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가족
늦깎이 박사과정 대학원생 부부가 있습니다. 남편은 사회과학을, 아내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사회적인 인문사회과학의 홀대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는 학문적 동지로서의 모습보다는 보통의 새내기 부부와 다름없이 서로의 차이로 인해 상처받고 고민하는 일이 더 많아 보입니다. 부부는 말로 주고받으며 상처 낸 갈등을 차분히 글로 써 대화를 나눴습니다. 잠시 둘의 일상을 들여다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할 거 많아?” 내가 가장 듣기 싫은 질문이다. 결혼 3년차에도 이 물음엔 적응이 안 된다. “저녁은 집에서 먹을 수 있어?”가 따라 나오면 더욱더. 욱하는 감정을 다스리고 웃으며 말한다. “미안, 오늘도 할 게 많네.” 시무룩한 아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알았어. 공부 잘하다 와.”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쉰다. 다시 출력해 둔 논문을, 밑줄을 빡빡 쳐가면서 읽는다.
“실증 사회과학 연구.” 대학원에서 무슨 공부하고 있냐는 물음에 보통 이렇게 답한다. 중요한 사회현상에 대해, 이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이론적 틀을 짜서, 실제 그게 맞는지를 (대부분) 수리적 기법을 통해 입증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내 공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내 분야 이론의 흐름을 파악하고 최근의 중요한 논쟁을 따라잡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공부한 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인 통계학과 프로그래밍 공부다. 시쳇말로 ‘이과스러운’ 이 공부는, 머리가 터진다는 표현으로 모자란다. 거기다 ‘국내 박사’라는 핸디캡은 매일같이 나를 짓누른다. 내가 유학파 틈바구니에서 과연 무사히 졸업하고 온전한 한 사람의 학자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이런 압박에 매 순간 시달린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할 때가 가장 괴롭고, 뭐라도 읽고 쓰고 있을 때가 가장 마음 편하다.
남편
공부하랴, 프로젝트 하랴
내 압박감과 책임감 알까?
국내 박사 핸디캡만 해도
얼마나 신경쓰인다고… 아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해
학문도 그렇고 가정도 그래
공부시간 부족하면 내가 벌게
스트레스 덜 받고 공부해 공부만큼 나를 짓누르는 건 생활이다. 주택담보대출의 은행 이자부터 시작되는, 가장으로서 기본적인 책임 말이다. 아내도 강의와 기고 등으로 비정기적인 수입이 있긴 하지만 어림도 없는 수준이다. 별수 없이 내가 버텨야 한다. 다행히 사회과학치고 사정이 좀 나은 전공인지라 연구 프로젝트, 조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단은 있다. 그러나 이걸 하다 보면 공부 시간이 줄어든다. 돈을 위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느라 수업을 제대로 준비 못해 그만큼 학점이 떨어지기도 했다. 이틀 밤을 새워 연구 프로젝트를 마친 날 오후에 잡힌 기말시험을 초치기로 준비하면서 ‘공부만’ 하는 동기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아내는 알까. 그럴 때마다, 결혼을 일찍 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결혼을 늦추고, 부모님 집에서 기생하며 예전 직장에서 벌어둔 돈으로 버텼다면…. 그래서다. “할 거 많아?”라고 묻는 아내가 서운한 건. 아내도 전공은 다르지만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더욱 답답해진다. 전일제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내가 느끼는 압박에 대해 아내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간혹, “당신 왜 그렇게 안달복달 불안하게 살아?”라는 물음을 받으면 정말 울고 싶다. 뒤처지면 학자로서의 삶이 끝임을 정말 모르는 걸까. 서로 힘든 부분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망상이었을까. 왜 아내는 진득하게 앉아서 책 볼 시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주지 않는 걸까. 거기에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이 육아 문제다. 우리는 삼십대 중반에 결혼했고 아내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결혼 전에는 둘 다 관심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아내는 부쩍 아이 이야기를 한다. 난 그럴 때마다 현실이 괴물로 변하는 게 보인다. 연구 프로젝트로 연명하는 불안정한 대학원생의 수입은 당분간 그대로다. 아무리 아내가 육아를 전담한다 해도 내 공부 시간은 줄어들 거고 그만큼 학위논문이 늦어지면, 나는 더욱 스트레스를 받을 거고 이를 아이 탓으로 돌리는 순간, 집은 지옥이 되겠지. 괜히 대학원에서 “학자가 되려면 가급적 결혼은 하지 말고, 굳이 해야겠다면 아이는 나중에…”라는 말이 돌까. 지금 둘 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육아가 지닌 의미를 왜 외면하는 걸까. 그럼에도 난 침묵을 지킨다. “그럴 거면 왜 결혼했는데? 혼자 공부나 하지?” 결혼 초에 이 문제로 싸웠을 때 아내가 울면서 내게 물었다. 이 질문에 타당하게 답할 방법이, 내게는 없다. 그저 버틸 뿐이다. 그래서 열한시 다 되어 집으로 가는 지하철역에서, 전화를 걸어 싹싹 빌 뿐이다. “그대야, 오늘도 늦어서 미안해.” 아내가 남편에게 “할 건 언제나 많아… 하여튼 늦어서 미안^^” 남편은 오늘도 똑같은 문자를 보낸다. 조교와 학업에 바쁜 남편은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가 밤늦게 돌아온다. 나 역시 비슷한 생활을 하다 보니, 이건 두 하숙생이 한집에 사는 모양새다. 주말에 같이 밥해 먹고 동네 산책을 할 때야 비로소 결혼했다는 실감이 든다. “알았어. 밤에 봐.” 오늘도 남편은 열한시가 넘어야 집에 올 거다. 결혼하면서 적어도 평일에 한번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이번 주도 밥 한번 같이 못 먹고 지나간다. 십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진학을 결심했을 즈음, 직장과 비슷한 꿈을 가진 남자를 만났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니 서로를 더 잘 이해해주고 아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 다 백수니 빨리 살림 합치는 게 낫지 않냐”는 오빠의 말에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행복한 학자 부부로 성장하길 기대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며 맞춰가는 게 결혼생활이긴 하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학업에 대한 관념의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학생으로서 공부가 최우선이지만, 남편은 도가 지나쳤다. 자신에겐 잠시의 여유도 사치인데, 같은 박사과정생인 나는 왜 이리 여유가 넘치냐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렇게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살아?” 하고 물으면 이내 남편의 얼굴에 짜증이 실린다. 누구나 알 만한 직장에서 십년 넘게 일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건강이 안 좋아지고 내 속도로 내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박사과정 진학을 결심했다. 물론 전공이 매력적이고 재미난 학문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특히 내 전공은 수업을 듣고 전공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답사와 전시 관람 등 다양한 경험과 성찰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학부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며 독립된 필자로서 글도 쓴다. 학생, 강사, 저자로서 3인의 역할을 해내는 것도 벅찬데, 결혼하고 나니 갖가지 집안일이 한가득이다. 다음달 마무리해서 투고해야 할 학회 논문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어지러운 방 안과 더러운 화장실, 설거지 더미, 곧 조리하지 않으면 상할 것 같은 식재료 무더기다. 이런 하소연을 하면 남편은 공부가 우선인데 집 좀 더러우면 어떻고 음식 좀 버리면 어떻냐며,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공부하란다. 아니, 그게 사람 사는 건가? 남편이 보기에는 내 생활이 느슨해 보이나 보다. 하지만 나는 내 속도대로, 내 흐름대로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다. 본래 장기전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공부이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지 않나. 그런데 남편에게 이따금 “당신은 박사과정생으로서 치열함이 부족한 것 같아”라는 말을 들으면, 열이 난다. 치열함도 좋지만, 늦게 시작한 공부이니 제대로 공부하고 싶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해도 능률주의자인 그는 나를 타박한다.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공부량이 얼마나 많은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기가 얼마나 희생을 하고 있는지를 늘어놓으며, 간접적으로 내 생활을 나태하다고 비난한다. 그것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 그래. 현실적으로 남편이 내 전공보다 훨씬 돈벌이가 되는 공부를 하고 있고, 나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일하고 공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경제적으로 신경 안 쓰게 해 주는 건,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 역시 고정적이진 않아도 강의와 기고, 저술을 통해 가계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남편에게 공부시간이 부족하면 내가 벌 테니 스트레스 덜 받고 공부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2세 문제다. 사실 결혼 전에는 아이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이뤄가는 것은 우리가 한 단계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인데, 이걸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나는 30대 후반에 결혼해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남편은 오로지 ‘현실’만을 들이밀며 내 ‘철없음’을 꾸짖는다. 몇 번을 이 문제로 다투다, 최근 남편이 백기를 들긴 했다. 그와 동시에 아이를 낳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하며, 내 공부며 경력 또한 몇 년간 단절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성 발언을 날렸다. 결국 남편은 자신의 공부가 끝날 때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을 모른다며 나를 애 취급하는 남편은, 내가 공부와 생활의 압박, 모두를 이겨낼 수 있는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음을 왜 모를까. 늦깎이 박사과정 학생 부부
공부하랴, 프로젝트 하랴
내 압박감과 책임감 알까?
국내 박사 핸디캡만 해도
얼마나 신경쓰인다고… 아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해
학문도 그렇고 가정도 그래
공부시간 부족하면 내가 벌게
스트레스 덜 받고 공부해 공부만큼 나를 짓누르는 건 생활이다. 주택담보대출의 은행 이자부터 시작되는, 가장으로서 기본적인 책임 말이다. 아내도 강의와 기고 등으로 비정기적인 수입이 있긴 하지만 어림도 없는 수준이다. 별수 없이 내가 버텨야 한다. 다행히 사회과학치고 사정이 좀 나은 전공인지라 연구 프로젝트, 조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단은 있다. 그러나 이걸 하다 보면 공부 시간이 줄어든다. 돈을 위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느라 수업을 제대로 준비 못해 그만큼 학점이 떨어지기도 했다. 이틀 밤을 새워 연구 프로젝트를 마친 날 오후에 잡힌 기말시험을 초치기로 준비하면서 ‘공부만’ 하는 동기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아내는 알까. 그럴 때마다, 결혼을 일찍 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결혼을 늦추고, 부모님 집에서 기생하며 예전 직장에서 벌어둔 돈으로 버텼다면…. 그래서다. “할 거 많아?”라고 묻는 아내가 서운한 건. 아내도 전공은 다르지만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더욱 답답해진다. 전일제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내가 느끼는 압박에 대해 아내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간혹, “당신 왜 그렇게 안달복달 불안하게 살아?”라는 물음을 받으면 정말 울고 싶다. 뒤처지면 학자로서의 삶이 끝임을 정말 모르는 걸까. 서로 힘든 부분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망상이었을까. 왜 아내는 진득하게 앉아서 책 볼 시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주지 않는 걸까. 거기에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이 육아 문제다. 우리는 삼십대 중반에 결혼했고 아내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결혼 전에는 둘 다 관심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아내는 부쩍 아이 이야기를 한다. 난 그럴 때마다 현실이 괴물로 변하는 게 보인다. 연구 프로젝트로 연명하는 불안정한 대학원생의 수입은 당분간 그대로다. 아무리 아내가 육아를 전담한다 해도 내 공부 시간은 줄어들 거고 그만큼 학위논문이 늦어지면, 나는 더욱 스트레스를 받을 거고 이를 아이 탓으로 돌리는 순간, 집은 지옥이 되겠지. 괜히 대학원에서 “학자가 되려면 가급적 결혼은 하지 말고, 굳이 해야겠다면 아이는 나중에…”라는 말이 돌까. 지금 둘 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육아가 지닌 의미를 왜 외면하는 걸까. 그럼에도 난 침묵을 지킨다. “그럴 거면 왜 결혼했는데? 혼자 공부나 하지?” 결혼 초에 이 문제로 싸웠을 때 아내가 울면서 내게 물었다. 이 질문에 타당하게 답할 방법이, 내게는 없다. 그저 버틸 뿐이다. 그래서 열한시 다 되어 집으로 가는 지하철역에서, 전화를 걸어 싹싹 빌 뿐이다. “그대야, 오늘도 늦어서 미안해.” 아내가 남편에게 “할 건 언제나 많아… 하여튼 늦어서 미안^^” 남편은 오늘도 똑같은 문자를 보낸다. 조교와 학업에 바쁜 남편은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가 밤늦게 돌아온다. 나 역시 비슷한 생활을 하다 보니, 이건 두 하숙생이 한집에 사는 모양새다. 주말에 같이 밥해 먹고 동네 산책을 할 때야 비로소 결혼했다는 실감이 든다. “알았어. 밤에 봐.” 오늘도 남편은 열한시가 넘어야 집에 올 거다. 결혼하면서 적어도 평일에 한번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이번 주도 밥 한번 같이 못 먹고 지나간다. 십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진학을 결심했을 즈음, 직장과 비슷한 꿈을 가진 남자를 만났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니 서로를 더 잘 이해해주고 아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 다 백수니 빨리 살림 합치는 게 낫지 않냐”는 오빠의 말에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행복한 학자 부부로 성장하길 기대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며 맞춰가는 게 결혼생활이긴 하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학업에 대한 관념의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학생으로서 공부가 최우선이지만, 남편은 도가 지나쳤다. 자신에겐 잠시의 여유도 사치인데, 같은 박사과정생인 나는 왜 이리 여유가 넘치냐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렇게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살아?” 하고 물으면 이내 남편의 얼굴에 짜증이 실린다. 누구나 알 만한 직장에서 십년 넘게 일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건강이 안 좋아지고 내 속도로 내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박사과정 진학을 결심했다. 물론 전공이 매력적이고 재미난 학문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특히 내 전공은 수업을 듣고 전공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답사와 전시 관람 등 다양한 경험과 성찰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학부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며 독립된 필자로서 글도 쓴다. 학생, 강사, 저자로서 3인의 역할을 해내는 것도 벅찬데, 결혼하고 나니 갖가지 집안일이 한가득이다. 다음달 마무리해서 투고해야 할 학회 논문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어지러운 방 안과 더러운 화장실, 설거지 더미, 곧 조리하지 않으면 상할 것 같은 식재료 무더기다. 이런 하소연을 하면 남편은 공부가 우선인데 집 좀 더러우면 어떻고 음식 좀 버리면 어떻냐며,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공부하란다. 아니, 그게 사람 사는 건가? 남편이 보기에는 내 생활이 느슨해 보이나 보다. 하지만 나는 내 속도대로, 내 흐름대로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다. 본래 장기전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공부이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지 않나. 그런데 남편에게 이따금 “당신은 박사과정생으로서 치열함이 부족한 것 같아”라는 말을 들으면, 열이 난다. 치열함도 좋지만, 늦게 시작한 공부이니 제대로 공부하고 싶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해도 능률주의자인 그는 나를 타박한다.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공부량이 얼마나 많은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기가 얼마나 희생을 하고 있는지를 늘어놓으며, 간접적으로 내 생활을 나태하다고 비난한다. 그것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 그래. 현실적으로 남편이 내 전공보다 훨씬 돈벌이가 되는 공부를 하고 있고, 나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일하고 공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경제적으로 신경 안 쓰게 해 주는 건,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 역시 고정적이진 않아도 강의와 기고, 저술을 통해 가계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남편에게 공부시간이 부족하면 내가 벌 테니 스트레스 덜 받고 공부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2세 문제다. 사실 결혼 전에는 아이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이뤄가는 것은 우리가 한 단계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인데, 이걸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나는 30대 후반에 결혼해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남편은 오로지 ‘현실’만을 들이밀며 내 ‘철없음’을 꾸짖는다. 몇 번을 이 문제로 다투다, 최근 남편이 백기를 들긴 했다. 그와 동시에 아이를 낳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하며, 내 공부며 경력 또한 몇 년간 단절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성 발언을 날렸다. 결국 남편은 자신의 공부가 끝날 때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을 모른다며 나를 애 취급하는 남편은, 내가 공부와 생활의 압박, 모두를 이겨낼 수 있는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음을 왜 모를까. 늦깎이 박사과정 학생 부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