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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인터뷰 ; 가족
90살 할아버지와의 총선 토론회
90살 할아버지와의 총선 토론회
▶ 총선을 앞둔 3월20일, 90살 할아버지와 33살 손녀가 마주 앉았습니다. 진보 성향의 후보에게 투표해도 당선되지 않는 현실이 답답한 손녀와 ‘안보가 제일’이라고 믿는 전쟁세대 할아버지가 선거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화는 현대사를 넘나들었습니다. 둘의 대화는 세대간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혔을까요? ‘인터뷰; 가족’은 독자 여러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실명과 익명 기고 모두 환영합니다. 보내실 곳 gajok@hani.co.kr. 200자 원고지 기준 20장 안팎.
할아버지는 1926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겪으며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목격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대를 다닌 할아버지는 해방 뒤 문교부에서 일하다 교장으로 퇴임했다. 정치·경제·사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와는 견해가 다르지만, 무조건 ‘1번 찍으라’고 강요하기보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의 정책을 조목조목 따져 논리를 펼친다는 점에서 ‘극우 보수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총선을 앞둔 지난 20일, 90살 할아버지와 33살 손녀가 마주앉았다. 연일 계속되는 야당과 여당의 공천 심사 발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무렵이었다. 난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해도 당선되지 않는 현실이 답답했다. 선거가 무슨 소용이 있나 막막한 마음이었다. ‘안보’가 제일이라는 할아버지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할아버지의 선거는 어땠는지도.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다니고
해방 후 교장 지낸 엘리트 할아버지
셋이 한번에 들어가 1명이 다 찍는
말도 안되는 3·15 부정선거의 기억 전쟁 전날 서울 왔다 졸지에 참전
다시 전쟁 일어나면 안된다 여겨
“안보 내세운 1번 찍으실 거예요?”
“여야 누구라도 안보세력 찍을 것” 나 할아버지, 이번 선거에 투표하실 거죠? 할아버지 노는 꼴들을 보라우. 어디 투표하고 싶겠니. (할아버지 지역구에서는 그동안 해오던 국회의원이 공천에 탈락하고 새로운 인물이 공천을 받았다.) 나 진짜요? 그럼 지금까지 선거 때 투표 안 한 적 있으세요? 할아버지 대개 했지. 안 한 적은 없을 기야. 나 언제 처음으로 투표했는지 기억나세요? 할아버지 1948년인가. 5월쯤에 한 거 같은데.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했지. 한 200명 뽑았을 거야. 미군정이 주도해서 했는데 그때 통일정부가 아닌 단독정부를 수립한다고 이북에서 반대하고 김구도 반대를 했지. 그래도 선거는 치렀고 남한 사람이면 거의 다 투표했어. 나 할아버지는 그래도 지지한 사람이 거의 다 당선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그럴 리가 있니. 내가 이회창이를 몇 번이나 뽑았는데 결국 안 됐지. 또 당선이 되면 뭘 하네. 힘 못 쓰는 사람도 있었고, 원하는 사람을 찍지 못할 때도 있었지. 나 들어가서 원하는 사람 찍으면 되는데 왜 못 뽑아요? 투표함 들어가면 아무도 못 보잖아요? 할아버지 그럴 때가 있었지. 3·15 부정선거라고. 너 학교에서 안 배웠네? 나 배웠죠. 그래도 상상이 잘 안 가요. 할아버지 3·15 부정선거 이전인 1956년에 대통령 선거랑 부통령 선거가 있었어. 그때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이랑 신익희랑 조봉암이라는 사람이 나왔다고. 근데 신익희가 유세를 가던 중에 열차에서 그만 죽었어요. 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무효표를 던졌어. 죽은 신익희한테 준 표지, 그러니까. 이때 아주 간신히 이승만이가 대통령이 됐다고. 거기다 자기 양아들 이기붕이 부통령이 될 줄 알았는데, 부통령은 장면이가 돼 버렸어. 나 그래도 장면 선생이 부통령이 되긴 됐네요. 할아버지 그때도 부정선거 기미가 있긴 했지. 그때 야당 사람들이 선거함을 안고 이틀을 버텼다는 거 아니야. 이거 어디로 가져가면 조작하니까 여기서 열어야 한다 말이야. 변소 갔다 오면 가져갈까 봐 요강 갖다 놓고 이틀을 버텼지. 그래서 결국 이승만이가 ‘그냥 거기서 열어라’고 해서 결국 장면이 된 거지. 근데 부통령이 되면 뭘 하네. 이승만이가 장면을 부통령으로 치지도 않았는데. 나 그렇게 버틴 게 대단했네요. 할아버지 이러다가 결국 3·15 부정선거까지 온 거야. 암만 봐도 민심이 아니거든. 그냥 투표하면 안 될 거 같으니까. 나 할아버지는 그때 누굴 지지하셨는데요? 할아버지 나야 장면을 찍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있나. 그때 셋씩 묶어서 투표함에 들어가면 한 놈이 그냥 다 찍어 줬거든. 그때 내가 연천에서 선생 할 땐데, 우리 집주인이랑 같이 들어가서 했지. 나 못 하겠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할아버지 야야, 안 할 수가 있나 어디. 그때 한 상사가 술을 먹고 투표하러 왔다가 “야 이거 개판이로구나.” 이 한마디 했다가 즉시 시아이시(CIC)한테 묶여 갔다우. 나 시아이시요? 할아버지 군대 내 방첩대를 시아이시로 불렀어. 권한이 셌지. 그리고 한 달 후 4·19 혁명이 일어난 다음에 잡혀갔던 사람은 하루아침에 애국자가 됐어. 이승만이가 하와이로 내빼고, 이기붕이는 죽고. 당연한 거야. 부정선거를 하니까 혁명이 일어나지. 나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5·16 쿠데타가 났잖아요. 할아버지 장면이가 문인으로 얌전한 사람이었는데. 민주적인 사람이고. 근데 힘이 너무 약했지. 민주당에서 신구파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데모하고. 나라가 혼란해지니까 그 핑계로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한 거지. 나 그동안 선거할 때 어떤 사람을 주로 뽑으셨어요? 할아버지 우리 국가의 안정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람. 나 다른 건 잘 못해도 안보만 확실하면 누구든 뽑으실 거예요? 할아버지 정치는 잘 못하는 면이 있다 해도 군대의 신임을 주고 휴전선을 잘 지킨다면 뽑아야지. 나 왜요? 어른들은 왜 그렇게 안보에 민감하세요? 할아버지 1950년 6월24일, 나는 그때 개성에 있는 상업학교에서 생물 선생으로 있었어. 그날은 금요일이었는데 학교를 일찍 마치고 서울로 가려고 개성역으로 갔어. 지갑에 지금 돈으로 한 3만원 정도 들고 서울 창신동에 사는 네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 역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너 서울 가는구나. 내일 보자’ 하고 헤어졌는데 다시는 못 만났어. 다음날 전쟁이 났거든. 나 개성은 다시 못 가 보셨죠? 할아버지 못 갔지. 갈 수가 있나 어디. 서울에서 바로 입대했지. 전쟁은 선생이던 내가 군인이 되고, 멀쩡히 자기 집에서 살던 사람들이 거지가 되고, 내일 보자고 인사하던 친구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거야. 군인들이 죽는 건 말할 나위도 없고. 그게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건지 니들은 모른다우. 언제 또 그렇게 될지 아무도 몰라. 사람 일을 누가 아네. 그러니까 항상 채비를 갖추어야 해. 그게 6·25의 교훈이야. 그걸 다 겪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치. 죽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나 근데 안보를 내세우는 현 정권에서 되레 남북관계가 더 안 좋아지잖아요? 평화를 위해선 남북교류협력을 넓혀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혹시 할아버지처럼 전쟁을 경험한 분들의 안보심리를 이용한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할아버지 남북관계 중요하지. 지금처럼 북한이 핵무기다 미사일이다 도발해오면 철저한 안보 태세를 갖춰야지. 안보에 관해서라면 나는 여야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거든. 어느 정도 입장 차이는 있겠지만 전쟁이 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같을 기야. 그리고 옛날에야 정치권에서 안보심리를 이용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영향이 미미할 거야. 나 같은 참전용사가 몇이나 남아 있겠니.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아주 좋은 시절이야. 정치가 매일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니까 가능한 거야.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어림도 없지. 말 한마디 잘못하면 바로 잡혀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데 싸움이 어디가 있어.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라우. 차차 좋아질 거야.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느끼는 나와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입장은 분명 달랐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니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안보가 왜 중요한 기준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노년세대의 안보 중시에 비해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에 대해 일관되고 지속적인 지지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에게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때도 있었으니 아프고 실망스럽더라도 정치에 눈감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걸까. 누군가는 당연하게 누릴 수 없었던 투표의 권리를 이제 청년들도 행사해야 할 때다. 좀더 살 만한 세상을 위해! 할아버지를 이해하고픈 출판 편집자 김혜원
해방 후 교장 지낸 엘리트 할아버지
셋이 한번에 들어가 1명이 다 찍는
말도 안되는 3·15 부정선거의 기억 전쟁 전날 서울 왔다 졸지에 참전
다시 전쟁 일어나면 안된다 여겨
“안보 내세운 1번 찍으실 거예요?”
“여야 누구라도 안보세력 찍을 것” 나 할아버지, 이번 선거에 투표하실 거죠? 할아버지 노는 꼴들을 보라우. 어디 투표하고 싶겠니. (할아버지 지역구에서는 그동안 해오던 국회의원이 공천에 탈락하고 새로운 인물이 공천을 받았다.) 나 진짜요? 그럼 지금까지 선거 때 투표 안 한 적 있으세요? 할아버지 대개 했지. 안 한 적은 없을 기야. 나 언제 처음으로 투표했는지 기억나세요? 할아버지 1948년인가. 5월쯤에 한 거 같은데.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했지. 한 200명 뽑았을 거야. 미군정이 주도해서 했는데 그때 통일정부가 아닌 단독정부를 수립한다고 이북에서 반대하고 김구도 반대를 했지. 그래도 선거는 치렀고 남한 사람이면 거의 다 투표했어. 나 할아버지는 그래도 지지한 사람이 거의 다 당선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그럴 리가 있니. 내가 이회창이를 몇 번이나 뽑았는데 결국 안 됐지. 또 당선이 되면 뭘 하네. 힘 못 쓰는 사람도 있었고, 원하는 사람을 찍지 못할 때도 있었지. 나 들어가서 원하는 사람 찍으면 되는데 왜 못 뽑아요? 투표함 들어가면 아무도 못 보잖아요? 할아버지 그럴 때가 있었지. 3·15 부정선거라고. 너 학교에서 안 배웠네? 나 배웠죠. 그래도 상상이 잘 안 가요. 할아버지 3·15 부정선거 이전인 1956년에 대통령 선거랑 부통령 선거가 있었어. 그때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이랑 신익희랑 조봉암이라는 사람이 나왔다고. 근데 신익희가 유세를 가던 중에 열차에서 그만 죽었어요. 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무효표를 던졌어. 죽은 신익희한테 준 표지, 그러니까. 이때 아주 간신히 이승만이가 대통령이 됐다고. 거기다 자기 양아들 이기붕이 부통령이 될 줄 알았는데, 부통령은 장면이가 돼 버렸어. 나 그래도 장면 선생이 부통령이 되긴 됐네요. 할아버지 그때도 부정선거 기미가 있긴 했지. 그때 야당 사람들이 선거함을 안고 이틀을 버텼다는 거 아니야. 이거 어디로 가져가면 조작하니까 여기서 열어야 한다 말이야. 변소 갔다 오면 가져갈까 봐 요강 갖다 놓고 이틀을 버텼지. 그래서 결국 이승만이가 ‘그냥 거기서 열어라’고 해서 결국 장면이 된 거지. 근데 부통령이 되면 뭘 하네. 이승만이가 장면을 부통령으로 치지도 않았는데. 나 그렇게 버틴 게 대단했네요. 할아버지 이러다가 결국 3·15 부정선거까지 온 거야. 암만 봐도 민심이 아니거든. 그냥 투표하면 안 될 거 같으니까. 나 할아버지는 그때 누굴 지지하셨는데요? 할아버지 나야 장면을 찍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있나. 그때 셋씩 묶어서 투표함에 들어가면 한 놈이 그냥 다 찍어 줬거든. 그때 내가 연천에서 선생 할 땐데, 우리 집주인이랑 같이 들어가서 했지. 나 못 하겠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할아버지 야야, 안 할 수가 있나 어디. 그때 한 상사가 술을 먹고 투표하러 왔다가 “야 이거 개판이로구나.” 이 한마디 했다가 즉시 시아이시(CIC)한테 묶여 갔다우. 나 시아이시요? 할아버지 군대 내 방첩대를 시아이시로 불렀어. 권한이 셌지. 그리고 한 달 후 4·19 혁명이 일어난 다음에 잡혀갔던 사람은 하루아침에 애국자가 됐어. 이승만이가 하와이로 내빼고, 이기붕이는 죽고. 당연한 거야. 부정선거를 하니까 혁명이 일어나지. 나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5·16 쿠데타가 났잖아요. 할아버지 장면이가 문인으로 얌전한 사람이었는데. 민주적인 사람이고. 근데 힘이 너무 약했지. 민주당에서 신구파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데모하고. 나라가 혼란해지니까 그 핑계로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한 거지. 나 그동안 선거할 때 어떤 사람을 주로 뽑으셨어요? 할아버지 우리 국가의 안정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람. 나 다른 건 잘 못해도 안보만 확실하면 누구든 뽑으실 거예요? 할아버지 정치는 잘 못하는 면이 있다 해도 군대의 신임을 주고 휴전선을 잘 지킨다면 뽑아야지. 나 왜요? 어른들은 왜 그렇게 안보에 민감하세요? 할아버지 1950년 6월24일, 나는 그때 개성에 있는 상업학교에서 생물 선생으로 있었어. 그날은 금요일이었는데 학교를 일찍 마치고 서울로 가려고 개성역으로 갔어. 지갑에 지금 돈으로 한 3만원 정도 들고 서울 창신동에 사는 네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 역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너 서울 가는구나. 내일 보자’ 하고 헤어졌는데 다시는 못 만났어. 다음날 전쟁이 났거든. 나 개성은 다시 못 가 보셨죠? 할아버지 못 갔지. 갈 수가 있나 어디. 서울에서 바로 입대했지. 전쟁은 선생이던 내가 군인이 되고, 멀쩡히 자기 집에서 살던 사람들이 거지가 되고, 내일 보자고 인사하던 친구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거야. 군인들이 죽는 건 말할 나위도 없고. 그게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건지 니들은 모른다우. 언제 또 그렇게 될지 아무도 몰라. 사람 일을 누가 아네. 그러니까 항상 채비를 갖추어야 해. 그게 6·25의 교훈이야. 그걸 다 겪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치. 죽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나 근데 안보를 내세우는 현 정권에서 되레 남북관계가 더 안 좋아지잖아요? 평화를 위해선 남북교류협력을 넓혀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혹시 할아버지처럼 전쟁을 경험한 분들의 안보심리를 이용한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할아버지 남북관계 중요하지. 지금처럼 북한이 핵무기다 미사일이다 도발해오면 철저한 안보 태세를 갖춰야지. 안보에 관해서라면 나는 여야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거든. 어느 정도 입장 차이는 있겠지만 전쟁이 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같을 기야. 그리고 옛날에야 정치권에서 안보심리를 이용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영향이 미미할 거야. 나 같은 참전용사가 몇이나 남아 있겠니.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아주 좋은 시절이야. 정치가 매일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니까 가능한 거야.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어림도 없지. 말 한마디 잘못하면 바로 잡혀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데 싸움이 어디가 있어.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라우. 차차 좋아질 거야.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느끼는 나와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입장은 분명 달랐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니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안보가 왜 중요한 기준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노년세대의 안보 중시에 비해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에 대해 일관되고 지속적인 지지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에게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때도 있었으니 아프고 실망스럽더라도 정치에 눈감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걸까. 누군가는 당연하게 누릴 수 없었던 투표의 권리를 이제 청년들도 행사해야 할 때다. 좀더 살 만한 세상을 위해! 할아버지를 이해하고픈 출판 편집자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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