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광장시장 남문 쪽 먹자골목의 한 단골 칼국수집을 찾은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공직에 있는 후배들한테 그랬어요. 비싼 밥 얻어먹고 다니지 말고 내가 소개해준 곳들에 가보라고!”
금융위원장을 지낸 김석동(63·사진)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가 최근 자신의 단골 맛집들을 소개한 책 <한끼 식사의 행복>(한국방송출판 펴냄)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서울 시내에서 1만원 남짓으로 단품 메뉴를 먹을 수 있는 식당 91곳을 빼곡히 담았다.
김영란법 시대를 맞아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후배 공무원들에게 주기 위해 만든 책 <한끼 식사의 행복>.
그는 행정고시 23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재정경제부 차관, 금융위원장 등을 지낸 정통 재무관료, 이른바 ‘모피아’ 출신이다. 금융실명제, 외환위기, 카드대란 등 주요한 경제 현안이 터질 때마다 수습을 맡아 ‘대책반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카드대란 때 ‘관치금융’ 논란에 대해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발언은 지금도 회자된다.
지난 11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그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공직자 등이 3만원 이상 식사, 5만원 이상의 선물을 받을 수 없도록 한 김영란법은 숱한 논란 끝에 오는 9월말 시행 예정이지만, 여전히 찬반 논란이 뜨겁다.
그는 김영란법 초안이 국무회의에 제안됐던 2011년 6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와 김영란(60) 전 대법관이 각각 금융위원장과 국민권익위원장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하던 시절이다. 두 사람은 부산 부민초교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국무위원들 사이에서도 좀 과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고 공직사회 안팎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너무 값비싼 접대문화가 만연해 있는 지금이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한끼 식사의 행복’을 펴낸 것도 후배 공무원들에게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만원짜리 밥상’을 소개해주고 싶어서였다. 애초 지난 3월 비매품으로 1200부를 찍었는데, 입소문을 들은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을 제안해 판매용(5000원)으로 낸 것이다. 두어달 만에 3쇄(총 9000부)를 찍었을 만큼 인기가 쏠쏠하다.
그는 “공직생활을 하다 보면 터무니없이 비싼 호텔이나 한정식집에서 만나자는 제안이 종종 있는데, 일반 국민들의 상식으로 통용되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돈 있고 빽 있는 이들로부터 과한 접대를 받다 보면 결국은 그들에게 포위될 수 있기 때문에 정책을 제대로 펴기 어려워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영란법이 내수경기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일부의 비판에 대해서 그는 “택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값비싼 곳에서 밥을 안 먹고 비싼 선물을 안 보낸다고 위축될 경제라면 아예 접는 게 낫지 않겠어요? 마치 건강을 위해서 혈관을 깨끗하게 청소하려고 하는데 이거 하면 죽을 거 같다면서 안 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독일에서는 공직자들이 밥을 같이 먹으면 사진을 찍어서 증거로 낼 만큼 엄격한데, 우리 사회는 그동안 접대문화에 너무 관대했다”고 덧붙였다.
서울 중구 충무로의 단골 맛집인 한 칼국수 식당의 주인과 함께 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책에 소개된 91곳의 식당은 ‘서울 소재, 단품 메뉴를 즐길 수 있는 집, 위치 불문 맛있는 집, 오랜 역사로 검증된 집, 1만원 안팎 넘지 않은 서민식당’을 기준으로 선정했다. 부산 출신인 그가 고등학생 때 서울로 올라와 지금껏 단골로 다닌 집들도 있다. 책에 실린 사진들도 식당을 찾을 때마다 직접 찍어둔 것들이다. 메뉴는 김치찌개, 순댓국, 설렁탕 등 19가지, 값은 5천~1만원대다. 그는 “냉면과 생태탕 값이 오르는 바람에 1만원이 좀 넘어갔다”며 멋쩍어했다.
2013년 2월 퇴임식을 앞두고 금융위원회 간부들과 고별 만찬을 함께 한 ‘열차집’도 그의 단골 맛집이었다. 1954년부터 종로 피맛길에서 빈대떡을 팔아온 집이다. 비서가 가져온 유명 식당 리스트를 제쳐두고 그가 직접 골랐다. 허름한 가게 안쪽의 비좁은 방에 20명이 넘는 금융위 간부들이 꽉 들어찬 채로 환송회를 했다. 광화문 근처 금융위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그때까지 간부들 중에서 이곳을 아는 이는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평양냉면이다. 이북(원산) 출신인 어머니를 따라서 걸음마를 할 때부터 냉면을 맛보기 시작했다. 책에는 의정부 평양면옥과 장충동 평양면옥으로부터 갈라지는 대한민국 냉면의 양대 계보 이야기도 실려 있다. “을밀대 냉면은 얼음을 빼고 먹어야 제맛이 난다”거나 “본가평양면옥은 3층에 방이 있어 모임이 가능하다”는 등의 세심한 정보도 보인다.
기자를 만난 날에도 그의 손에는 작은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개정판을 낼 지도 모르겠어요. 독자들로부터 맛집에 대한 의견이나 정보가 전자우편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어서요.(웃음)”
황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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