과 출향인사를 초청해 여는 개막식 만찬 메뉴를 그동안 해오던 한우구이에서 육회비빔밥으로 바꿨다. 원팔연 횡성한우축제위원장은 “한우구이를 대접하자니 법에 저촉될까 겁나고, 손님들이 실망할까 걱정해 고민을 거듭했다”고 말했다. 29일부터 열리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조직위도 개막일 뒤풀이 일정을 취소하고, 개막공연 입장료를 5만원에서 2만원으로 내렸다. 조직위 관계자는 “법 시행 다음날이 개막일이라 부담스럽다. 가급적 축소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국립대 단과대의 학장단과 출입기자단은 29일 인근 한정식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법 시행 다음날에 모임 하기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나와 취소하기도 했다.
■ 아직은 낯선 문화, 하지만 가야할 길 경기도청에 설치된 ‘청탁금지법 사전컨설팅 콜센터’에는 이날 오후까지 100여건의 문의전화가 잇따랐다. 경찰은 “이날 저녁9시까지 모두 5건의 신고가 접수됐다”고 밝혔다. 서면 신고 2건, 112 전화 신고 3건이다. 오후 5시30분께 ‘신연희 서울 강남구청장이 관내 경로당 회장 160명을 초청해 문화예술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관광을 시켜주고 점심을 제공해 청탁금지법,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했다’는 내용의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오후 4시30분께 강원지역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은 고소인이 가격을 알 수 없는 떡 한 상자를 배달하자, 즉시 떡상자를 되돌려주고 청문감사관실에 자진 신고하기도 했다. 경찰은 이 두 건의 신고가 신고 요건을 갖춘 것으로 파악되면 수사에 착수할 예정이이다. 이날 낮 12시4분께 한 대학교 학생은 “어떤 학생이 교수에게 캔커피를 줬다. 청탁금지법 위반”이라며 112 전화로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자가 학교와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제공 가액이 100만원을 넘지 않아 경찰은 “서면으로 신고하라”고 안내한 뒤 종결처리했다. 정식 신고는 이날 오후 6시께 서울종합민원사무소를 통해 접수됐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조사팀에서 60일 내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추가조사가 필요하면 사정당국에 수사를 의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마침 이날 운동회가 열린 서울 중구 한 초등학교에서는 음식을 싸가지 못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보내 ‘마실 물을 제외하고 음료와 음식을 가져오는 건 일체 불가하다’고 알렸기 때문이다. 선생님들 음식까지 준비해올까 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학부모들은 소량의 간식 정도만 싸와 아이와 나눠 먹어야 했다. 한 학부모는 “바로 옆에 있는 담임 선생님한테는 아무것도 못 드렸다. 우리만 먹으니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어색하다”고 말했다.
한 기업 홍보담당자는 “오늘 아침 한 언론사 포럼 행사에 갔는데 화환이 하나밖에 없어 깜짝 놀랐다. ‘김영란법 시대’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식당 계산대 앞에서 각자의 카드로 계산하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금융위원회 산하 한 공공기관 홍보팀장은 “당분간은 점심이나 저녁때 정말 여유로울 것 같다. 개인 시간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살짝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김지훈 김기성 기자, 각 부서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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